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굽기 Jun 07. 2018

죄송한데 제가 춤은 잘 못 춰요

사람 사이에도 안전거리가 있는 법이라고 어른들은 말했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심한 편이다.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는 하는 게 민망할 만큼 당연하게 따라온다. 마음속에서 알게모르게 적을 많이 만드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보니까, 정신을 차려 보면 잔뜩 싫어하는 사람들 사이에 포위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안 좋은 일이라는 건 안다. 사람 싫어하지 말라는 건 선생님이나 부모님들이 권하는 이런저런 자기계발서에서 몇 번씩 강조하는 이야기니까. 적 만들지 마세요. 그런 이야기들이야 나도 몇 번씩 읽었다. 하지만 성격이 이런 것을 어쩔 수 없다. 이것저것 안 해봤을 리가. 장마철 반지하에 곰팡이 생기는 걸 어떻게 막겠어요. 내 무덤 파는 짓을 해놓고 나는 가끔 능청을 떤다.


그런데 이런 성격 탓에 삶이 이래저래 삐쭉빼쭉하냐 물으면 또 아주 그렇지만은 않다. 내가 본인 싫어하는 거 모르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서 그렇다. 내가 싸가지야 없다마는 그렇게 또 날 선 사람만은 아니라,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날 선 부분을 감추는 데 어찌저찌, 내 생각보다는 능하게 자라왔다. 선 지키기라고 해야 할까. 


사실 싫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선을 지키는 게 그렇게 극단적으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스트레스야 장난 아니게 받겠지만. 표정을 썩히지 않고, 어색하게라도 가끔씩 웃어 보이고, 혹시나 험한 말 튀어나오지 않게 입 좀 조심하면 되는 거니까. (물론 상대방이 내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때의 난이도겠지만.) 정작 가장 어려운 일은 호감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선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연애 대상적인 호감 뿐만이 아니라 친구 사이 혹은 여차저차 수많은 인간 관계에서 다 그렇다.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막말로 싸가지를 밥 말아먹지만 않으면 그만이다. 얼굴 근육 유지하는 게 조금 힘이 들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그냥 사회인으로서의 덕목을 좀 발휘해주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 앞에서 지켜야 할 선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지나치게 싸가지없어지지 않는 것, 그리고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지 않는 것. (싫어하는 사람에게 너무 붙어버릴 일은 없으니까.)


결국 아무리 가까운 사람들과도 안전거리의 유지는 필요하다는 소리다. 하지만 이건 어려운 일이다. 나와 내가 싫어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밀어내는 힘이 작용한다. 우리는 사회적 얼굴을 잃지 않기 위해 그 척력을 적당히 조정한다. 그러나 가까이 지내는 이들 사이에서는 끌어당기는 힘과 밀어내는 힘이 모두 작용한다. 좋아하는 마음에는 마취제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말이 좀 우습지만, 우리는 밀어내는 힘이 누군가를 밀어낼 수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될 때가 있다. 그것이 상대를 밀어내는 말인지도 모르고 툭툭 던져대다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거리를 두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싫어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보다도 더 위험하다. 통각은 뒤늦게 찾아온다.

수많은 사람들이 꼭 붙어 있는 것 같아도 사실 각자 어느 정도의 틈은 두고 있다.

때로는 끌어당기는 힘을 제지하지 않으면 그대로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을 모르게 될 때가 있다. 맹렬한 속도로 충돌한 둘은 곧 찢겨나가거나, 혹은 아득한 속도로 멀어진다. 보통 그쯤이면 마취가 풀려 있다. 상대방의 공간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 이것은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이다. 이건 어떤 관계이든 적용된다. 친구 관계에서야 말할 것도 없으며 애인, 혹은 부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관계의 유형에 따라 빈 공간의 부피가 변화할 수는 있어도 어쨌든 공간은 존재한다. 그 선을 넘으면 부담스러움이 따라붙게 된다. 그리고 한 번 생긴 부담스러움은 잘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거리가 생겨난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심하다는 말을 하면 보통 적이 많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인류애는 진작에 다 썩어 문드러진 줄 알았는데 그거랑 별개로 애정은 넘치는가보다. 어떤 종류의 관계이든간에 좋아하면 사족을 못 쓰게 프로그래밍 된 사람인지라 안전거리 유지를 잘 못 한다. 너무 가깝거나 너무 멀거나. 상대방을 부담스럽게 만들거나 어리둥절하게 한 일이 많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깎이고 깎이는 거라지만, 그 깎임이 내 잘못으로 발생한 경우는 씁쓸하다. 많이. 하지만 깨닫는 건 보통 너무 늦다. 마취제의 효과가 너무 좋다고 해야 할까. 쓴 맛은 고여 있다가 밀려온다.


쓴 맛좀 봤다고 물러설 수 있는 사람이면 좋을 텐데. 불나방이 온몸에 전기충격을 받고도 살충용 전등에 몸을 날리듯이, 나도 세상 온 쓴맛을 다 뒤집어 쓰면서도 너무 좋아하거나 너무 싫어하거나를 한다. 아직 사람 만나는 게 미숙해서 그런 거라고 어른들은 얘기했다.


인간관계에 성숙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허우적대지 않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면 좀 괜찮을까. 아파 본 경험이 자꾸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픈 건 아픈 일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보통 범주에 드는 사람이면 아픈 건 싫어한다. 난 보통 사람이다. 아프기 싫다.


그러나 앞으로도 아마 더 부딪히고 더 튕겨나가고 난리 브루스를 출 거다. 온 몸에 멍이 들 것이다. 생채기가 날 것이다. 전기충격을 받을 지도 모른다. 귀납법상 그렇다. 내가 춤을 잘 추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고려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튕겨나가는 것이 내 의지도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내 의지를 가지고 조금이나마 컨트롤할 수 있느냐겠지. 그게 어른이겠지. 좋아 죽는 게 아니라 좋아만 하는 것. 싫어 죽는 게 아니라 싫어만 하는 것. 아마 그게 성숙한 어른의 인간관계 방법론일 것이다. 과유불급이랬으니까.


다만 그런 생각도 든다. 좋아 죽는 느낌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건 과연 좋은 일일까. 모르겠다. 난 아직 한참 어린가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둥이, 주둥이, 주둥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