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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 아빠 Nov 12. 2019

기차가 종착역으로 향하듯 아이도 결국 자란다

- 자그레브에서 스플리트까지 기차로 이동하기, 6시간 육아여행

Many times I've been alone, and many times I've cried 
Anyway you'll never know, the many ways I've tried


                                                                                         -  the Long And Winding Road (the Beatles)


"혼자였던 그 수많은 시간, 울어야만 했던 그 시간, 얼마나 노력했는지 당신은 잘 모르죠"


길은 수많은 방향으로 뻗어있고, 결국 어느 방향을 선택해서 나아간다. 갈래길에서 선택을 하고 필요하다면 멈추기도 되돌아가기도 한다. 내가 둘째 아이가 태어나며 육아휴직을 선택했지만, 아이와 하루 종일 함께 하며 길 위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주변은 사막이고 길과 풍경의 경계선도 알아볼 수 없이 희미했다. 

지나고 보니 난 마지막 종착지가 정해진 기차 위에 있었단 걸 깨닫는다. 선로를 이탈하지 않는다면, 계획에 없이 아무 역에서나 하차하지 않는다면, 난 뚜렷한 목표를 두고 안정적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그땐 그게 왜 그리 힘들었을까, 육아하는 아빠는 헤매지 않고 더 다정다감하게 함께 할 순 없었을까?


동유럽 여행 중에 인천공항에서 폴란드 바르샤바까지 10시간 비행을 제외하고 가장 긴 이동시간이 바로 자그레브-스플리트 구간이었다. 일단 우리 식구는 어린아이 둘이 장시간 버스 이동이 어려웠다. 그리고 렌터카 이동도 최대 2-3시간으로 보기에 크로아티아 남부 달마티아 지역으로 이동이 과제였다. 결국 기차를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아이들이 좀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란 예측이었다. 

자그레브-스플리트 노선은 비인기 노선이라 자리가 여유가 많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그레브 시내를 거닐던 중 굳이 예매를 위해 기차역(Glavni Kolodvor)을 찾았다.

나름 크로아티아 수도 중앙역인데 소박하기 그지없다. 워낙 서울 지옥철에 적응한 탓일까? 그래도 고풍스러움을 겹 입은 게 정겨웠다. 그리고 역무원에게 메모를 써서 보여주며 기차표를 살 계획이었으나, 10년 전 독일 뮌헨에서 본 승차권 예약 발행 기계가 있는 것이다. 영어로 설정을 하고 예약을 진행한다. 그렇게 Zagreb->Split 기차표를 발권한다. 2등석 세장 544쿠나, 큰애 할인, 둘째 무료, 좌석 지정 mandatory fee까지 포함 대략 10만 원이다

출발 당일, 기차는 7시 35분에 떠나 오후 1시 45분 도착이다. 아내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짐을 쌌고 나는 새벽 3시까지 블로그 글을 정리하다 잠깐 졸고 일어나서 떠날 채비를 했다. 새벽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우리의 자그레브 여행은 날씨가 안 받쳐주는 일이 많았다. 특히 소나기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뿌렸다. 전날 숙소 host Zrinjka 아줌마가 소개해준 caravan 기사는 우리를 기차역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예약을 아프단 핑계로 문자 하나 남기고 펑크를 냈다. 그래도 우리에겐 우버 택시가 있었다. 우버 덕에, 구글 덕에, 그렇게 문명이 나의 부족한 준비를 채워주었기에 육아여행이 가능했다. 서둘러 자그레브 Glavni Kolodvor 중앙역에 가니 출발 30분 전이다. 아기띠를 하고 큰 배낭을 메고 카트 두 개를 끄는 동양인 남자는 주목받고 둘째 만두는 예쁨을 받았다 

기차는 플랫폼에 일찌감치 들어와 대기 중이었고 우리는 자리를 잡았다. 좌석 컨디션이 괜찮다. 검정, 분홍 카트와 유모차가 통로 짐칸에 차곡차곡 자리 잡았다. 이제 모두 한 두어 시간 자고 일어나 먹고 놀면 스플리트에 도착하겠지 하며 긴장이 풀리는데,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래도 나름 기차여행이라고 설렌다. 미리 예약한 마주 보는 좌석은 덩치가 산만한 할아버지가 앉기에 자리를 옮긴다. 비인기 노선인지라 1/10도 채 채워지지 않는다. 맨 앞칸에 독립공간이 괜찮아서 자리 잡고 기차는 출발한다. 웬 담배냄새가 금연석인 데도 강하게 풍긴다. engineer 기차 기사가 피우나 보다. 조종석을 두드려 승무원 언니에게 항의하니 뒤편 일등석이나 빈자리 많으니 아무 데나 가서 앉으란다. 나의 클레임에 용기를 얻은 옆좌석 젊은 여행객 커플은 환불까지 요구한다. 여하튼 6시간 긴 기차여행인데 우리는 독립공간이 생긴다. 이제 편히 먹고 자기만 하면 되는데......

기차 떠나고 한 20분 잔 둘째 딸이 더 이상 잘 생각이 없다. 비행기 타고 유럽으로 오던 10시간처럼 다른 승객들 옆 통로를 걸음마하며 참견할 추세다. 그리고 호기심이 호의로 돌아오며 친절한 승객들과 나는 대화할 기회가 생기고, 큰딸 역시 둘째 못지않은 인기를 끌었다.

한 살 어린 여자아이 모레나와 친구가 되었고, 할머니 승객 가족과도 가까워졌다. 한 할머니는 큰아이 둘째 아이 모두 어찌나 예뻐하던지, 집에 데려가라면 정말 안고 갈 모양이다. 큰아이의 통역으로, 둘째의 걸음마 관리인으로 나의 긴 기차여행은 쉽지 않은 육아 여행이 되었다. 아내는 아까 담배냄새에 이어 기차 특유의 기름 냄새까지 멀미를 느끼고 들어 누웠다. 

호전적인 따님들 덕에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뜬금없이 대화할 기회가 생긴다. 아이들의 이름 유래부터, 어떤 목적과 일정으로 이곳에 여행 왔는지, 한국의 교육정책까지, 영어가 유려한 할머니가 이것저것 묻는 덕에 나도 뇌 속 깊은 곳에 처박힌 해커스 토익에서부터 성문종합영어까지 끌어내 쥐어짜 내며 대화를 한다. 누가 그랬던가, 영어실력이 늘려면 현지 공원에 심심한 할머니와 대화를 트라고...

“편하게 기차 여행하셔야 하는데, 아이들이 자꾸 간섭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아이들 우는 게 힘든 거지, 아이들 상대하는 건 즐거워요. 우리도 긴 기차여행 지루할 뻔했는데 좋아요”

친절한 크로아티아 할머니들 덕에 6시간의 여행 중 2/3는 채웠던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좋았던 것은 그녀들의 철학이었다.

애들은 애들이야. 마음껏 놀아야지

문득 이 좁은 기차 통로를 반복하여 뛰어다니는 내 아이들이 즐겁게 놀고 있다는 걸 인지했다. 난 육아를 한다며 집에서 아이들과 제대로 놀지 않았던 것이다. 돌도 되지 않은 아이와 어떻게 함께 노는 방법도 몰랐건만, 자유롭게 풀어놓으니 알아서 놀았다. 난 모서리에 부딪혀 다치지 않게 쿠션만 되어주어도 충분했다. 

그렇게 행선지가 뚜렷한 길 위에서, 지루하지 않고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


비 오던 날씨는 스플리트에 가까워질수록 맑아진다. 검색 중에 읽었는데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면 거의 다 온 거란다. 바다가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꽤나 낭만 있는 목가적 풍경이 펼쳐졌지만 둘째를 쫓느라 정신없다. 큰아이는 모레나와 거의 자매처럼 친해져서 깔깔거리며 서너 시간을 기차에서 뛰놀다 스플리트에 당도한다. 우리도 우리지만 모레나와 모레나 엄마도 밤톨이 덕에 긴 기차여행이 덜 지루했겠다 싶다.

큰딸과 새로 사귄 친구 모레나... 두 사람 모두에게 행복한 시간이었길 바래

스플리트의 숙소 host Sandra는 우리와 비슷한 또래의 5살, 8개월 아이 엄마였다. 우리 가족과 조건이 비슷한데, 숙소도 깨끗하고 너무나 친절하다. 이런저런 근황 토크가 이어지다가 뉴스에서 한창 트럼프와 김정은의 북미회담 한 이야기까지 하기에(2018년 6월 중순), 사실 나도 Kim인데 김정은과 형제 거나 친척이라 농담했다. 지금도 Sandra는 친구들에게 “내 숙소에 북한 김정은 형이 묵었었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긴 기차여행 동안 쌩쌩했던 둘째가 늦은 오후 낮잠에 빠져든다. 마실 물과 간단한 식재료를 사러 나서는데, 스플리트는 자그레브와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휴양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공원에선 러시아 월드컵 개막전을 커다란 스크린에서 보여준다. 기차여행의 피로를 까먹으며 다시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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