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서, 사랑이 가득한 거리를(육아휴직여행)
아내와 여행 일정을 미리 준비하고 숙소를 예약하면서, 정답은 없다는 것을 사뭇 알게 되었다. 미리 정해두었지만 예상과 다른 게 삶이고, 계획했기에 편할 수도 있지만 그에 발목 잡히는 게 인생이기도 했다
여행 한 달쯤 지난 시점에 재정비가 필요할 수 있으니, 슬로베니아 첫 숙소는 한인 게스트하우스로 예약하자
철저히 내 요청으로 네이버 블로그 검색 중에 알게 된 하담 님 댁을 예약, 픽업을 요청했다. 슬로베니아 여행의 시작, 류블랴나에서 출발은 그렇게 된 것이다.
크로아티아 여행이 한 달 정도 진행되고 기대와 다르게 나사가 한두 개쯤 풀려있는 기분이 들던 차였다
트로기르에서 외장하드 연결잭을 분실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덕분에 태블릿 pc활용도가 현저히 떨어졌고), 아이들 바지, 긴 옷 두어 벌을 어딘가 숙소 소파 사이에 끼워놓고 온 듯했고, 파그에서 150쿠나 지폐를 주머니에서 떨어뜨려 분실했고, 가장 결정적으로 아내가 휴대폰을 변기에 빠뜨려서 기동성과 정보수집능력이 현저하게 저하되었다(다행히 열흘 정도 지나니 휴대폰이 살아났고 지금까지 잘 쓰고 있다) 그리고 자그레브에서 렌터카 반납하며 작은 문콕과 스크래치에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지불했는데, 기껏 들어놓은 보험회사에선 서류가 부족하다며 보험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심정적 매듭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아이들도 잦은 이동으로 많이 피곤했을 것이고, 둘째는 자그레브에서 책상 모서리에 부딪혀서 진짜 눈두덩이에 멍이 들었고, 아내와 우리의 이후의 여행 일정을 어찌할지 대화도 필요했다
친절하고 편안하게 우리를 맞아주신 하담, Toni의 집에서 쉬며 앞마당에서 과일도 따고 예쁜 손녀 엠마와 어울리며 보냈다. 여행 배낭을 처음 꾸리던 5월 말 서울에서부터 했던 고민 ‘아이들에게 정말 좋은 여행이란?’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하게 되었다. 7살, 14개월 두 아이와 떠난 장기여행 치고는 제법 괜찮게 크로아티아에서 한 달을 보냈지만 남은 여름을 더 잘 보내고픈 욕심이 생겼다.
한인 게스트하우스에 오고 둘째 날밤, 특별한 모임이 있었다. 슬로베니아 한인회 임원분들의 만찬이었다. 함께 와인 한잔 하자고 초청하신 덕분에 아내와 나, 큰딸은 오랜만에 한국사람들과 한국어로 수다를 나눌 시간을 가졌다. 한인회 임원들부터 Toni의 아들, 친구들까지 많은 여행 정보와 슬로베니아 관련 팁을 알려주셔서 감사했다. 아내는 거의 두병의 와인을 새벽 동틀 때까지 마셨는데도 큰 숙취 없이 살아났다. 좋은 새벽 공기만으로도 숙취가 없다는 놀라운 체험을 한 셈이다.
그렇게 우리의 슬로베니아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나 방문하면 사랑에 빠진다는 그곳! 류블랴나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5일이라는 나름 꽤 긴 기간을 류블랴나 체류 일정으로 예약한 후에도 아내는 수시로 "그만큼 있을 만 해?" 하며 되물었다. 이쯤 되면 약간의 관성과 매너리즘이 생기니 나름 한 국가의 수도임에도 큰 기대를 안 하고 구시가에 들어섰다. 그리고 새 숙소 Nina의 집에 도착했는데, 집은 사진보다 작았고, 덜 깨끗했으며, 뭔가 구식이었다. 덕분에 우린 오래된 라디오를 틀어놓고 적적한 분위기를 달랬지만 그 운치가 나쁘지 않았다. 여행 떠나온 지 한 달, 이제 숙소에 맞춰서 도시 분위기에 맞게 사는 법을 배운 것이다. Nina는 유니세프에서 일하고, 최근까지도 아프리카에 있었든 듯했다. 부친상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각종 서류 처리하느라 바쁘다고 했는데 특유의 유머로 밝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류블랴나 구시가로 나서자, 유모차 끌고 다니기 너무 좋은 환경에 감탄을 했다.
류블랴니차 강변을 따라 자리를 잡고 아내가 커피 한잔 마시며 쉬는 동안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개구리 모양의 조각상에서 아이들이 놀기 시작한다. 그땐 몰랐다. 매일 이 길을 걸을 때마다 아이들이 저 안을 놀이터 삼아 놀 거라는 것을, 그리고 이 길을 지나는 모든 아이들이 그럴 거란 것을...
프레센 광장에 가니 비눗방울 아저씨의 퍼포먼스로 아이들은 행복했다. 아, 지금 류블랴나 축제 기간이자, 거리극 축제 기간이란 걸 실감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무척이나 행복한 풍경이었다.
슬로베니아는 국가명에 사랑이 들어간, sLOVEnia라고 하는데, 정말 사랑스럽고, 아이들에게 친화적인 또 다른 사랑 류블랴나 Ljubljana는 SLOWvenia로 부르고픈, 천천히 걷기에 더욱 매력적인 도시였다. 우리나라 가이드북엔 크로아티아의 부록쯤으로 다뤄지는 슬로베니아, 하루면 다 볼 수 있다는 류블랴나는 그 규모로 인해 짧게 다뤄지는 불운을 겪는 듯했다. 아이들과 찬찬히 음미하면 이곳의 매력은 그 깊이가 더해졌다.
류블랴나는 환경, 교육시설, 공공복지 등 다방면에서 Eu 및 세계도시를 대상으로 한 살기 좋은 도시, 아이 키우기 좋은 도시에서 늘 최상위권을 놓치지 않고 있다. 그 명성이 충분히 공감이 갔다. 특히 차도와 인도에 대한 구분에 있어 보행자의 권리를 우선으로 도로가 구획되어 아이들을 마음껏 풀어놓아도 경계할 위험이 별로 없는 점이 좋았다.
그리고 류블랴나에서 육아에 지친 엄마 아빠들을 구원해주는 곳을 소개받았다. 바로 말라 울리차 Mala Ulica. 류블랴나 현지인들이 취학 전 아이들과 함께 오는 놀이방, 혹은 실내놀이터, 혹은 보육시설인데 깔끔하고 좋았다. 그 외에 꽤 큰 초등생 아이들도 시즌에 따라 워크숍도 하고, 우리 같이 여행 중의 많은 유럽 엄마 아빠들이 아이들 풀어놓고 커피 한잔 하며 한숨 돌리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카페도 갖춰져 있고, 실외 놀이터도 있고, 가격은 아이 한 명에 2 euro, 2명 이상 가족은 4 euro로 저렴했다. 이후 류블랴나 한달살이를 결정하는데 큰 지분을 차지하는 시설이었다. 여기서 무수히 많은 엄마 아빠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아이들도 많은 친구들을 짧게나마 사귈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둘째 아이는 보육시설이나 놀이방에 간 경험이 없는데, 낯선 땅에서 취향에 맞는 놀이터를 만나 신나게 논다. 나와 아내 역시 엉겁결에 유럽의 부모들과 뻔하지만 정겨운 육아 얘기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된다. “몇 개월이에요?”, “여행 중이세요?”, “어디서 오셨어요?” 등등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고, 아이 키우는 건 누구나 다 힘들다는 뻔한 진리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류블랴니차 강변을 따라 Gallusovo nabrežje 거리에 정말 자그마하게 있는 우리의 단골 장난감 가게 Ristanc는 이후 우리 가족이 류블랴나에서 한 달 살기를 결정하게 되는 결정적인 온정을 선물한다.
처음 방문한 날 잠시 구경하다 나오려 했는데 주인 할머니 루치야 Lucija Sašek 씨는 마음껏 놀다 가라 한다. 네? 우리 딱히 살 생각은 없는데요,라고 쭈뼛거리는데, 루치야는 상관없다고 한다. 어린 둘째가 이것저것 구분 없이 들춰대서 혹여나 판매하는 상품을 망가뜨릴까 봐 둘째 아이를 말리려는데
그냥 내버려 둬요. 아이가 자기 경험을 하는 거잖아요. 부모는 게을러야 해요
루치야가 말한 'her own experience'이란 말이 무언가 뭉클하게 만들었다. 아이가 어리다 보니 "하지 마! 그만!" 하며 늘 붙잡고 다니기를 하는데, "그러지 마요. 그건 그 아이의 경험이고, 그 아이 삶의 몫이에요. 부모가 방해하면 안 돼요"라고 말해주던 루치야의 생각이 놀라웠다. 알고 보니 루치야는 심리학도 공부해서 아동 교육에 대해서도 탁월한 지식을 갖고 계셨다. 그리고 어떤 장난감을 아이에게 골라줘야 할지 고민하는 부모들에게 후회 없을 아이템을 딱 집어 골라주는 통찰력도 갖고 있었다.
왜 슬로베니아가 아이 키우기 좋은 도시인지 그 마음과 친절함을 모두 담고 있었던 루치야 할머니. 큰아이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등 짧은 한국말을 알려주는데 메모를 하며 다시 찾으면 꼭 직접 써먹는 성의를 보였다. "다음에 한국 관광객이 오면 꼭 해보세요!" 했더니, "너무 잘하면 한국에 유명해질까 봐 안돼요~"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여행이 길어지고, 이동이 잦아지면 어딘가 마음 놓고 쉬며 천천히 다닐 곳을 찾게 되는 듯했다. 특히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라 그랬다. 결국 류블랴나는 그렇게 우리에게 긴 인연을 선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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