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만지는 멋진 형아에서 감자머리로,
고3이었다.
누구는 수능을 준비하고, 누구는 취업을 준비하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도 친구들과 별 다를 것 없이 똑같은 시기에 똑같은 것을 준비했다.
그래도 하나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아빠의 강요 아닌 강요로 항공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말,
‘정 아니다 싶으면 공군 부사관으로 가면 된다‘는
달콤한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 버렸던 것이다.
한껏 기대하고 입학했던 항공전문학교는
어느샌가 나한테는 빵상아줌마가 사는 곳처럼
알 수 없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교수님이 빵상아줌마로 보였다.
분명 뭔가 설명하시는 것 같은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고
귀에 들어오는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실기를 잘 하는 것도 아니었다.
평소 조립을 잘 하던 나는
실기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해내리라 자신했지만,
차여지는 건 항상 나였다.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얼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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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학업에 지쳐가던 와중
‘더는 안 되겠다’ 싶어 공군 부사관에 지원하기로 했다.
아마 이때 당시 내 동기들 대부분이
공군 부사관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부사관을 준비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달랐다.
자기 꿈이라며 준비하던 동기들도 있었고,
이 길은 글렀다며 빠르게 포기하고
“개꿀 공무원” 하겠다는 동기들도 있었다.
나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웠다.
나라에서 보여주는 직업군인의 삶은
나름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집도 주고, 밥도 주고,
명절이나 중요한 날엔 떡값도 주는
그런 안정적인 직업.
더할나위 없이 미래가 없던 나에게는
최적의 직업이라고 자부했다.
지금 와서 말하자면 이건 나라에서 던진 미끼였고,
나는 그 미끼를 문 알래스카연어쯤 되는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비행기 만지는 돈 잘 버는 형아가 아니라,
감자머리 부사관을 택했다.
그 것도 공군이 아닌
바다 육지를 가르는 해병대 부사관으로.
그렇게 나는 항공을 떠나 바다로 향했다.
내가 발 디딘 곳이 얼마나 험악한 지도 모른 채.
나는 그렇게 해병대 부사관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