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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 아빠 Nov 13. 2019

아이의 행복과 아빠의 유희 사이의 간극이 넓다

- 스플리트에서 7살, 14개월 아이들과 육아휴직여행

크로아티아 스플리트Split 에는 항구를 끼고 유명한 리바Riva 거리가 있다. 남쪽으로 아드리아해가 펼쳐지고 북쪽으론 유명한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이 있어서 산책하기에 운치가 좋다. 역시나 수많은 관광객으로 붐비고 식당, 상점의 물가가 비싸지만 날씨가 좋으니 아이들과 두런두런 걷기에 좋았다. 그곳에서 폴란드인-한국인 부부이며 우리처럼 두 아이(5살, 2살)와 함께 여행을 온 윤희 씨 가족을 만나게 된다. 아이들이 같은 또래라 어울리기 좋았고, 오랜만에 한국어로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다 보니 아이 키우는 얘기부터, 휴가, 여행 얘기를 수다스럽게 나누었다. 그러던 중 바닷가 쪽에서 한 젊은 커플의 청혼 세리머니가 펼쳐지고 있었다. 함께 있는 가족, 친구뿐 아니라 지나가는 관광객들도 박수로 축복을 해준다. 

그런데 나탈랴 엄마 윤희 씨가 말한다

"어후~ 지금 청혼할 때야 좋지, 근데 저기까진데. 난 다시 돌아간다면 결혼 안 해요. 애들 없어도 돼~"

육아에 지친 나탈랴, 알렉 엄마 윤희 씨 말에 그녀의 폴란드인 남편도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애 때는 사려 깊고 음식도 맛있게 준비해줬는데, 이제 알아서 먹으라고 던져~" 하며 접시를 던지는 제스처를 익살스럽게 과장해서 말한다. 깔깔 웃으며 우리 부부도 맞장구친다. 저도요, 결혼은 미친 짓이에요. 저야말로요! 다음 생에는 솔로로 와서 꼭 크로아티아 여자 사귀어볼 거예요.

아이들은 육아와 결혼에 이골이 난 이 엄마 아빠들의 수다는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논다.


내가 좋을 거라 생각하는 것, 하지만 아이가 정말 좋아하는 것, 그 둘은 태평양을 끼고 떨어진 섬 같다.

자그레브에서 워낙 많은 욕심을 냈더니 이런저런 균형감이 다들 삐그덕 거린다. 스플리트에서 할 것이나 하고 싶은 게 많더라도 욕심을 내려놓기로 한다. 그런데 도착 날 맛보기 산책차 나섰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s Palace 궁전 입구의 로마 병사와 사진 찍기를 희망하는 큰딸. 무료일 줄 알았는데 팁을 받는다. 일단 나중에 다시 오자고 설득했는데 숙소에 돌아와서도 로마 병사 노래를 부른다. 

아이가 좋아하는 걸 하자, 유명 관광지 모두 제치더라도 저 체험은 꼭 해보자.. 그리하여 이튿날 오후 소원풀이를 하게 된다. 그런데 무언가 아쉽다. 그 와중에 촬영을 함께 한 로만 솔저가 "이따 늦은 오후에 공원 뒤편에 야외 뮤지엄이 있는데 사진 찍고 체험할 기회가 있으니 꼭 와!"라고 큰아이의 기호를 파악하고 추천을 한다.

바로 앞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선 깃발부대 등등이 우르르 다니는데 큰딸과 찾은 체험장에는 우리뿐이었다. 내 취향만 확실하다면, 내 주관만 뚜렷하다면, 굳이 모두가 좋다고 하는 곳을 쫓을 필요는 없다. 조금만 시선을 돌리고 옆을 바라봐도 나와 내 아이가 행복할 방법은 즐비하다. 그것엔 그리 큰 용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각종 의상 체험부터, 무기도 다뤄보고, 아이가 버티기 제법 무거울 갑옷도 둘러보고, 활쏘기 체험에선 비치된 활을 거의 다 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또 오겠다는 큰딸, 멋진 풍경의 해변이나 역사와 세월을 품은 웅장한 궁전보다 로마시대 체험활동이 스플리트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 한다. 그렇게 아이의 기호는 내 예상의 수평선 저 너머에 떨어진 섬 같다.


공부하지 않고 떠나면, 그저 오래된 돌덩이일 뿐이야


처음 여행을 떠나던 시절, 어느 여행자의 후기를 보며 섬뜩했던 기억이 있다. 무더위에 지친 여행자들에게 유적지란 그저 그늘이 있는 오래된 돌덩이로 전락하는 일이 많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라, 여행하는 곳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다. 스플리트에 가는데 왜 가는지 모르는 수준으로 잘 몰랐고, 출발하기 직전에야 가이드북을 훑어보며 역사적인 의미를 곱씹었다. 하지만 눈 앞에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이 펼쳐지자 해답을 찾은 느낌이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 그늘진 골목을 누볐다. 때론 큰 아이와, 때론 둘째와, 어쩌다 혼자서. 우리 모두에게 놀이터였고, 미로였고 마음껏 누볐다. 낯선 동양인 아이들을 예뻐하는 많은 현지인 덕에 다음 일정, 다다음 일정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다.

그렇게 태평양을 건너듯 먼 취향이 좁혀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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