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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 아빠 Nov 14. 2019

육아는 핑계일 뿐, 내가 좋아 떠난 거다(육아휴직여행)

- 나의 Fjaka는 어디쯤 있을까(크로아티아 트로기르)

한국사람들은 늘 바쁘잖아, 우리는 너무 여유가 넘치지. 카페에 앉아 서너 시간씩 수다 떨고, 테라스에 앉아 쉬는 게 일상이야. Fjaka라고 하거든


트로기르의 숙소는 다리 건너 치오보ciovo 섬 초입에 잡았다. 스플리트에서 차로 30분 거리, 스플리트 숙소 host Sandra 남편 Ivan이 300쿠나에 우리를 트로기르로 데려와줬다. 이반과도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비수기 때도 달마티안 지방은 따뜻한데 저렴하니 꼭 오란다. 이반의 말투와 캐릭터가 아내의 셋째 형부를 꼭 닮았다. 우리는 여행 중에 인종만 다르지 한국에서 알고 지내는 많은 사람들과 거의 동일한 사람들을 만난다. 

트로기르 숙소에 도착하니, 호스트의 친구 Deni가 나와있다. Deni는 줄리 델피를 닮았고 체형이 큰 미인이라 느꼈는데, 아내는 크로아티아에 워낙 미인이 많아 이곳 기준으로 흔한 스타일이란다. 여하튼 친절하게 숙소 안내를 해주고 정보를 주다가, 우리 여행 일정 얘기 등을 나누는데 Fjaka에 대한 말을 꺼낸 거다. 내가 마지막으로 Fjaka 비슷한 휴식과 수다를 누려본 적이 언제였지?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런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다. 아내 역시 늘 Fjaka스런 모닝커피 한잔의 망중한을 꿈꾸지만 누리지 못하며 지낸다. 애들과 함께 하는 장기 육아휴직 여행이란 말에 Deni가 Admire 한단다. Admire보다 Fjaka가 더 탐나고 부럽다.


두 아이의 낮잠시간이 엇갈리다 보니 하나씩 데리고 나가서 산책을 했다. 산책이란 별 게 아니다. 까매를랭고 성을 위시한 구시가를 마냥 걸어 다니고 오래된 성당이나 유적지를 들어갔다 나오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둘째 딸은 어디를 다녀도 인기가 많았다

둘째 덕에 정말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짧은 대화를 나눴다. 크로아티아 트로기르에도 관광버스 타고 내려서 깃발에 따라 우르르 단체 관광하는 유럽 노인들이 많았다. 스페인, 홀란드, 벨기에, 독일, 폴란드 등 본인들이 어디 가는지 뭐 보는지 성의가 없어지고 지쳐있을 즈음 아장아장 걷는 둘째 딸을 보고 예쁘다며 모여들었다. 폴란드 할머니들은 심지어 줄 서서 둘째와 기념사진 촬영을 하기까지 했다. 나도 이방인인데, 또 다른 이방인의 낯선 호의를 일상적으로 받다 보니 타지에서 생길 긴장감이 누그러진다.

짧게 나누는 대화란 게 사실 그리 대단치 않다. 여행 일정 얘기, 아이가 예쁘다는 칭찬, 크로아티아 얘기, 그러다가 내가 축구 얘기하며 상대방에게 농담도 건네고, 대화가 길어지면 김정은-트럼프 얘기, 삼성과 박근혜 구속 얘기까지 하는 상황도 생기곤 한다.

낯선 사람들과 아이 덕분에 얘기 나눌 때 제일 즐거워 보여

아내가 나에게 여행 중 가장 행복한 모습을 보일 때가 사람들과 그렇게 짧은 영어로 수다 떨 때라고 한다. 나는 더 이상 집에서 바닥 걸레질 안 하는 게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십수 년 전 혼자 유럽과 중동을 배낭여행하며 영어가 서툰 아시안 남자가 겪는 인종차별 혹은 무시에 이골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7살, 14개월 따님들과 함께 하는 동유럽은 여행이 끝나는 마지막까지 너무나 호의적이고 편안했다. 젊거나 어린 남자, 시장의 불만 가득한 아낙네조차 무뚝뚝하다가도 이내 친절함을 보인다. 나의 편견과 오만이 거둬지는 순간이고, 그렇게 아이들은 나에게 큰 선물을 준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누구나 터울 없이 마주했고, 혼자 다녔다면 나를 거들떠도 안 봤을 유럽의 미녀들이 미소와 호기심을 보인다. 아이들 몫을 내가 누리며 가만히 생각한다. 어쩌면 육아는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서, 나를 위해서 이렇게 떠나온 것이다.


트로기르에 머무르는 동안 치오보ciovo의 오크루그비치okrug에 물놀이를 갔다. 여행 떠나와서 첫 해변 방문이었는데 둘째는 바닷가 자갈 테이스팅 삼매경에 빠지셨고, 아내와 큰딸은 한참 수영하더니 슬슬 추위를 느껴 물 밖으로 나왔다. 우리 가족 모두 래시가드로 꽁꽁 싸맨 덕에 자칫 무슬림으로 보이진 않을까 싶었다. 옆에서 놀던 한 살 꼬마 소년 가족은 골웨이에서 사는 아일랜드 자매, 크로아티아 남편, 독일 형부로 이뤄진 다국적 구성이었다. 여행하며 유럽 내 국경을 초월한 가족을 보는 건 쉬운 일이다. 대륙 안에 다양한 국가와 인종과 언어가 흔하게 교류한다. 진작에 유럽 대륙으로 진출했어야 했나 중얼거리는데, 아내가 되지도 않는 망상이란다.

언젠가 Fjaka를 누릴 수 있을까. 아이들이 부쩍 자라면, 처음 방문한 나라의 외딴 시골에서 모든 긴장을 내려놓고 커피숍에서 낯선 사람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떠는 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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