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다큐프라임 <민주주의> '4부 기업과 민주주의'를 보고
미국의 초기 민주주의는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영업자들에 의해서 발전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경제적으로 종속되어있지 않았고, 따라서 의사결정에 제약을 받지 않았다. '독립적 생산수단'이 강한 정치적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이는 생산 수단이 어떻게 정치적 영향력을 갖는지 보여준다.
자본주의 초기와 오늘날 경제를 비교해보면, 전체 인구 중 독립적 생산수단을 가진 자영업자들이 줄어들고 기업에 고용되어 일하는 노동자가 대폭 늘어났다.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이어갈 생산 수단을 가진 기업에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따라서 현대 사회 시민들의 대부분은 노동자이며, 기업은 직원들의 생계 수단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며 직원들에게 명령할 수 있다. 기업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기업이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고 보는 고전파 경제학에서는 직원은 단순히 노동을 제공하고 돈을 받는 교환 관계로 여긴다. 따라서 기업은 '갑'이 아니며 직원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노동자는 싫으면 그만두면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직원은 기업이라는 공동체의 일부이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쉽게 나갈 수 없다. 특히나 취업 경쟁이 심각한 현재 한국 같은 사회에서는 이러한 기업의 권력은 더욱더 강해진다.
정치체제의 종류를 간단하게 3가지로 유형화해보자.
1) 소수의 왕족, 귀족이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군주제
2) 특정 주류 계층이 권력을 가지는 공화제
3) 모든 구성원이 권력을 가진 민주제
인류의 정치 체제는 1번에서 3번으로 발전해왔다. 민주주의가 현재 최선의 정치 체제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한다. 따라서 정부는 국민 모두에 의해서 선출되고 통제된다.
현대의 기업 지배 구조는 법적으로 봤을 때 2번에 해당한다.
1980년대부터 주류 경제학자들에 의해 주창되어 온 ‘주주 자본주의’가 대표적이다. ‘주주 자본주의’는 주주 이익의 극대화, 의사결정권의 강화를 기업의 최우선 목표로 정의한다.
기업이라는 조직의 구성원은 단지 주주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외의 구성원들은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다. 단지 생산 수단의 한 요소이거나, 교환 관계일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하청업체와의 계약이나 비정규직이라는 형태를 통해 기업 조직 바깥으로 밀려남으로써 기본적인 노동 권리마저도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가 일상화되었다.
자본과 노동은 둘 다 기업의 생산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하지만 주주자본주의에서 자본을 제공하는 투자자는 기업의 ‘주인’으로 인정받지만, 노동을 제공하는 노동자는 ‘자원’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현대 사회의 기업 구조는 ‘공화제’ 수준이다. 자본을 가진 특정 구성원만 기업에 주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구성원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다거나, 흑인과 백인이 모두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흑인에게는 투표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심지어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 정도 수준까지도 도달하지 못했다.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는 재벌 기업들을 봤을 때 우리나라의 기업 지배 구조는 1번에 가깝다.
우리나라도 법적으로는 주주 자본주의의 프레임을 따르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공화제’ 수준의 민주주의도 지켜지지 않는다. 총수 일가는 겨우 몇 퍼센트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주주들이 대부분의 지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환 출자 같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오너 일가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직원, 주주, 각종 하청기업 등 수십 수백만 명의 국민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치적 주체'인 대기업의 권력이 소수에게 모두 집중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심지어 세습까지 한다. (세금도 제대로 안 내고!)
직원, 주주, 각종 하청기업 등 수십 수백만 명의 국민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치적 주체'인 대기업의 권력이 소수에게 모두 집중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갖춘 대한민국의 기업 구조는 아직 몇 백 년 전의 군주제에 머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경제민주화’를 해야 한다는 말이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다.
물론 1번이다 2번이다라고 평가한 것은 전체적인 경향일 뿐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기업이 있다. 그리고 그중에는 민주적인 구조를 위해 노력하는 기업들도 있다.
<민주주의> 4부 '기업과 민주주의'에서 예로 든 기업은 CALIBRE라는 기업이다. 이 기업은 종업원지주제도(Employee Stocck Ownership Plan, ESOP)를 도입했다.
ESOP이란 직원들에게 회사의 주식을 줘서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회사는 직원들의 기업의 소유권, 이익권을 나눠가지고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제도를 도입한 기업들은 직원들이 더 회사에 더 주인의식을 느끼고 회사의 이익에 대해 인센티브를 가지게 되면서 기업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에서는 약 10%의 기업이 도입하고 있다고 한다.
ESOP의 한계는 비상장기업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의 사례를 보면 꼭 비상장기업만 민주적 구조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독일은 일찍부터 주주뿐만 아니라 직원, 소비자들을 아우르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를 도입한 나라로 유명하다.
다큐에서는 독일의 공동 의사결정제도(Mitbestimmung)를 소개한다. 이 제도는 노동자로 구성된 평의회와 노동자에 의해서 선출된 감독 이사회를 만들도록 강제하고 있다.
물론 이 대안들에 대해서도 격렬한 찬반 논쟁이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기업에 민주주의를 적용하려는 시도의 전부도 아니다. 단순히 경제학적 논쟁에서부터 철학적 문제까지 수많은 문제들이 얽혀있다. EBS 다큐프라임을 보면서, 이 부분에 대한 공부를 더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글로 정리해서 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