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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범근 Aug 03. 2021

대화의 즐거움

뭐라도 전달하려고 노력하다가 '내 생각이 생겨나는' 그 순간

며칠 전. 직장인의 최대 낙인 점심 후 커피 타임이었다. 


웹툰... 여성향 로맨스.. 이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로맨스 소설에는 꼭 이런 특징이 있다'라는 얘기가 스쳐 갔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어떤 화학 작용 같은 게 일어났다. '나도 무언가 말을 해야겠다. 여성향 웹툰? 공식? 사람들이 욕하면서도 좋아하는 것? 내 생각은?' 이런 자극들이 1초가 안 되는 사이에 슈루룩 지나갔다.

그 자극이 내 뇌 속에 있는 서랍들을 열어젖혔다. 무언가를 꺼내왔다. 아직은 연결되어있지 않았지만, 일단 말을 시작했다.

"남성향 웹툰이나 영상도 그런 게 있는 거 같아요. 따져보면 유치한데 빠져들어서 보게 되는 거요."

'이렇게 말해야지'라고 의도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냥 입에서 나오면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다시 다음 할 말이 생각났다. 뇌 속에 흩어진 생각들이 자석처럼 붙어, 밖으로 딸려 나오는 느낌이다.

"네이버에 캐슬이라는 웹툰 있거든요. 남자들 좋아하는 거요. 근데 그런 거 보면 재밌는 게, 꼭 댓글 창에 '야, 얘랑 얘랑 붙으면 얘가 이기지 않냐' '얘는 10강인데 대등하게 붙는 거 보면 같은 급인 거냐?' '아니 지금 10강이 주무기가 없고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잖슴 그래서 그런 거임' 이런 말들이 엄청 많아요. 

그게 뭐냐면, 독자들이 얘랑 얘랑 싸우면 누가 이겨? 라는 질문을 엄청 좋아한다는 거죠."

같이 커피를 마시던 분들은 그렇구나, 신기하네, 라는 눈빛을 보내셨다. 다시 할 말이 또 하나 생각났다.

"왜냐면 저도 그러거든요. 그걸 느낀 적이 한 번 있었는데요. 강철부대라고 아세요? 요즘 인기 있는 예능인데. 저는 처음 보고 되게 유치하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근데 은근히 계속 보게 되더라고요. 그게 그 원초적인 질문을 자극하는 거예요. 야야, 해병대 수색대랑 특전사랑 싸우면 누가 이겨? 이런 거요. 그거 때문에 계속 보게 되더라고요."

"범근님은 그런 거 다 생각하면서 보나 봐. 되게 잘 아시네." "어휴 저것도 직업병이야. 콘텐츠 만들면 콘텐츠를 못 즐기잖아요. 저도 책 읽을 때..." 그리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로 흘러 흘러갔다.

잠시 후 카페를 나오면서 나는 알아차렸다. 오늘 대화를 나누면서 저 순간이 되게 즐거웠다고.

대화를 하다 보면 희열을 느낄 때가 있다.

어렴풋하고 뭉실뭉실한 조각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상대방과 질문을 주고받고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 와중에 조각들이 퍼즐처럼 예기치 않게 합쳐진다. 주르륵 뽑혀 나와 실체를 이룬 무언가로 표현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나도 놀란다. 그때의 미묘한 짜릿함.

나는 대화의 그런 순간을 특히 좋아한다.

카페에서 내가 내뱉은 말은 내 머릿속에 없었다. 뭘 볼 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본 것도 아니다.

주장: 남자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의 법칙 - 쟤랑 쟤랑 싸우면 누가 이기냐?

근거1. 웹툰 댓글. 근거2. 강철부대 봤던 경험.

이렇게 정리되어 머릿속에 들어있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대화 중에 생각들이 우연한 압력을 받았고, 내가 알 수 없는 작용을 거쳐, 자석처럼 차라락 달라붙어, 구조가 생겨났을 뿐이다.

글쓸 때도 비슷한 느낌이 올 때가 있다. 그 과정을 한번 거치면, 내 머릿속에는 훨씬 더 깔끔하고 튼튼한 생각 덩어리가 생긴다. 다음에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더 쉽게 써먹는다.

물론 근거도 빈약하고 대단한 지식도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나의 '관점'이 쌓이는 느낌. 뭐라도 하나 만들어 쌓는 그 느낌이 정말 좋다.

글과 말의 진짜 재미는

'남에게 내 생각을 전달하는 것'보다도,

'뭐라도 전달하려고 노력하다가 내 생각이 생겨나는 그 순간'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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