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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 아빠 Nov 11. 2019

14개월 아이와 14시간 비행기 타기(육아휴직여행)

- 집에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첫 숙소까지

나는 2년간 육아휴직을 내고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현재 복직한 40줄에 접어든 사무직 아빠다. 육아휴직 기간 동안 4개월간 동유럽 여행을 했다. 그 값진 긴 여행의 시작은 긴 비행이었다. 인천공항을 떠나 유럽 대륙에 첫 숙소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이 그 긴 여행 중 겪은 고생의 절반은 되는 듯하다.

여행 가는 당일 아침 7시에 집에서 출발할 계획이었는데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짐을 다 쌌다. 7살, 2살(14개월) 아이 둘을 데리고 가야 했고, 일단 6~8월 3개월은 유럽 대륙에서 버텨보자는 계획이었기에, 준비할 것이 무척 많았다(고 느꼈으나, 지나서 보니 사람 사는 곳에 필요한 건 어지간히 다 있었다)

출발 당시에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만 행선지에 있었는데, 고작 두나라 가는데 무얼 그리 고민했던 건지.. 그리고 짐을 싸기 위해 한바탕 쇼핑과 수차례 냉전이 있었다. 아내와 너무 싸워서 뭐하러 이러려면 여행 가냐부터, 아빠가 짜증내서 지긋지긋 하다까지.. 

서울역 공항열차 직행으로 7시 반 차량에 탑승할 계획이었으나.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많은 부모들이 그러하듯, “이거 챙겼니?”, “저건 해놨니?” 하다가 시간이 대충 아슬아슬하다. 카카오블랙을 불렀는데 큰 세단이 왔음에도 트렁크에 큰 카트 2개와 유모차가 다 안 들어간다. 결국 유모차와 배낭은 조수석으로 가고 뒷자리에 앉은 네 식구는 7시 반 서울역 공항 직행열차를 놓치게 될 시간임을 직감한다. 그러자 기사 아저씨가 인천공항으로 바로 가면 40분이면 된다며 제안을 한다. 열차를 타려고 했던 이유는 둘째 딸이 차 타는걸 답답해할 거란 이유도 있었는데, 차 안이 넓어서인지 내 무릎 위에서 꽤나 안정적이기에 카카오블랙으로 공항까지 달린다. 그렇게 대략 3만 원도 안쓸 공항행 교통비를 12만 원을 쓰면서 여행이 시작된다. 이럴 거였으면 절반 가격에 콜벤을 예약할 걸 아쉬움을 안고 출발을 한다.

창밖으로 아침 희뿌연 미세먼지는 여전했고, 새벽잠을 쫓고 나온 터라 모두들 피곤했다. 그때까지도 ‘이게 잘하는 짓인지...’ 하는 두려움이 더 컸기에, 흐린 날씨처럼 속마음도 회색빛이었다.

인천공항 LOT항공 수속 편에서 분위기 좋게 티켓팅을 했다. 앞에 좌석이 없어 공간이 넓고 베이비박스 설치 가능한 7열 좌석으로 주고, 유모차 도어 투 도어 서비스까지 협조해줘서 출발이 나쁘지 않다 싶었다, 그러나 공항카트를 신나게 타고 가던 큰딸이 급정거에 엉덩방아를 심하게 찧어서 급 우울 해졌다. 꼬리뼈가 다친 건지 앉지도 못하고 걷기도 싫어하고 눈물만 뚝뚝 흘린다.

나영석 PD의 꽃보다 시리즈를 보면 유독 여행 첫날 첫 숙소까지 가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다룬다. 돌이켜보면 대부분 여행의 고생은 그 첫날에 집중되어 있다. 시행착오, 깜빡 잊은 거, 분실, 길못찾고 헤매기, 나도 우리도 이번 여행에서 그 첫날이 관건이었다

탑승게이트에서 유모차를 도어 투 도어로 맡기고(이게 또 문제가 된다) 비행기를 탔는데 한국인 승무원이 없다. 젊은 남자 승무원에게 말한다. 아이가 엉덩방아를 심하게 찧었어요, 타박상 같아요, 바르는 약 좀 주세요, 영어로 설명하는데 내 발음도 문법도 저질이니 못 알아듣는다. 무어라 막 얘기하는데 나도 그의 폴란드식 영어 발음을 못 알아듣겠다. 이렇게 여행이 시작되는구나, 서로 벽보고 얘기하는 듯한 절망감을 느끼다가, 다행히 한국말을 서툴게 하는 여자 승무원이 설명을 듣고 바르는 연고를 가져다준다. 꼬리뼈가 다쳐서 여행을 출발하지 못하는 불상사 없이 인천공항을 이륙한다.

인천에서 폴란드 바르샤바까지 10시간, 경유 한 시간 반, 자그레브 공항까지 1시간 40분. 자그레브 공항에서 숙소까지 차로는 30분, 버스-트램으론 한 시간. 가장 큰 숙제는 10시간 버티기였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잘 지냈다. 큰딸은 항공사에서 준 색칠 도구와 만화영화 삼매경에 10시간이 그냥 갔고, 14개월 둘째는 초반에 2시간 자고 내내 통로를 걸음마하며 다른 승객들에게 간섭하고 예쁨 받으며 보냈다. 전날 잠을 거의 못 잔 아내가 힘들어했다. 나는 둘째가 근 6~7간 동안 통로를 왔다 갔다 할 때 뒤쫓아 다녔다. 그런데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여행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아니었다. 무언가 아드레날린이나 호르몬이 급격하게 분비되어 각성 상태였던 것 같다. 그 긴장 상태가 풀리는데 이틀은 걸린 듯하다. 

끝나지 않을 듯한 비행도 끝난다. 보이지 않을 전역도 결국 오는 군생활처럼. 한국 이모님들이 허리 아프다며 비행기 내 여유공간에서 낑낑 스트레칭하며 둘째를 예뻐하고 좋은 아빠라고 칭찬한다. '아닌데요. 저 짜증 많은 진짜 못돼 처먹은 아빤데요' 아내의 표현이 내 입 밖 바로 앞까지 나왔다가 삼킨다. 이날 비행기에서 워낙 부지런히 통로를 누빈 탓에, 이후 크로아티아에 있는 동안 종종 마주친 한국인 관광객 중엔 우리 가족의 존재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인사를 건네 왔을 정도다.

바르샤바 공항에 경유차 내리면서 도어 투 도어 서비스 신청한 유모차를 달라고 하는데 승무원마다 말이 다르다. 밖에 대기해놓았다느니, 안에서 찾아오겠다느니, 급기야는 바르샤바 공항 직원까지 동원돼서 확인하는데 온데간데없다. 최종 목적지인 자그레브 공항에서 받을 것 같다는 확인 불가능한 답만 받는다. 그럼 처음부터 도어 투 도어라 하지 말고 도어 투 벨트라고 하던가. 유모차 잃어버리면 여행이 힘들어질 텐데 일단 믿기로 한다. 시작부터 불확실한 조마조마함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육아도 그렇다. 정확한 질문과 딱 부러지는 대답이 나오는 시험문제가 아니다. 긴가민가한 불편함이 길어지면 지치는 게 아이를 마주한 성급한 아빠의 속마음이다.

역시 비행기가 답답했구나, 경유지에서 한 시간 남짓 대기하는데, 아이들은 공항을 막 헤집고 다니고 둘째는 못 싼 똥도 싸고 큰애는 같은 또래 러시아 자매와 장난감 인형으로 함께 논다. 유모차를 잃어버릴지도 모를 마당인데, 아이들이 즐거워하니 그제야 살며시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한다.


쌩쌩했던 두 따님도 한국에선 잘 시간에 두 번째 비행기 바르샤바-자그레브행을 타니 꼴까닥 잠들고 피곤에 절어서 일어났다. 실종되었던 우리의 유모차도 안 망가지고 무사히 벨트에 딸려 나온다. 이제 숙소로 가야지, 자그레브 공항에서 우버 택시를 부르는데 20분 후에 온다 하질 않나, 소형차가 예약을 캐치하질 않나.. 결국 공항 앞에 있던 큰 택시로 250쿠나에 가기로 한다. 우버의 두배 값이다. 첫날부터 교통비 지출이 예상금액을 크게 초과한다. 어쩌면 이후 우리의 4개월간 긴 여행도 초기 예산을 아랑곳하지 않고 돈이 깨질 것에 대한 작은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근데 이 큰 택시 기사 할아버지가 숙소 근처 다 와서 샛길로 가더니 막 산동네로 올라간다. 애들은 피곤하다 징징대는데 한 10분은 잡아먹었다. 10분이 아까 비행시간 10시간만치 길다

우여곡절 끝에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첫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좋았다. 무언가 숙소 같지 않고 집 같았다. 물론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고, 오랫동안 밴 담배냄새가 묘하게 났지만 괜찮았다. 호스트 Zrinjka 여사도 친절했다. 원래 옵션에 없는 아기침대도 준비해주었다. 낯선 환경에 피곤함까지 겹친 둘째가 막 울자, "그래, 피곤하지? 네 맘 이해해~"하며 위로의 말도 건넸다.

둘째는 막 울다가 우리 집엔 없는 통 거울과 대화를 시작했고, 큰애는 배운 적 없는 피아노를 연주했다. 짐에 잔뜩 실린 비상식량 중 햇반과 국 종류로 아내가 조리를 하고 밥을 먹는데, 둘째가 그새 말이 늘었다. "주세요! 주세요" 아 배고프니 생존을 위해 오래전 엄마에게 배우고도 안 쓰던 그 말을 한다.

모두 잠든 밤 9시. 다음날 마시고 요리할 물을 사러 홀로 나섰다. 숙소는 Britistan Trg 근처인데, 콘줌 konzum이 다 닫아서 가까운 TISAK에서 물을 샀다. 나온 김에 일리 차 ilica 거리를 따라 혼자 거닐었다. 긴 비행시간의 뻐근함을 뒤로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 무작정 한 시간 넘게 거리를 걸었다. 낯선 환경, 설렘, 기대감, 그런 복잡한 상념에 젖어들었다,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실은 크로아티아 여자들이 키도 크고 늘씬하고 예뻐서 내가 딴 세상에 와 있구나 실감하듯 밤거리를 거닐었다. 아무도 알아보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이방인의 심정을 느끼는 게 제법 괜찮다. 물론 혼자 있을 때 이야기일 뿐, 낮에 아이들과 동행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돌아가는 트램을 타기 위해 티켓을 사러 TISAK에 갔더니 아저씨가 지금은 공짜니 그냥 타란다.(밤 10시가 넘었다) 검표가 없단 건지 그냥 공짜라는지 모르지만 그들을 닮은 이방인은 그렇게 그들 안에 섞여 귀가했다

시차적응이 안되어 네 식구가 새벽에 잠에서 깨고 이른 식사를 하고 숙소 앞 Britistan trg으로 향한다.

첫날부터 푸른 하늘에 청명한 공기를 바란 건 너무 큰 욕심인가.. 일단 Britistan trg의 재래시장 오픈 구경하고 콘줌 konzum에서 먹을거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간다. 아내는 식료품 품질이 좋은데 가격이 저렴하다며 반가워한다. 그렇게 내생에 육아하며 겪은 손에 꼽는 치열한 하루가 기분 좋게 갈무리되고, 본격적인 육아휴직 여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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