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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남자 May 31. 2020

장마 그리고 수제비

장마가 오면 엄마는 수제비를 해주셨다.

6월 말 장마시즌이 오면 거짓말처럼 맑은 하늘에 비구름이 끼며 비가 억수같이 퍼붓곤 했다. 우산을 깜빡하고 가지고 오지 않은 날이면 엄마를 기다리기보다는 비를 맞고 집으로 가곤 했다. 교실에 있는 신문지나 하굣길 주변에 떨어져 있는 노란색 골판지 박스를 펴서 머리에 쓰고 집으로 뛰어갔다.


급한 성격 때문인 것도 있었지만 굵은 빗방물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 좋았다. 고인물을 찰방찰방 밟으면서 집에 가는 길이 초등학생 어린아이에게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해 주었던 것 같다. 비를 맞고 걷다 뛰다 보면 어느새 온몸이 젖어 머리카락과 옷가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와 손을 닦으면서 방에 들어서려고 하면 옷부터 먼저 벗으라는 말과 함께 등짝을 한 대 맞곤 했다. 대충 옷을 벗고 흙탕물로 더러워진 곳을 다시 씻고 나오면 엄마는 수제비를 끓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곰이 그려진 하얀 밀가루 봉지를 찬장에서 꺼내 주황색 플라스틱 바가지에 부었다.


엄마는 밀가루에 물을 섞는 것인지 물에 밀가루가 스며들게 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빠른 속도로 능숙하게 반죽을 했다. 밀가루와 물의 비율도 어찌 그렇게 잘 맞추었는지 너무 질지도 또 건조해서 갈라지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새하얗고 각진 굵은소금을 반죽 위에 솔솔 뿌리며 눈대중으로 간을 맞추었다.


왼손으로는 바가지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위, 아래, 좌, 우로 반죽을 했다.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이 이러할까? 반죽이 금새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도 오묘하기도 했다. 반죽이 완성되면 집에 있던 비닐봉지에 반죽을 넣었다. 호박과 감자를 찬물에 씻어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칼자국이 새겨진 노란 나무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아버지가 전날 숫돌로 갈아놓은 식칼로 탁 탁 탁 소리를 내며 가지런하게 먹기 좋게 야채를 썰기 시작했다. 그다음은 마늘이다. 동생과 나는 조그만 절구통과 절구 방망이를 가지고 서로 마늘을 찧겠다고 옥신각신하며 싸웠다. 2살 많은 형인 덕분에 절구통과 절구 방망이는 내 차지였다.


노란 냄비에 마른 멸치와 다시마 한 조각을 넣고 육수를 끓였다. 물이 보글보글 끓고 나면 비닐에 있던 밀가루 반죽을 얇게 펴서 엄지손가락으로 먹기 좋은 크기만큼 밀어내듯 떼어 끝부분부터 차례차례 냄비에 넣었다. 엄마의 손가락이 빨라지면 빨라 질수록 반죽의 양도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그렇게 밀가루 반죽은 수제비가 되고 있었다.


썰어놓은 호박과 감자를 넣고 팔팔 끓이다가 마늘과 파를 넣었다. 새우젓으로 간을 하고 마지막으로 비장의 한 수. 조미료 한 숟가락을 넣었다. 보글보글 거품이 일면 국자로 걷어내어 버리다 보면 입에 침이 고일만큼 맛있는 멸치와 다시마 육수의 향이 온 집안을 휘젓고 다녔다.

꿀꺽꿀꺽 고이는 침을 넘기며 쏟아지는 비를 보다 보면 대접에 국자로 수제비를 한 가득 퍼서 밥상에 올려놓아진 수제비 한 그릇을 볼 수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빨갛고 곱게 빠아진 고춧가루로 만든 하얀 속살을 드러낸 배추김치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최고의 짝꿍이었다.


뜨거운 수제비를 호호 불며 한 숟가락을 떠서 오물오물 씹으면 부드러운 밀가루의 식감과 수제비 국물에서 느껴지는 짭조름함이 입안을 감쌌다. 그냥 맛있었다. 어떻게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을까? 비를 맞아 조금은 찬기운이 느껴지는 날.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며 음미하는 수제비의 맛. 지금은 나이가 차고 입맛이 달라졌으니 그 맛을 똑같이 느끼지 못할 테지만 그때 수제비의 맛은 오래오래 기억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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