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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 아빠 Nov 18. 2019

아이들은 방랑자의 지루함도 아쉬움도 없었다

- PAG 파그, 화성에 바다가 있다면(육아휴직여행)

육아휴직 여행 중 대략 한 달을 크로아티아에서 보냈다. 나름 긴 일정인데도 위아래로 긴 영토 덕에 동선을 짜는데 고민이 많았다. 우리 가족은 7살, 14개월 아이 둘을 동반했기에 더욱 고민이 많았다. 그럼에도 흔히 가지 않는 파그Pag 섬을 일정 중에 넣은 이유는 짧은 정보 몇몇에도 그 독특한 풍경을 보고 싶어서였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호수 같은 풍경. 정확하게는 누런 돌산으로 이뤄진 섬을 둔 바다였다.

거창하게 유럽 땅에 왔지만, 아이들과 움직이다 보니 ‘여행’의 의미보다는 ‘현지에서 육아하기’의 느낌이 강했다. 확신이 없으면 아무 곳에나 가질 않았고, 피곤하면 최대한 쉬면서 움직이는 법을 터득했다. 그런 와중에도 굳이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파그에 왔으니 이에 걸맞은 배경에서 사진도 찍고 물가도 거닐고 싶었다. 구글이나 각종 여행 페이지에도 세세한 정보가 부족해서 “이 방향으로 가면 무언가 있을 것 같은데?”라는 육감만 갖고 무작정 달렸다. 

익숙하고 선택하기 편한 방식을 거부하고, 어찌 될지 모르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떠난 우리의 여행을 닮아 있었다.

파그Pag 섬 안에서도 많이들 찾는 해변이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주차를 하고 절벽 길을 아이를 안고 내려갔다. 그리고 전혀 기대치 않은, 대략 사십 년 살아오며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상상한 적도 없는 풍광을 마주하게 된다. 비유하자면 화성에 있는 바다 같았다. 그 무명의 해변엔 우리까지 총 4팀이 있었다. 수영 안 할 줄 알고 수영복도 수건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모녀는 대충 속옷 차림에 벗고 들어가 수영을 하고, 둘째 아이는 돌 장난치며 기다렸다.

큰아이는 바다와 호흡하며 놀았다. 아내는 한참을 해수욕을 하고 나오더니 “이 바다는 정말 건강한 바다 같아. 바닷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니 치유되는 느낌이야”라고 했다. 둘째는 무서웠는지 발만 담가보고 밖에서 노는데, 조금만 더 컸다면 거침없이 누렸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파그Pag 에 오기까지, 아니 거창하게 시작한 육아휴직이 우울증이 되고 이를 극복하고자 급작스레 정한 장기유럽여행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구태여 아는 사람만 아는 이곳에 왔어야 했을까 어정쩡한 마음이 들 때쯤 파그Pag 엘레나 비치에 온 것이다

이걸로 충분해. 파그Pag 온 이유, 우리가 떠나온 이유...

입고 있던 옷이 다 젖어서 대충 말리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가족 네 명이 다 차분하게 그 순간을 음미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감사할 일이 많다는 것을 곱씹으며 말이다.


다시 파그Pag로 향하던 첫날로 돌아가자면, 페트르차네에서 파그Pag 로 이동하는데 둘째 딸이 차를 견디기 힘들어한다. 결국 짜증과 투정으로 네 가족이 티격태격하다가 길 중간에 마리아 상이 있는 곳에 잠시 쉬어간다. 고작 한 시간도 차에서 못 버티나, 나름 드라이브를 즐기는 여행을 기대했건만, 세 여인 모두 차 타는 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나도 운전할 때 가뜩이나 예민해지는데, 지금의 이 구성원과 함께 사는 동안 여유 있게 드라이브하며 즐기는 렌터카 여행은 물 건너간 듯하다. 길거리 드문드문 만나는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한 번씩 쉬어가며 기도한다. "제발 무탈하게 목적지에 도달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파그 올드타운 초입에 위치한 숙소에 도착하니, 주인 할아버지 딸 Ana가 친절한 웃음으로 마중을 나왔다. 잘 리모델링한 시골 할아버지 댁에 온 기분이었다. 은퇴한 교장선생님이 주인 할아버지이며 자녀들이 부지런히 숙박공유업을 운영하는 중이었다. 매번 호스트의 호의를 받으며 새로운 우리 집을 맞이하고 기본적인 룰을 확인하고 나면 잠시 동안 우리 집이 되는 생활이 반복되니, 아이들도 그렇게 잦은 새 집살이에 익숙해진다. 게다가 둘째는 고작 14개월 되었다. 여행을 마치기까지 4개월을 그렇게 지냈으니, 본인 평생의 1/4 이상을 길 위에서 떠돌이 삶을 보낸 셈이었다.

파그에 도착한 첫날은 비가 드문드문 내리며 흐리고 쌀쌀했다. 우의부터 챙겨서 마을 중심가에 갔다. 아내는 노천카페에서 커피 한잔의 fjaka를 누리고 큰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종탑을 찾아 나섰고 둘째는 동네 오빠들 공놀이에 서슴지 않고 끼어서 잘 논다. 나름 시골 마을에 와서 그런지 더 순박하고 더 여유 있다. 파그 마을 소년들은 이 낯선 동양인 꼬마가 아장아장 걸어오는데 그들의 공놀이에 기꺼이 합류하게 했다. 

한 밤 자고 일어난 둘째 날은 햇살이 무척 뜨겁다. 오전 일찍 나가서 광장을 뛰노는데 너무 뜨거운 햇볕 탓에 아이들이 일사병 걸릴까 봐 걱정이 된다. 결국 머리가 흠뻑 젖을만치 땀을 흘린 둘째를 들쳐 매고 먼저 숙소로 돌아가는데 잠이 든다. 탈진해서 기절한 건 아니지? 다행히 그냥 낮잠이다

우산장수 부채장수 어머니 얘기 있지 않나? 비가 오면 부채장수 아들 걱정, 쨍한 날엔 우산장수 아들 걱정하는 어머니 얘기 말이다. 내가 꼭 그런 기분이었다. 햇살 뜨거우면 더워서 탈진할까 비 내리면 춥고 감기 걸릴까, 아이와 함께라면 맞이하는 모든 상황과 조건 속에 근심거리부터 찾는다. 

아내는 말한다. 여기까지 탈없이 잘 따라와 주는 아이들이 너무 기특하다고 말이다. 나 역시 짜증과 근심 걱정 가득하게 하루를 보내다가 간혹 기대치 않은 선물을 받았다. 파그Pag의 낯선 해변가가 그랬다. 돌다리도 두들겨보며 건너다 무작정 드라이브하며 찾아낸 해변은 우산장수 부채장수 아들 걱정인 아빠에게 작은 행운과 교훈을 선물했다.


파그에서 일정을 마치고 자다르, 슬로베니아로 가기 전까지 2박, 1박씩 빠듯한 이동 일정으로 움직여야 했다. 7월 중순까지 숙소와 이동 스케줄을 한국에서 모두 계획하며 떠나왔다.

출발 전부터 숙소 예약하며 아내의 일정표에 반기를 들었었다. 그냥 한 일주일씩 묵으며 쉬엄쉬엄 가자고 했는데, 아내는 차가 생기면 다니기 편할 테니 차 있을 때 갈 수 있는 장소를 부지런히 가자며 1~3박 이동 일정으로 빡빡하게 채웠다. 그런데 아내가 먼저 지쳤다. 난 이동 편 및 숙소 호스트와 소통을 담당해서 그나마 괜찮은데, 매번 짐 정리하고 짐 싸는 아내는 짧게 머무르며 깨작깨작 다니니까 힘들었다. 이즈음부터 우리의 여행 후반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 한 도시에 일주일씩 머무르며 이동할 것인가, 아니면 마음에 드는 한 도시에 한 달을 살아볼 것인가... 다행이라면 아이들은 일주일을 정착해도 지루하지 않았고, 하루 이틀 만에 떠나도 아쉽지 않았다. 

7월이 되었고 어디를 머무르던 각종 여름 축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다르에서는 거리를 돌며 챙겨 온 브로셔로 알게 된 인형극 축제를 관람했다. 공연 시간이 모두 9시 반 시작이다. 해가 긴 여름, 늦은 저녁까지 광장과 노천카페는 활기가 넘쳤다. 일정만 맞는다면 더 많은 공연을 보고 싶지만, 우리는 너무 빠듯하게 움직여야 했다. 광장에서는 기대에도 없던 마을 사람들의 전통 공연도 간간히 열렸고 아이들은 격 없이 어울렸다. 이 여행을 시작한 이유가 그런 자유로움이었다.

둘째는 더 야성적이고 더 태초의 생명체가 된듯했다.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느끼고 소통하고자 한다. 여행을 시작한 후로 큰아이는 비염, 천식 증세가 없어졌고, 둘째는 아토피 피부 긁는 증상이 없어졌다. 그리고 더 거침없는 아이들이 되어, 또래 아이는 아무에게나 다가가서 말을 건다. 아이들이 가교 역할을 하면 자연스럽게 현지인 엄마 아빠들과 육아 수다를 했다. 그렇게 공감을 얻는 방식으로 내 육아우울증도 치유되어 갔다.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다시 찾은 자그레브 기차역에서 아이들은 기다리며 뛰어논다. 짐을 줄이겠다고 말만 했지, 짐은 희한하게도 늘어난 느낌이다. 기차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고, 한산했다. 그리고 한 시간 즈음 달렸을까? 잠시 정차한 국경에서, 크로아티아 공무원과 슬로베니아 공무원이 함께 와서 스탬프를 찍어준다. “며칠 있었니? 며칠 있을 거니? 어디 갔었니? 어디 갈거니?” 형식적인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며 우리 여행의 한 단원이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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