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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 아빠 Nov 08. 2019

육아도 여행도 인생도, 일단 짐부터 싸야 한다

- 육아휴직 여행을 결정하기까지, 그리고 준비하기

둘째가 태어나고 시작한 육아휴직 첫 해는 시행착오가 많았다. 아내와 걸핏하면 싸웠고, 큰딸과 이런저런 불신이 쌓여갔고, 둘째 아이도 내 습관적인 짜증을 배워 돌도 안 지난 주제에 신경질이 보통이 아니었다. 매일 후회도 많이 했고 화해도 많이 했으며, 머릿속에서 수많은 가정과 상상이 반복되었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다시 가사와 육아란 루틴의 동굴 속에 들어갔다. 

그렇다고 마냥 집 안에서만 보낸 것은 아니었다. 우선 둘째가 백일도 되기 전에 제주도 함덕에서 한 달 살기를 했고, 6개월이 되었을 무렵 추석을 맞아 제주도 하귀리에서 보름 살기도 했다. 유독 미세먼지가 심해지던 추운 겨우내 아이들은 기관지 천식, 급성 후두염으로 고생을 했고, 그런 답답함을 이겨보자고 코타키나발루에 열흘간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가족 모두가 화목하게 지내자고 시작한 육아휴직이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으니, 그 목표를 찾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느낌이었으나 실제로 근원적인 해결점은 찾지 못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한 해가 흘러 둘째가 드디어 첫돌을 맞이했는데, 큰딸이 폐렴으로 1주일간 병원에 입원을 하고 만다. 가족들끼리라도 소박한 돌잔치를 하려 했는데, 가족이 둘둘 찢어져서 병원과 집에서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7살 큰딸이 폐렴으로 병원에서 일주일간 링거를 맞으며 이산가족이 된 시간... 그것이 큰 전환점이었다

그렇게 육아휴직을 만 1년 채워가는 시점에,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은 육아휴직 아빠를 두고 이렇게 묻는다. "남자분이 육아휴직이라니... 아이들과 소중한 시간 보내고 아내에게 점수 따고 의미 있는 선택을 하셨군요" 

그러면 내 대답은 이랬다. "아니요.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와 최선의 선택으로 이루어 있다죠. 전 평생 모르고 살 수 있었던 저의 단점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가족들에게 주지 않아도 될 상처도 많이 줬고 자존감을 많이 잃었습니다" 설령 십수 년이 더 지나서 그때 그 시간을 미화하는 위선이 벌어지더라도 뇌리에 각인된 그 육아우울증의 처참한 심정을 양보하듯 내려놓고 싶진 않다.


큰딸 태원후, 아내는 한 달 후 크로아티아 자그레브로 출발하는 일정으로 비행기표부터 덜컥 구입한다. 정말 이렇게 집에 처박혀서 함께 지내다간 죽도 밥도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행 준비가 한 달도 채 안 남은 상황에서, 숙소부터 동선, 짐 싸기 등등 아이들 둘을 데리고 가는 여행에 대한 고민이 태산이었다. 설렘보다 두려움이 더 앞선 이상한 여행준비였다. 우선 비행기는 근 10시간은 탈 텐데 아이들이 잘 견뎌줄지부터, 이제 14개월된 아이가 먹는 건 괜찮을지 아프면 어떡하지? 괜스레 긴 일정으로 집에 돌아가자고 아이들이 징징 대지는 않을지, 안전은 보장이 될지 등등 벌어지지 않은 공포가 유희를 잠식했다.

그저 막연한 기대라면 그래도 여행은 결과적으로 옳았다는 것이었다. 혼자서든, 아내와 함께든, 큰딸 하나일 때 다닐 때든, 그러다 둘째가 합류해서 한 짧은 여행이든, 힘들어도 여행은 늘 좋았고 많이 배웠었다. 그래서 돌아올 시기에 구애받지 않고 떠나기로 한다. 혹시 아이가 힘들어하면 단 열흘만에도 돌아오는 비행기 편을 구하자고, 만약 오래 있을 수 있다면 돌아올 일정 고민하지 말고 즐기자고 말이다. 육아휴직을 낸 남편과 프리랜서지만 사실상 경력단절녀인 아내가 누릴 수 있는 일생일대의 사치였다.

둘째 아이는 출국하기 열흘 전에야 비로소 분유를 끊었다. 기저귀야 현지에도 애들은 크니까 살 수 있으리라, 먹는 거나 자는 거나 이동하는 문제 모두 숙제처럼 부담되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안전한 게 최우선 과제였다. 상비약도 챙기고 어린아이와 장기여행을 다녀온 분들의 블로그를 계속 검색해서 빠진 목록을 채워나갔다.

아내는 숙소를 검색, 예약하고, 짐을 위해 목록을 작성하고 캐리어를 포장했다가 풀었다를 반복하다가 출발하는 날 새벽 4시에야 비로소 짐 정리를 마쳤다. 육아도 여행도 인생도, 짐 챙기기를 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교통편, 통신, 재정 운영을 맡았고 길게 고민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상 두세 번의 검색으로 대부분 확정했다. 렌터카부터 유심칩 구매, 기차 이동, 우버 활용, 해외에서 사용할 직불카드와 신용카드 준비 등, 오랜만에 장기로 여행을 가고, 유럽 방문은 근 6년 만인데 기술의 발달 덕에 여행은 의외로 현명하고 간편해진 걸 느꼈다. 

매번 여행을 떠날때면, 메모장을 쓰고 수정하고 줄쳐가며 준비를 한다. 그렇게 짐싸는건 쉽지 않다

큰 걱정 중 하나가 둘째 아이 식사 문제였다. 막 분유를 끊고 죽을 먹고 있는데, 타지에서 입에 안 맞는 죽을 거부하면 이를 어쩌나 경우의 수를 둬가며 유럽에서 갓 돌 지난 아이들이 무얼 먹는지까지 꼼꼼하게 찾아봤다. 지나서 생각해보면 다 쓸데없는 고민이었거늘, 그땐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 리스크였다.

나는 한번 결정하면, 어지간하면 그 직관을 믿고 밀어붙이는데, 아내는 다 결정했던 여행루트를 다시 한번 갈아엎는 등 시행착오와 고민의 시간을 길게 두는 스타일이다. 그렇게 준비과정 한 달 동안도 어찌나 많이 다퉜는지, “이럴 거면 여행 왜 가냐? 그냥 한국에서 싸우자!”라고 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예약했다가 취소한 숙소와 교통편 중엔 환불수수료까지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돈 아낄 거였으면 여행 가지도 않았지, 아니 돈이 중요했으면 육아휴직 신청하지도 않았지. 그렇게 각오한 지출을 초과하며 여행은 준비되고 실행되었지만, 신기하게도 그 시간을 돌이켜 돈 아깝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렇게 육아휴직에서 육아우울증으로 번지고, 아이들의 병원 치레로 가족들의 화목함을 잃어가는 즈음에, 조금은 충동적으로 네 식구의 동유럽 장기여행이 시작된다. 그 시작은 짐을 싸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네 식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짐은 카트 2개, 배낭 2개면 충분하다고... 아! 유모차와 아기띠는 별도로 추가하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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