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자전거 가게에 가는 일이 잦아졌다. 누군가 타다가 고이 모셔만 놓은 첼로 스칼리티 105 중고로 65만 원에 구입해서 거의 매일같이 타기를 햇수로 3년 차가 되자, 기름칠을 해도 소리가 자주 나는 것 같고, 자주 삐걱거린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2주 전에는 사진을 찍다가 자빠지면서 체인이 풀렸는데, 체인을 제대로 걸어도 바퀴가 헛도는 것이었다. 자전거 가게에 가니, 체인이 감기는 프리휠이 휘어졌다고 하면서 지금은 임시로 펴 놔서 당장 탈 수는 있지만 한번 더 넘어지면 쓸 수가 없어서 아예 교체해야 한다고 했다. 자전거 방 아저씨의 한 번 더 넘어지면 못쓴다는 멘트가 뭐랄까. 이 아이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마음 한구석이 슬퍼졌다. 사이클을 처음 배우며 만난 아이인 탓에 험하게 넘어진 적도 많고, 제대로 관리할 줄도 몰라서 막 쓰기만 하고 떠나보내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사이클을 시작하게 된 것은 사년 전 여름이었다. 6년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남들은 안정적이라고 부르는 권위와 관습이 우선시되는 직장으로 옮기면서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농촌 근교의 신도시 비슷한 곳에 살게 된 지 7개월 만이었다. 직장동료들은 주말이면 가족이 있는, 원래 거처가 잇던 지역으로 내려갔지만, 나는 사실 갈 곳이 없었다. 집에서 독립한 지 13년이 넘는 동안 정서적으로, 생활적으로도 완전히 독립해 버린 나는 머무르는 곳이 고향이어야 했다. 특히 그해 봄은 전치 8주의 교통사고로 인해 꼼짝없이 텅 빈 신도시의 작은 아파트에 갇혀 버리면서 무기력증, 우울증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찾아왔고,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꿈을 좇아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일하고 공부하는 것이 지난날의 전부였던 그 당시에 한적하게 취미 붙일만한 것들이 뭘까 생각을 해 보았을 때, 책을 좋아는 해도 오래 끈기 있게 읽는 것보다는 속독과 편중된 스타일을 즐겼고, 몇 개월 동안 꽤 재미 붙이면서 배우던 펜화를 다시 배울까도 생각해봤지만, 조금 더 트인 곳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라이딩 모임을 발견하고 이거다 싶었는데 사이클을 배워본 적은 없지만 생활 자전거라면 유일하게 배우고 몸에 붙인 것이었다. 10년을 넘게 살았던 진주는 폭이 넓고 한적한 남강이 흐르던 곳이었고, 그 강을 따라 자전거 도로가 도시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서 자전거는 공부에, 일에, 아르바이트에 숨 가쁘던 20대를 함께 보낸 이동수단이자, 유일하게 컨트롤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들과 마주해야 하는 불편함이나 낯섦 같은 건 생각지도 않고 그 모임에 덜컥 나갔다.
매주 금요일 밤이면, 작은 자전거 가게에 모여서 대구 시내 도로를 1시간 정도 달려서 24시간 카페에 가서 빙수 한 그릇을 먹고 오는 모임이었다. 자전거 복 같은 건 아예 모르고, 트레이닝 복을 입고 가선 가게에서 빌려준 하이브리드 자전거 위에 올랐다. 적게는 2~3명, 많은날은 7~8명의 모르는 연령대가 다양한 사람들과,
엉덩이에는 불이 났지만, 하체 힘이 제법 좋아서 남자들 사이에서도 지치지 않고 속도감을 즐겼다. 그렇게 나가기를 2~3번을 하자,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는 오빠는 로드 사이클을 배워보면 어떻겠냐고 하면서 사지 않아도 되니 편하게 타보라며, 중고 매물로 잠자고 있던 지금의 이 아이를 내밀었다. 매주 금요일 밤이면 꼬박꼬박, 대구시내까지 1시간을 차를 몰고 오던 나는 아마도 걸려든(?) 먹잇감이었을지도. 무엇보다 사이클을 배우게 해서 나를 그 꺼져가던 그 모임의 여성 멤버로 굳건히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그렇게 첼로 스칼리티 105는 우리 집까지 도착했고, 그 전략은 안장 위에 올라가는 순간 하이브리드 같은, 그 아래급으로는 내려갈 수 없는 그 맛(!)을 봐 버렸고 나는 돌아갈 수 없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초여름의 기운이 올라오는 5월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