서평: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作

상상인 듯하지만 현실에 있는 SF문학

by 버미

표지부터 몽글몽글하다. 제목은 말할 것도 없고. 빛의 속도라고 하면 흔히 지구와 행성 간의 거리를 말할 때 몇 광년이 걸린다 이것만 생각했다. 파스텔톤 배경에 박혀있는 제목에 호기심이 생겨 책을 펼쳐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7개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소설의 문장이 아름답다. SF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눈 앞에 장면이 그려지는 듯하다. 이 책의 단편소설 중 몇 개만 추려서 간단한 감상문을 써보려고 한다.

파스텔톤의 신비로운 표지

-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슬픔이 있기에 사랑을 더욱 진실되게 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느끼면 태초의 행복하기만 했던 시절로 마냥 돌아갈 수 없는 그 감정을 잘 표현해낸 것 같다. 아픔과 고통을 알면서도, 핍박받는 현실을 알면서도, 사랑은 이 모든 것을 감수할 만큼의 힘을 가진다.


- 스펙트럼

읽고 나서 마음이 뭉클했다. 사실 뭉클함으로 표현하는 게 아쉬울 만큼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외계 행성에서 만난 루이와 희진이 서로를 이방인처럼 대하면서도 이해하려는 노력. 그리고 생애주기가 3-5년이 전부인 루이가 그다음 루이에게 색채 언어로 전한 희진에 대한 정보. 이 모든 추억과 관계를 영원히 남기기 위해 연구진에게 행성의 정보를 알리지 않은 희진의 마음까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전혀 다른 존재의 생물들이 서로를 놀라워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스펙트럼에서의 묘사를 읽다 보니 이 아름다운 색채의 표지는 아마 스펙트럼에서 희진을 기록했던 루이의 그림이 아닐까 싶다.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잊힘에 대해 이렇게 과학적이면서 철학적이고 서정적으로 쓸 수 있을까. 기술의 발전은 종종 인류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주지만 한편으로 그 발전 이전의, 그러니까 과거의 언젠가엔 큰 혁신이었던 기술은 금방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다.


기술만 사라져 버리면 그나마 괜찮을지 모르겠다. 중요한 건 기술 말고도 모든 기억들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 한 때 유명한 과학자였던 노인 안나도, 슬렌포니아 행성도 한 세대 정도 나이 차이가 나는 남자가 기억하기엔 그 흔적은 희미하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그러나 안나는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가 지속해왔던 연구와 가족과 그들이 있는 슬렌포니아 행성까지도. 그녀가 떠난 마지막 여정은 분명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셔틀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낡고 오래됐다. 하지만 모두에게 잊혀간 기억들을 안나는 잊지 않고 있다. 실패가 예견된 여정이지만 '기억'하는 안나의 출발은 전혀 무모하지 않다.


- 감정의 물성

손에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는 감정을 물체화해서 판매한다라. 우울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물성도 팔리는 이유가 나는 이해가 갔다. 언젠가 우울에 잠식되어 본 적이 있었다. 이 감정을 스스로 통제하고 싶은 열망이 처음엔 있었으나 점점 그보다 우울감이 더 커져 어쩔 수 없이 그 감정에 지배당하는 기분이었다. 보현이가 우울체를 계속해서 사들이는 것도 어떻게든 우울함을 보이는 곳에 비치해둠으로써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고 싶었던 게 아닐까.


-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최초의 동양인 비혼모 중년 여성 우주인이 된 재경. 그녀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기대는 현실과 많이 맞닿아있다. 세상의 표준은 백인 남성에 맞춰져 있고, 그 표준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 '최초'의 어떤 것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인 이슈를 낳는다. 특히 그 사람의 업적은 뒤로한 채 표준에 벗어난 특성만이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린다. 그리고 그 특성은 표준이 아닌 것을 넘어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가 속한 집단 전부의 실패가 되는데,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렇지 않다

재경이 '최초로 우주 터널을 통과한 인간의 타이틀'을 버리고 심해로 사라졌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표준 인간의 기준을 제대로 검증해야 한다고 말한다. 재경은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이에 하나하나 대꾸할 순 없다. 지금 사회에도 또 다른 재경들에게 얼마나 많은 잣대를 들이대는가를 생각하면 참 슬프다는 생각도 든다.


재경은 지구 밖에서 보는 우주가 이곳에서 보는 우주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심해 속으로 떠난다. 그녀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가윤은 재경이 걸었던 길을 똑같이 걷는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달랐다. 그녀는 우주터널을 통과한 최초의 여성 동양인 우주인이 됐다. 재경이 소수자에 대한 편견에 균열을 냈기 때문에, 또 소수자로서 이미 최초의 실패를 만들었기 때문에 가윤은 최초 동양인 여성 우주인이 되기 위해 겪어야 했던 부담을 덜어낼 수 있었다. 재경은 언제까지나 가윤의 영웅이었고, 가윤은 또 누군가의 영웅이 될 테다.


비표준의 영웅에 쏟아지는 비난이 어쨌든 그 비난이 그들 자체가 이룬 업적까지 부정할 순 없다. 재경은 새로운 공간에서 우주를 보지는 못했지만 소녀들도 우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심어준 재경은 그 자체로도 이미 우주를 본 게 아닐까. 마지막 순간에 재경은 자신뿐만 아니라 소수자에 쏟아지는 시선과 부담도 함께 지고 심해로 사라졌다. 그녀의 뒤에 이어질 새로운 영웅들을 위하여.


꽤 오랜만에 한 권을 하루에 다 봤다. 소재가 흥미로우면서도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다는 사실이 몰입도를 높였다. 한 편 한 편의 의미가 깊어서 읽고 곱씹고를 반복했다. 씹으면 씹을수록 마음이 더 몽글몽글해진다. 김초엽 작가님의 이름을 똑똑히 외우게 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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