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가끔 문득

오랜 친구와의 반가운 만남

우리는 서서히 바래져가고 있다. 그러나,...

by bupoom

고등학교 친구가 거의 5년 만에 한국에 방문했기에 오늘 잠깐 만났는데, 마치 지난달에 본 사람처럼 익숙한 느낌이라 참 반갑고 소중했다. 서로의 소식들을 다 전하기에도 모자란 점심시간을 지나, 이 친구가 나를 너무나 정확히도 기억하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스쳐 지나가듯 툭툭 이야기했던 나의 말들을 인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속에 숨어있던 미처 나도 몰랐던 내 속내를 같이 해설해 주는 친구. 나를 잘 이해하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먼바다 건너 육지 한 켠에 있다는 것이 재미있으면서 꽤 위안되었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볼드모트가 자신의 영혼을 호크룩스로 이리저리 쪼개어 이곳저곳에 분산시키고 숨겨뒀을 때의 그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에 수줍어서 세상 밖에 내놓지 않았던 글들을 이 친구에겐 간혹 공유하곤 했는데, 이처럼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시절의 모습들에 부끄러움이 아닌 다른 이름표가 붙여질 수 있는 것은, 일단 어찌 되었든 우리가 힘 있게 방점을 찍고 그다음 챕터로 나아갔기 때문으로 오늘 비로소 이해했다. 못내 이룬 아쉬움은 뒤로 하고 챙길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차근히 줄을 엮어 현재를 이루었다. 물론 앞으로 더 챙겨야 할 것들이 아직 숙제처럼 남아서 우리를 신경 쓰이게 하지만... 오늘 우리의 대화에서 묻어나는 직장인 특유 약간의 애환과 더불어 이제 막 쌓이는 듯한 약간의 안정감이, 우리 그간 꽤나 치열했구나 싶었다. 이윽고 친구가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순간 나는 설렘을 안고 “그래서 누가 먼저 만나자고 한 거야?”라고 짓궂게 이어 물었다. 지금의 나라면 그냥 묵묵히 듣고만 말았을 것인데, 그때만큼은 꼭 둘 다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천진난만해서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친구가 연인을 다정하고 믿음직스럽고 순수한 면도 있는 사람이라고 묘사하길래, ”너 나랑 이상형이 같나 봐. 내 남편도 딱 그래. 그래서 내가 결혼했잖아! “ 정말 오랜만에 편하게 웃었다. 친구의 앞날에 행운과 행복이 가득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학창 시절엔 하지 못할 이야기도 오래 꺼내놓았다. 친구가 한국에 갑자기 들른 이유는 이제 곧 떠나실 수도 있는 외할머니를 진득하고 친밀하게 마주하여 뵙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가 어제 마주했던 할머니의 탁해진 눈동자를 보고서 든 ‘늙는다는 것’에 대한 심상을 깊게 나누기도 했다. 우리는 서서히 바래져가고 있다. 일상의 풍랑에 마모되기도 하고, 지친 감정에 생기와 색채를 점점 잃기도 한다. 여러모로 버겁다 느낄 때 쯔음, 이렇게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친구 입을 통해 설명 듣기도 하고, 잊었던 나날의 내 모습을 불쑥 마주하기도 한다. 우리는 정말 서서히 바래져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주 운 좋게 자기 자신을 잠시 되찾는 순간도 더러 있다. 마치 오늘처럼. 오늘 우리는 만나기를 정말 잘했다. 멀고도 가까운 곁에서 그간 나를 견디고, 이렇게 나를 길러내 주어 정말 고맙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손목시계와 손수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