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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남자 Jun 04. 2020

배터리가 닳았다.

20살이 지나 40살의 길목에 있었던 38살 어느 날 배터리가 닳았다.

"요즘 힘들어. "


"그래? 그렇구나. 그래도 힘내! 오늘도 파이팅 하자!"


"파이팅하기 싫어. 힘들어."


"..................."



몇 년 전이었다. 좋아하던 운동이 하기가 싫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마시던 커피 한 잔의 여유도 느껴지지 않았고 고개를 들어 올려 감탄했던 맑은 하늘이 그저 파랗다는 생각 외에는 어떠한 감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일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딱히 몸이 피곤한 것 같지는 않은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이러한 징후들은 동일하게 나타났다. 딱히 외부로 드러나는 통증은 없었다. 이유를 몰랐다. 그런데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들이 있었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지?

나는 왜 이 정도밖에 못하지? 그때 내가 그랬었다면 더 잘 되어있지 않았을까?

그때 왜 그렇게 했지? 너무 현실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나?

나는 지금 잘 가고 있나?


'지금 이렇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옳게 사는 길인가?'라는 생각들이 홍수처럼 빠른 속도로 쏟아져 머릿속을 소용돌이치듯 맴돌았다. 출근하고 퇴근하며 직장에서도 가족들과 있는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정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선배님! 요즘 몸에 힘이 없네. 왜 이렇게 의욕이 없지요? 그저 다 하기가 싫어요. 현타 왔나? 좀 이상한데요"


"아...... 네가 몇 살이지?"


"올해 38살이요."


(씩 웃으며) "아! 배터리 닳았네. 그럴 때 있어. 나도 그랬는데 조금 있으면 괜찮아지더라."




배터리가 닳았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뿐 시기와 형태는 다르지만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창 시절. 미래에 대한 기대와 걱정, 설렘 등으로 보냈던 시간처럼 성인이 되어 과거의 나를 돌아보며 앞으로의 길에 대한 해답을 탐구하는 시간이 도래하였음을 나타내는 신호였음을 자각하였을 때 얼마나 오묘하였는지 멍하니 서서 그 시간을 음미하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누군가는 해답을 찾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우연하게 스쳐 지나가는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쉽게 해답을 찾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누군가는 지금도 고민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신이 주신 망각이라는 축복받은 능력 앞에 자연스럽게 훌훌 털어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원인을 알았으니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정답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먼저 아무 생각 없이 다니려고 노력했다. 잠을 자고 그저 출근하고 주어진 일을 했다. 그리고 퇴근을 해서 가족과의 시간을 즐겼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수첩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적어나갔다.


1. 여행

2. 가족과 맛있는 음식을 먹기

3. 감자칩 먹으면서 만화책 보기

4. 친한 친구들 만나 소주 한 잔 하기

5. 혼자 별다방에 가서 책 보면서 커피 마시기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동그라미를 치며 실행을 하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고 이 세상은 내가 해야 할 그리고 해봐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다고 말이다.


40살이 된 지금 언젠가 그때처럼 다시 인생의 배터리가 방전될 날이 오겠지만 한번 경험해봤기에 미리미리 충전하는 습관을 들이려고 한다. 비록 그 다짐이 지켜질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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