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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리 Mar 20. 2019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잔병치레도 없이 무척 건강했던 20대와는 달리, 최근 몇 년 동안은 크게 아픈 적이 많았다.

운동 한번 했다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던 적도 있었고, 목발을 짚으며 대중교통으로 출근할 때 겪었던 일로 몸이 불편했을 때의 좌절감을 느껴보기도 했고 허리가 심하게 아파서 다리가 저린데 주중이면 겨우 회사를 다니고 주말이면 병원이 아니면 집에서 누워도 일어나도 불편해서 아무것도 못한 시기도 있었다.

또 하늘이 무너지면서 앞이 깜깜 해지며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이번 생을 다시 리셋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많았다.

건강의 소중함을 모르다가 건강 때문에 주저하는 때가 늘어나자 더 크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심하게 아팠을 때나 오랫동안 아팠을 땐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무기력해질 수 있는지 깨달았었고, 삶이 한순간의 모래처럼 흐트러져 허무하게 다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지 않은 날에는 아파서 못했던 만큼 대신해 더 뛰어야 했는데, 그럼 만회하려고 했던 만큼 또다시 아프기도 했다.

마음은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조금만 하면 아파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게 속상했다.

물론, 몸이 나약해지니 마음까지 나약해져 작은 일도 크게 와 닿았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좋아하는 여행을 자주 포기하게 되는 일이 많아졌고 지난 몇 년간 크게 이룬 게 없다고 생각하자 미래가 불안해지기도 했다.

뒤돌아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는 게 아쉽고 후회가 되기도 했다.


내 마음이 스스로 채워지지 않으니, 마음이 방황할 때가 많았다.

제2의 사춘기가 온 것 같았다.

책도 많이 읽으며 해답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TV는 잘 보지 않는 편인데, 드라마 예고를 보다가 25세 김혜자가 시간을 되돌리려다가 갑자기 늙어버리는 줄거리가 흥미로워 1화 첫 방송부터 보게 되었다.

영화나 드라마의 시간여행 소재를 좋아하는데 이번엔 과거로 돌아가버리는 것도, 미래로 돌아가버리는 것이 아닌 현재인데 내 몸만 늙어버린다는 내용이 신선했다.

오랜만에 배우 김혜자의 연기를 보는 것도 너무 좋았다.

마음은 25세인데 몸이 늙어버려 겪는 에피소드가 슬프기도 웃기기도 웃프기도 하였고 감정 이입하여

"내가 만약... 갑자기 늙어버린다면..?" 하고 생각해 본 적이 많았다.

회를 거듭하면서 줄거리가 재미는 있는데 머리에 물음표를 남기는 장면들이 많았다.

너무나 현실적이기도 했고, 현실적이지 않기도 했다.



25세 젊은 김혜자의 시간여행인 줄 알았던 드라마 소재가 사실은 알츠하이머를 겪는 늙은 김혜자가 주인공인 걸 알았을 때는 정말 충격 반전이었다. 알츠하이머 주제를 다룬 드라마에서 주로 알츠하이머를 겪는 대상을 3인칭의 시점에서 바라봤었다면, 1인칭의 시점으로 전환되었을 때는 드라마 작가가 천재인가 싶었다.


그동안 머리에 물음표를 남기는 많은 장면들이

"아.. 그래서.. 그랬구나"

로 바뀌었고 더 생각할 거리가 많아졌다.

어제로 끝난 최종회에서 이렇게 내 마음을 채우고 여운이 많이 남기는 드라마 최종화는 없었던 것 같다.


오늘을 살아가세요.

과거와 미래가 어쨌든, 주어진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난 쉽지 않다.

하지만 내 인생을 후회하게 보낼 수도 가슴 벅차게 보낼 수 있게 결정하는 건 나밖에 없기에,

지금보다 조금 더 눈이 부시게 매일 시작되는 오늘 하루를 살아가 봐야겠다.


인생을 리셋할 생각하지 말고 지금 상황에서 조금 더 노력해 볼 수 있는 건 더 최선을 다 해봐야겠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때론 불행하고 때론 행복할 테니, 후에 늙어버린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좋은 기억이 많아질 수 있게..

나쁜 기억은 잊어버리고 좋은 기억만 남으면 되지.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 온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큼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 드라마 '눈이 부시게' 마지막 대사


#필사 #버리 #눈이 부시게 #김혜자 #한지민 #눈이 퉁퉁 #오늘을 살아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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