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을의 위령비를 '오늘' 기억하다

4월 16일을 기억하며

by 김송은

일곱 살 무렵 부모님은 완도군 소안면의 진산교회로 부임하셨다. 어린 내게 섬으로 가게 된 배경이나 의미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아담한 마당이 딸린 이전보다는 넓은 집, 소담한 빨간 벽돌의 교회 건물, 그리고 탁 트인 시골 풍경과 시원한 공기는 비좁은 도심의 것보다 모두 한참 좋았다.


교회로 들어서는 바로 앞 길목에 꽤 커다란 비석 하나가 서 있었다. 둘레에는 튼튼한 철제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그 안쪽 응달진 곳에는 낮은 풀들이 자라나 있었다.


아빠가 위령비라 알려주었다. 1980년대 어느 해, 이 마을 사람들이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서른 명 정도가 돌아오지 못했다고 했다.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라고, 비석에 새겨진 한자를 읽어주셨다.


내력을 알고 나니 어딘지 모를 엄숙한 분위기가 감도는 듯도 하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비석은 그저 스쳐 지나는 풍경 중 일부가 됐다. 자전거를 타고, 과자를 먹고, 차로 오가는 그 길목 어귀에 있는 듯 없는 듯 서 있었다. 그럼에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기억 나는걸 보면, 위령비 본연의 역할은 충분했던 셈이다. 떠난 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는 일 말이다.


작은 마을에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함께 어망을 정리하고, 조개를 까고, 먹을 것을 나누던 이들은 분명 비극에 함께 울고 슬퍼했을 거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마음들이 모여 위령비를 세운 거다. 소안도는 일제강점기시대 항일 운동을 했던 역사가 흐르는 만큼 공동체 정신이 살아있던 곳이다. 마을 전체가 하나의 단단한 공동체였던 때의 이야기다.


세월호의 비극 앞에서, 우리 사회는 온전히 함께 슬퍼하지 못했다. 유가족을 모독하는 이들이 나타났고 누군가는 음모라했으며 또 누군가는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정치적 구호와 소란스러운 뉴스가 연일 쏟아졌지만, 그것이 진정한 ‘함께 슬퍼함’에 닿았다고 느끼기는 어려웠다.


아마도 우리가 ‘국가 공동체’라는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당연해진 세상. "알빠노(알 바 아니다)"라는 유행어는 네 일과 내 일을 철저히 구분하자는 우리 시대의 한 흐름을 대표하는 말처럼 들린다.


오늘 올리려 했던 예약 글이 하나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글 하나였지만, 이런 날에까지 다른 이야기로 떠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앞섰다. 결국 글을 내렸다. 오늘은 조용히 있기로 했다. 무슨 말을 보탠다는 것도 어렵게 느껴졌다.


그러나 하루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장면을 붙잡았다. 이끼가 끼고 곰팡이가 슬어있던 그 위령비의 모습이다. 비석을 세우고 함께 애도하는 일은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알던 그때나 가능했던 일일까.


고집을 부려보고 싶다. 우리는 여전히 타인의 고통에 함께 슬퍼할 수 있다고, 우리의 시대가 이토록 차갑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런 마음을 담아 그날의 슬픔과, 아직도 4월이 아픈 이들을 기억한다.




월, 화,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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