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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굽기 May 20. 2018

주둥이, 주둥이, 주둥이

말 좀 예쁘게 해보겠다고 덤비는 이야기

말을 곱게 하고 사는 편은 아니다. 이게 하루 이틀 그렇게 산 게 아니라 정말 말뽄새가 태어나자마자 입에 요렇게 붙어 버린 거라 내가 개인 차원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애초에 태어나기를 품위하고는 담 쌓은 채로 태어난 거라. 가정교육에 힘쓴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고운 말 하는 사람은 못 되었다. 워낙에 말투 자체가 으르렁거리는 리듬을 품고 있는데다가 단어 선택 자체가 툭툭 주사위 던져서 아무거나 고르듯 해버린다. 초면이지만 멱살 한번 교환해 보실까요 하는 수준이랄까. 하필 목소리도 또 오질나게 크다. 이번 생은 꼼짝없이 시끄럽게 생겼다.     


내 조동아리는 이제 막 자음과 모음을 구분하기 시작하던 시절부터 품위없는 브루스를 추었다. 유모차 타고 다니던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난 부모님이 바쁘신 탓에 모계 친척들 손을 많이 탔는데, 하여튼 그날도 여느 때처럼 이모가 나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셨더랬다. 비록 내가 지금은 투실투실하게 징그럽지만 그때는 토실토실하게 귀여웠어서 다른 아기들 만큼은 시선을 끌었단다. 그 날은 지나가던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유모차에 누워 있는 나를 보고 어디 가냐고 웃으면서 물어보셨다. 이 정신나간 세살배기는 세상 지루하고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어보인 뒤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 돈 벌러 가요 돈 벌러! (당연한 이야기지만 돈 벌러 가는 거 아니었다. 난 무슨 뜻인지는 알고 지껄였을까?)     


세살 때부터 이 모양이었으니 자라서는 오죽했을까. 세 살 때부터 싹바가지 없게 툭툭 던져 대던 지껄임은 질풍노도의 어쩌구를 만나 폭발적으로 재수없어졌다.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 정 떨어지게 만드는 주옥같은 이야기들이었던지라 사례를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계속해서 머릿속에 왱왱거리는 말이 한 마디 있다.     

너는 사람 참 할 말 없게 만든다.     


누가 봐도 선의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내게로 나풀거리며 날아오는 족족 툭툭 막말을 쏘아 떨구어 버렸던 때가 있다. 아마 내가 살면서 가장 글러먹은 놈이던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살다 보니 이제는 그 때와 같은 사람으로는 못 돌아가겠다 싶다. 사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정작 저 말을 들었던 순간에는 뭐 어쩌라고, 하면서 재수없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러다가 이내 까먹어 버렸지만, 마찬가지로 언제인지 기억 안 나는 어느 순간에 그 말이 다시 머릿속을 발 구르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마 그 순간이 그 말의 의미에 대해 깨달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추측하기로는.     


말이야 무슨 환골탈태한 것처럼 했다지만, 여전히 예쁜 말 하는 사람 축에 끼지는 못한다. 내 입에서 단어가 삐죽이며 튀어나오는 순간들은 여전히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다만 이제 와서야 깨달은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아마 그 점은 다를 것이라 믿는다. 대화는 사람이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이야기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 존재한다. 당신에게 존재한다. 대화는 동시에 존재하는 이야기 속에서 일어난다. 말하고 또 듣는다.   

  

사실 그렇게 어렵지도 않은 이야기를 추상적으로 풀어 쓴 것에 불과하다. 그냥 내 눈 앞에 있는 사람도 사람이라는 거다. 아이고 아저씨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나는 몰랐다.     


사람이 할 말이 없게 만든다는 이야기는 어떤 의미일까? 겉모습을 딱 보자면, 당신이랑 더 말 못하겠단 소리다. 당신에게 나올 말이 더 없다는 이야기이다. 말문을 막았다는 이야기이다. 상대방이 나쁜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고(헛소리 하는 사람에게까지 상호 대화를 운운할 만큼 내가 성격 좋은 사람은 아니다), 좋은 의지로 뭣 좀 이야기하겠다는데 그에 대한 내 대답이 그 이후의 말문을 막았다는 건, 결국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나 다름이 없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 좀 하겠다고(심지어 필요성도 없는) 상대방 기분이야 어쨌든 잡치게 한단 소리다. 심지어 그 이야기를 당시 대화를 지켜보던 제 3자에게서 들었으니 뭐 말할 거야 더 있으려고. 결국 존중이라는 프로그램이 안 돌아간 거다. 상대방도 나처럼 기분이란 걸 가진 사람인 건데.     


아마 이후 이런 지점에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말 뿐만이 아니라 생각의 방식이나 관계의 방식에 있어서도 그렇다. 사람은 모두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모두 이야기가 있다. 대화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며 상대방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논쟁이 불거지는 양상은 정말 다양하다. 하지만 그중에서 굉장히 자주, 패턴적으로 나타나는 갈등적 담화가 있는데, 바로 이성과 감성에 대한 논쟁이다. 이러한 문제들의 대다수에서, 막말로 하자면 나는 감성파다. 극단적인지 극단적이 아닌지는 스스로 판단할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하여튼 문제 당사자 혹은 피해자측에 감정을 이입하는 편이다. 그래서 나에게 대부분의 사회 문제들은 참, 커 보인다. 여러 여성 문제나 범죄 문제나 노동 문제나 뭐 그런 것들. 난 감정을 이입한다고는 해도 객관적이려고 노력은 하는 편이긴 한데, 모르겠다. 전혀 객관적이고 이성적이 아니라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감성충이니 네가족충이니 욕을 간혹 먹는다. 


감성충이라는 말은 참, 뭐랄까. 묘하다. 그냥 가끔 묻고 싶어질 때가 있다. 전 인류 통틀어 감정이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고. 특정인이 특정 상황, 특정 문제를 마주하고 느낀 감정은 이성으로는 알 수 없다. 계량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건 어떤 거고 저런 건 저런 거고. 제3자가 어떤 일에는 어떤 만큼 슬퍼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당황해야 하는지, 이건 어느 정도로 큰 문제인지 계량하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거다. 상대방의 그러한 감정을 벌레 보듯 멸시하는 특정 접미사가 붙은 경우에는 더하다. 많은 경우, 이야기를 듣고 그 감정에 공감해주는 것이 문제를 떨어내는 데 더 큰 도움이 된다. 그 공감에서 해결책에 대한 논의도 진행되기 시작한다고 믿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눈 앞에, 혹은 저 멀리 있는 사람이 사람이라서 그렇다.   

  

논리에는 맞을 수 있다. 나도 그랬다. 내가 툭툭 던진 그 예의 없는 말들이 논리적으로 틀렸다고는 지금도 생각지 않는다. 나는 사실만 말했으니까. 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존중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완벽히 바라보지는 않았을 거다. 듣는 척을 했지 듣지는 않았을 거다.     

내게도, 당신에게도, 그에게도, 우리에겐 모두 이야기가 있다.

물론 감정만으로 모든 사건에 접근하고 모든 대화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의 순간에는 이성과 논리와 객관성이 끊임없이 필요하다. 그러나 감성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자주 잊고 산다. 뭐라 하면 좋을까. 그래, 비정한 세상에 사니까. 숨 막히는 순간들의 연속에서 우리는 간혹 숨 쉬는 법을 잊기도 한다. 하지만 우린 숨쉰다. 저 앞에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숨을 쉰다. 매캐한 공기 속에서도 숨은 쉬어야지 별 수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이야기를 품고 산다. 그 호흡을 말하고 듣는다.     


몇 번이나 이야기했지만, 요즘도 나는 말을 예쁘게 하지는 못한다. 단어야 좀 고르고 고른다지마는 애초에 나는 사나운 언어를 쓰는 사람이다. 목소리의 톤과 어조를 어떻게 하지는 못한다. 온 세상 사랑 넘치는 말을 하면 뭐해, 악센트 딱딱 들어가고 목소리는 방에 쩌렁쩌렁 울리는데. 그러나 발화의 시작에 있어 존중의 유무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정말로 나아졌는지는 잘 모른다. 정말 좋은 말만 골라서 해도, 말하는 게 꼭 싸움 거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아직도 듣고 산다.     


그러나 이야기에 대한 존중은 여전히 가치 있다고 믿는다. 내 주둥이는 계속해서 단속되고, 또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들을 것이다. 단순히 예쁜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더 좋은 세상을 꿈꾸기 위해서 나는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고자 할 것이다. 사실 목적론 없이도 해야 할 일이다. 사람은 사람이니까. 확실한 건 그뿐이다.     


결국 그랬다. ‘아’가 달랐고 ‘어’가 달랐고 ‘아에이오우’가 다 달랐다. 그제야 ‘아’가 들렸고 ‘어’가 들렸고 ‘아에이오우’가 다 들렸다. 말할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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