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다르, 아름다운 석양과 아이 친화적인 도시에서
영화감독 히치콕이 '지구 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양이 있는 항구'라고 극찬했다는 자다르 Zadar는 그 명성에 걸맞게 멋진 바다를 마주한 도시였다.
아빠, 바다가 내 손을 따라서 움직여!
큰딸은 바다를 연주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니, 믿은 건 나고, 그녀는 실제로 연주했다
눈부신 대낮에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피로감은 없었다. 자다르에 도착한 우리는 기대 이상의 풍광과 아이들이 뛰놀기 좋은 놀이터, 그리고 친절한 사람들 덕에 다시금 이번 유럽여행 선택이 탁월했다는 것을 체감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과 여유에 닿기까지 만만치 않은 난관이 있었다. 트로기르에서 처음 차를 렌트해서 자다르에 오기까지 고난의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금요일에 비와" 트로기르로 오는 차 안에서 이반이 말했다. 그땐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 얘기에 잔뜩 긴장했어야 했다. 금요일에 큰 딸이 성 로렌스 성당 종탑을 가겠다고 노래를 불러서 함께 가야 했다. 그런데 날씨는 심상치 않았고, 종탑에 오르는 계단은 좁았다. 난 아기띠를 하고 둘째까지 안고 올랐다. 결국 어느 장소를 얼마나 느끼고 즐기느냐는 마음의 문제다. 그리고 그 마음이란 게 상황과 조건에서 출발한다
트로기르에서, 종탑에 올랐다가 서둘러 숙소에 가지 않고 성당 내부 구경한 게 착오였다. 비가 하늘이 무너질 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바람을 피해 한 시간 반 가량을 피신한 채 아내를 기다렸다. 폭우를 뚫고 우의와 유모차가 오길 기다리며 둘째 아이는 잠들고 큰딸도 슬슬 심심하다. 별 볼 일 없는, 하지만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우리 숙소가 그리웠다.
여행의 질을 결정하는 것 중 숙소의 조건이 무척 크다. 젊은 시절, 나 혼자 잠들 자리만 있으면 루프탑도 상관없었는데, 아이들이 있으니 먹고 자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여행의 절반은 숙소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긴 일정상 숙소가 편해야 피로가 누적되지 않는다. 트로기르 숙소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최신식 빌라였으나, 비좁은 공간 탓에 애석하게도 충분히 편하게 쉬질 못했다. 숙소에서 좀 답답해지면 아이들의 자고 먹는 템포가 꼬이기 시작한다.
트로기르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스플리트 공항에 렌터카 픽업차 도착했다. 처음 예약을 할 때만 해도 스플리트 공항 렌터카 픽업 환경을 자그레브 공항의 한산함만 생각했다. 그런데 스플리트 공항은 옛날 동서울버스터미널보다 더 빠글빠글하고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토요일, 전 유럽인 들은 다 넘어오는 것 같았다. 차를 받는데 1시간, 차까지 가는데 뙤약볕에 자갈길을 지나가는 중노동, 차 받으니 짐이 다 안 들어가고, 애들과 아내는 힘들다고 징징이고, 이런 지옥이 따로 없다. 자다르까진 1시간 40분은 걸린다는데, 그건 안 막히고 최단거리로 갈 때 기준이다. 그리고 난 이 나라에서 초행 운전자다.
차 안이 답답하다고 힘들어하기에 일부러 고속도로 진입을 하지 않고 해안도로로 가며 기분도 내고 좋은 풍경에 기분 전환도 하려고 했더니만, 큰아이는 멀미하고 둘째는 계속 칭얼대고 아내도 투정이 장난이 아니다. 결국 그렇게 낯선 길을 돌고 돌다가 시골에 허름한 식료품점과 bar가 겸비된 곳에 당도해서 잠시 그늘에 정차한다. 정말 깡시골에 웬 동양인 가족이 탄산수 하나 시키고 화장실 다녀오니 신기한 듯 관심받는다. 동네 술주정뱅이 노인이 빈 페트병을 줍다 말고 아이들 귀엽다며 말을 걸어오고, 종업원 청년들은 이 낯선 이방인에게 어떻게 친절을 베풀어야 할지 우왕좌왕이다. 어쩌면 장기여행을 계획하며 상상했던 순간이나, 아내는 그런 호의와 여유를 받을 여력이 없다.
그 어수룩한 분위기를 뒤로 하고 근 두 시간을 달려 자다르에 도착했다. 이동하던 차 안은 정말 모두가 횡설수설하며 정신줄 놓은 상태였다. 나름 차 빌릴 땐 ‘여행에서 멋진 풍경을 보며 달리는 드라이브가 있어야지~’라고 상상했거만, 멀미에 취약한 어른 여자와 어린아이 둘에겐 그저 지치기 전에 바짝 달려야 하는 좁은 이동수단일 뿐이었다.
자다르 숙소는 올드타운 중심에 있었고, 공간은 넓지 않았지만 트로기르 때보다 공간 구획이 잘 되어 있었다. 좀 더 집 같은 집이었다. 호스트는 19세기 건물이라고 자랑하며, 물론 속은 19세기가 아니라고 농담을 한다. 차로 이동하며 쌓인 피로가 그나마 좀 풀릴 듯하다.
육아에도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아이가 아프지 않은 게 최우선, 그리고 잘 자고, 잘 먹고, 잘 놀고, 잘 싸고.. 이 중 하나라도 삐그덕거리면 여간 괴로운 게 아니다. 그렇기에 숙소를 어디로 하느냐, 그리고 무얼 타고 이동을 하느냐가 여간 중요한 게 아니다. 가성비 따지지 않고 우리 식구 널찍하게 편안히 쉴 곳을 찾으면 좋겠고, 육아도 돈만 많으면 다 해결된다면 좋겠지만, 상황과 조건이 나를 불행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최선이라 생각하고 예약했던 숙소가 렌터카가 여행지가 판단 착오였더라도 아쉽고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육아는 그런 핑계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잘못된 판단과 힘든 조건과 상황을 뚫고 자다르에 왔는데, 정말 좋았다. 아무리 육아가 고생이어도 ‘우리 아이 안 낳았으면 어쩔뻔했어?’하며 사랑하는 아이에게 감사하듯, 힘들게 자다르에 온 보람이 있었다. 해가 길어져서 늦게 나와서 리바 거리 Riva를 걷노라니 피로가 한여름 얼음 녹아내리듯 풀려간다. 오랜 렌트차 이동으로 가족 모두 두통이 생겼는데 하룻밤 지나고 모두 나아졌다.
자다르 Zadar의 매력은 아름다운 바다를 마주하고도 도시가 지녀야 할 매력과 요건을 충분히 갖춘데 있다. 그리고 이곳은 아이와 함께 여행하기 너무 좋은 곳이었다. 체감상으로, 스플리트가 젊은이들의 도시이자 모든 연령을 커버했다면, 트로기르는 은퇴한 노년층이 많이 머무르는 분위기였고, 자다르는 아이를 동반하는 사람들의 도시 같았다
바다 오르간 방향으로 가는 길에 소소한 놀이기구와 놀이터가 잘되어 있었다. 큰딸은 거의 2만 원 돈을 쓸 정도로 여러 번 같은 놀이기구 탑승에 열을 올렸고, 둘째는 여기서도 여전히 돌을 고르고 잡고 맛보았다
어디서 오셨나요?
우리 나이로 8살 아들과 축구놀이를 하던 아저씨는 스페인 카나리 제도에서 왔다. 내가 TV에서 윤식당 가라치코가 생각나서 한국사람들이 가고 싶어한다했더니 본인이 거기 살고 있으며 그렇지 않아도 많이 온단다. 큰아이가 함께 패스 놀이, 스틸 놀이에 참여했는데 너무 형편없이 못하기에 "내 딸 축구하는 게 꼭 우리나라 한국 국가대표팀 같아"라고 했더니 내 농담을 알아들은 스페인 아저씨가 빵 터진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축구 얘기를 나눌 기회가 많아지고, 우리나라 축구 실력이 별로라는 농담을 하면 상대편에선 꽤나 즐거워했다. 아내는 내가 우리나라를 비하한다며 싫어했다.
그렇게 자다르 놀이터에선 한 살부터 예닐곱 살까지의 현지인 포함 유럽 아이들이 뒤섞여 놀았고 우리 낯선 동양인 자매도 함께 어울렸다. 큰아이는 자다르가 집인 축복받은 아이 라파엘과 금세 친구가 되었는데, 이 친구 엄마 티하나는 한국 드라마 커피프린스를 재밌게 봤다며 우리 부부에게 한국에 관한 많은 것을 물었다. 십수 년 전 드라마를 최근에 보고도 좋아하는 티하나에게 공유 나오는 도깨비도 추천했다. 티하나가 한국에서 애 키우기 어떻냐고 묻기에 비싸고 바쁘고 경쟁적이다며 나쁜 점들 이야기하다가
한국은 아이들 키우기에 공기가 너무 안 좋아
라며 가장 큰 단점을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지난겨울, 그리고 봄, 계절과 상관없이 아이들은 자주 아팠다. 그런데 여행 중에는 무척 건강했다. 먹는 건 되레 부실해졌고, 간혹 피곤해서 잠을 설치며 투정하기도 하지만, 햇볕을 받으며 원 없이 뛰어노는 것이 아이들 건강에 얼마나 중요한지 놀라운 경험을 했다. 큰 아이는 성 도나투스 성당 안팎에서 주변 사람들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춤을 추었다. 여행을 시작했던 자그레브에서 발레 공연을 본 이후로, 아이는 자유로움을 표현하는 데 있어 주저하지 않았다. 자다르 구도심 어디든 그녀의 무대였다.
우리가 어릴 적 파란 하늘을 보며 해 질 무렵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를 때까지 뛰놀고 소아과는 근처에도 가지 않던 기억이 난다. 우리 아이들에게 미세먼지 농도를 살피고 병원 약을 달고 살고 실내 활동하자는 제재가 아닌, 자다르의 태양과 바다처럼 멋진 풍광과 자유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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