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전달하려고 노력하다가 '내 생각이 생겨나는' 그 순간
며칠 전. 직장인의 최대 낙인 점심 후 커피 타임이었다.
웹툰... 여성향 로맨스.. 이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로맨스 소설에는 꼭 이런 특징이 있다'라는 얘기가 스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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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어떤 화학 작용 같은 게 일어났다. '나도 무언가 말을 해야겠다. 여성향 웹툰? 공식? 사람들이 욕하면서도 좋아하는 것? 내 생각은?' 이런 자극들이 1초가 안 되는 사이에 슈루룩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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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극이 내 뇌 속에 있는 서랍들을 열어젖혔다. 무언가를 꺼내왔다. 아직은 연결되어있지 않았지만, 일단 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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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향 웹툰이나 영상도 그런 게 있는 거 같아요. 따져보면 유치한데 빠져들어서 보게 되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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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해야지'라고 의도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냥 입에서 나오면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다시 다음 할 말이 생각났다. 뇌 속에 흩어진 생각들이 자석처럼 붙어, 밖으로 딸려 나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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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 캐슬이라는 웹툰 있거든요. 남자들 좋아하는 거요. 근데 그런 거 보면 재밌는 게, 꼭 댓글 창에 '야, 얘랑 얘랑 붙으면 얘가 이기지 않냐' '얘는 10강인데 대등하게 붙는 거 보면 같은 급인 거냐?' '아니 지금 10강이 주무기가 없고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잖슴 그래서 그런 거임' 이런 말들이 엄청 많아요.
그게 뭐냐면, 독자들이 얘랑 얘랑 싸우면 누가 이겨? 라는 질문을 엄청 좋아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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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커피를 마시던 분들은 그렇구나, 신기하네, 라는 눈빛을 보내셨다. 다시 할 말이 또 하나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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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저도 그러거든요. 그걸 느낀 적이 한 번 있었는데요. 강철부대라고 아세요? 요즘 인기 있는 예능인데. 저는 처음 보고 되게 유치하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근데 은근히 계속 보게 되더라고요. 그게 그 원초적인 질문을 자극하는 거예요. 야야, 해병대 수색대랑 특전사랑 싸우면 누가 이겨? 이런 거요. 그거 때문에 계속 보게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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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근님은 그런 거 다 생각하면서 보나 봐. 되게 잘 아시네." "어휴 저것도 직업병이야. 콘텐츠 만들면 콘텐츠를 못 즐기잖아요. 저도 책 읽을 때..." 그리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로 흘러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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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카페를 나오면서 나는 알아차렸다. 오늘 대화를 나누면서 저 순간이 되게 즐거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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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하다 보면 희열을 느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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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하고 뭉실뭉실한 조각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상대방과 질문을 주고받고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 와중에 조각들이 퍼즐처럼 예기치 않게 합쳐진다. 주르륵 뽑혀 나와 실체를 이룬 무언가로 표현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나도 놀란다. 그때의 미묘한 짜릿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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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화의 그런 순간을 특히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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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내가 내뱉은 말은 내 머릿속에 없었다. 뭘 볼 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본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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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남자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의 법칙 - 쟤랑 쟤랑 싸우면 누가 이기냐?
근거1. 웹툰 댓글. 근거2. 강철부대 봤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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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리되어 머릿속에 들어있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대화 중에 생각들이 우연한 압력을 받았고, 내가 알 수 없는 작용을 거쳐, 자석처럼 차라락 달라붙어, 구조가 생겨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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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쓸 때도 비슷한 느낌이 올 때가 있다. 그 과정을 한번 거치면, 내 머릿속에는 훨씬 더 깔끔하고 튼튼한 생각 덩어리가 생긴다. 다음에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더 쉽게 써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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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근거도 빈약하고 대단한 지식도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나의 '관점'이 쌓이는 느낌. 뭐라도 하나 만들어 쌓는 그 느낌이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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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말의 진짜 재미는
'남에게 내 생각을 전달하는 것'보다도,
'뭐라도 전달하려고 노력하다가 내 생각이 생겨나는 그 순간'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