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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땅 Nov 10. 2023

Forgive me

두개의 영화속에서 용서에 대한 고촬

'용서'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명사: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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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용서'를 하거나 받는 경험을 하게된다.

그러한 경험은 때로는 감동이면서 현실적이되어, 마음 혹은 육체의 자유를 얻게된다.

하지만 진심으로 마음속 깊은 용서란 것이 무엇인지 가끔 되새겨보면 여러가지 의미와  감정의 지꺼기가 남아 있음을 알게된다.


그 찌꺼기는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작용하는데 그 잔재적인 감정은 아주 복잡하고도 오묘하다. 이를 설명하기는 참 어려운데,

영화를 통한 대입과 몰입으로 일면의 모습을 비춰보고자 한다.


가장 극단적인  경험으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보게 된 영화 '미션'은 한참이나

그 감정을  나에게 남겨주었다.


극중 로드리고 멘도자(로버트 드니로)는 노예 사냥꾼이었다.

당시 18세기는 발달된 무역과 자본, 종교로 강한 자가 약한 이들을 수탈하는 것이 일상으로

여겨지고, 식민지를 개척하고 정복하는 것이 당연시 되던 시기였다.


노예사냥꾼으로 원주민들을 사냥하고 잡아다가 마을로 돌아오는 그의 모습은 자신감에 차 있었으며, 대중은 그에게 환호하고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개선장군으로 묘사하였다.

그에게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고 단지 돈을 벌고 권력을 유지하는 대상일 뿐 이었다.

그에게는 두명의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동생과 아내였다.

그러나 가장 사랑하던 두사람의 불륜스런 사랑으로 그의 이성과 판단력은 멈춰버렸고

결국 그의 동생을 살해하게 되는 비극이 찾아온다.


결투에 의한 살인이었기에 '죄'에 대하여 묻지 않는다는 당시의 법률적인 판단에도

스스로 가장 깊은 곳에 숨어버린 멘도자는 말도 의식도 영혼도 후회와 분노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다가 가브리엘 신부를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그가 사냥하던 원주민의 마을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 멘도자에겐 스스로에게 벌을 내린다. 원주민의 마을은 맨몸으로도 오르기 힘든 거대한 폭포와 거친 밀림을 지나야 하는 길을 그가 가장 믿고 사용하던 칼과 갑옷을 짊어진 것이다.

인간 멘도자를 표현하던 칼과 갑옷은 그 상징적인 의미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죄'일지도 모른다.


오르다가 다시 굴러 떨어지고, 또 다시 오르고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원주민의 마을에 가까이

다가갈 수록 영화를 보던 나 스스로도 저 정도면 되겠다 싶었지만, 결코 그는 멈추지 않았다.

화면을 가득채운 폭포와 물 떨어지는 소리, 자신의 몸만큼이나 큰 짐을 짊어지고 고통속에서 짊을 옮기는 멘도자의  길은 고행자, 순례자의 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싶었다.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도 답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이 날지 모르는 그가 가고 있는 그길이 사뭇 비슷하게 느껴졌다.


아무도 그 끝을 모르고 헤매고 답답해할 때, 그에게 사냥당하고 죽임을 당하던  원주민 하나가 그에게 다가온다. 원주민의 동생, 아들과 딸일지 모르는 수없이 많은 동료가 그에게 끌려가 노예로 팔려 나갔기에 다가오는 그에게 주변의 시선은 집중되었다. 이윽고 손에는 칼이 들려져 있었으며, 멘도자 본인은 저항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눈을 감고 그 원주민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았다.

그때 원주민의 칼은 그가 짊어진 짐의 끈을 자름으로 그를 자유롭게 하였으니, 안도감때문일까?

답을 찾을 수 없던 문제와 영원히 지속할 것만 같았던 고통의 연속이 끝난것일까?

멘도자는 한없이 울고 또 울게된다.


영화를 보며 지루하다 할 만큼  이어지던 답답함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나에게도 평안함이 찾아온다.


두번째 영화는 '밀양'이다.

서른 세살, 아들과 죽은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온 그녀에게 밀양은 낯설고 이상한 곳이었다.


살갑게 다가오는 촌스러운 시골 사람들과

어딘지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을 격을 지닌 남자가 주변을 멤돌고 있었다. 그런 것들이 반갑지만은 안았다.


차츰 적응이란걸 하면서 그녀의 텅빈 마음을 신앙에 기대어 희망도 갖고 기쁨도 맛을 본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불행은 더 가까이 그녀 주변에 있었다.


가장 소중한 아들이 유괴되고 결국은 주검으로 돌아온 그녀는 몸부림치고 비명지르게 된다.

조금씩 알아가던 신앙은 그녀에게 마지막 신념이고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 아니 인간에게 버려진 자신을 신에게는 위로받고 그녀가 살아갈 수 있는 마지막 이유가 되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함으로 그 신앙을 실현하고 싶었다. 유괴범의 용서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신앙의 증거가 될줄 알았다.


하지만 유괴범의 사죄와 간증은 그녀를 경악하게 한다. 이미 신에게 용서를 받았다는 유괴범의 말은 그녀가 이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신의 용서로 인간의 용서는 너무 작고 초라해 보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 그는 평안하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용서'란 무엇일까?

머리와 가슴으로도,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 앞으로 나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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