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안티푸라민

by 포도송이

어렸을 때, 엄마한테 유달리 많이 맞고 자랐는데(그 시절에는 다들 그랬다) 우리 엄마는 기술이 좋아서 때릴 때도 보이지 않는 곳을 집중적으로 때리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럴 땐 안티푸라민을 가지고 다니면서 교복 속 허벅지나 팔두덩이의 시퍼렇게 맺힌 멍자국에 바르곤 했는데 덕분에 샴푸 향기가 아니라 파스 냄새를 풍기는 여고생이 되었다.


안티푸라민은 멘소래담과 비슷하지만, 바르는 순간 그 싸한 냄새와 소염효과가 남다르게 강렬하다. 바를 때마다 고통스럽지만, 하룻밤 자고 나면 다른 진통제나 소염제보다 확실히 빠르게 그 붓기나 멍이 가라앉는다. 엄마는 그렇게 실컷 때려놓고선, 안티푸라민을 챙겨줄 건 뭐람. 거기다 옵션으로 안티푸라민의 유래와 개발자인 유일한 박사에 대해 설명해 주며 콧물 날 땐 코에, 배 아플 땐 배에 바르던 시절의 근현대사 이야기까지 곁들였다. 엄마는 정말로 대단한 교육자 성향의 보호자였다. 라이딩이 하다가 자빠져서 안티푸라민을 찾는 날이면 어린날의 엄마에 대한 향수가 올라오곤 했다.


병원 한번 간 적 없이 건강하게 자랐지만 19살-독립한 이후로는 위장이 자주 아팠다. 사실 체질적으로 장기기관이 약했고 타고나기를 저질체력으로 태어났지만 어릴 적 스스로가 건강하다고 느꼈던 건, 순전히 조미료 하나도 신경 쓰며 키운 엄마 덕분이었다. 엄마 밖의 세상에 놓인 나는 혼자 사는 동안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이나, 배달음식 같은 것들은 위장을 자꾸만 위협했고, 커피와 밀가루는 끊어야 하는 것 중 하나였다.


타들어갈 듯한 태양 아래서 카페인은 라이딩 전 몸이 깨지 않았을 때, 격한 라이딩으로 체력이 떨어져 갈 때, 꼭 필요한 것이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나, 하루에 두 잔 이상을 마시는 날에는 속병이 나곤 했다. 또 나는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면 식빵을 사서 한 통을 우걱우걱 뜯어먹고 하는 지랄 맞은 취미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따끔거리는 속에는 라이딩이 만병통치약이었다. 한 시간쯤 자전거를 타고나면, 따끔거리는 증상들이 좀 가라앉고는 했다. 그럼 또 괜찮아졌잖아? 하면서, 편의점으로 곧장 가서 과자니 초콜릿을 잔뜩 사서 먹고는 다시 새로운 통증을 맞이하는 미련함을 반복했다. 당장 죽을병이 아니라면, 세상의 달콤한 것들은 그래도 먹고살고 싶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나를 위로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으므로.


또 다르게 속이 따끔 거리는 날들도 있었다. 아니 이런 날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아침이면, 지난밤 내가 속한 세상과 주변으로부터 얻은 생채기들을 가득 담고 안장 위에 몸을 실었다. 맞바람이 뺨을 긁으면, 가슴속에 있던 감정들이 터져 나왔다. 모욕인 줄 모르고 참아야 했던 어떤 순간들과, 좋은 사람으로 위장하고 건네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으로부터 얻은 상처들. 자전거 위에서, 상처들은 조금 더 날카롭게 명확해지며 투명한 나를 찔렀지만, 바람 속에서 흩어졌다. 신나게 달리다가, 울컥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속이 시원하지 않으면 엉엉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 (그럴 때 고글은 익명성을 보호하는 아주 중요한 아이템이다) 안티푸라민을 발랐을 때, 그 싸한 통증 후 옅어진 멍자국처럼, 가시 같은 상처와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로부터 조금씩 회복되어 간다.


엊그제 TV에서 ‘고기와 밀가루를 멀리하면 오래 살 수 있지만, 그렇다면 딱히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문구를 보았다. 커피와 밀가루도 마찬가지고, 세상으로부터 부딪히는 상처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나는 결국 세상 속에서 상처 받으면도 또 맞닥뜨리면서 다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치는 날이면 엄마한테 가서 안티푸라민 발라달라고 하면 되겠지.


주말 라이딩 전날 밤에는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케냐 원두로 내린 아이스커피를 텀블러에 담아 냉동실에 꽁꽁 얼려둔다. 자전거길에 예쁜 카페들이 많이 생기긴 했지만 꼭 그곳이 쉬어야 할 타이밍과 머무르고 싶은 장소는 아니었으므로. 내가 발견한 한적한 풍경과 여유가 있는 곳에서 쉬고 싶기 때문에, 또 그 풍경에 맞는 풍미 있는 커피를 즐기고 싶으므로. 좋아하는 초코맛 그래놀라 바와 젤리도 사둔다. 이거 먹고 나면 또 아플 건 아는데, 라이딩하면서 치유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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