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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 아빠 Nov 12. 2019

육아휴직 아빠, 유럽의 길 위에서 실마리를 찾다

- 시차 적응하며 자그레브 올드타운 아침 산책, 그리고...

언젠가 이 세상의 모든 아침을 나와 함께 해줘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 코나 (Overlap, 1996년)


아내에게 프러포즈하며 시작했던 그 마음, 그리고 가족이 탄생하는 순간의 마음이다. 육아휴직 이후, 둘째 아이 잠드는 순간과 아침을 맞이하는 순간을 매번 함께 했다. 아름다운만큼이나 부담스러운 책임감이 담긴 그 말이다.

그런 크나큰 다짐이 흘러, 늘 함께 하는 육아의 다리를 건너더니, 지금은 한껏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크로아티아에 도착하고 1주일간 자그레브에 머물렀다. 7살, 14개월 아이 둘과 긴 여행을 함께 하는데 서두를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근 1주일을 죽 시차 적응을 했다. 해가 지기 전 저녁에 피곤함에 곯아떨어졌고, 새벽 동트기 전 일어나 아침밥을 먹었다. 둘째 딸은 야채죽을 이유식처럼 해서 주었는데 우려와 다르게 잘 먹었다. 그리고 새벽 산책을 나섰다.

이른 새벽부터 자그레브 빵집들은 문을 연다. 우리 돈 몇백 원 수준의 빵이 중독될만치 맛있다. 아내의 분석으론 ‘콘줌 konzum’이라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사는 빵이 더 싼데 맛도 괜찮단다. 우리네 김밥 및 분식집보다 다양한 종류의 동네 빵집이 즐비한데 슈퍼마켓 빵맛이 결코 아쉽지 않다. 

낮이면 덥고 붐벼서 정신없는 일리차 거리ilica 가 이렇게 평온할 수 없다. 여행지의 새벽은 낮과 밤보다 아름답다. 모두가 잠에서 깨거나 호텔 조식을 먹는 시각, 그 도시의 또 다른 맨얼굴을 마주한다

이른 새벽 문을 연다는 돌라츠 시장. 우리가 상인들보다 더 일찍 왔나 보다. 흥정하면 가격이 떨어지겠지만 보이는 대로 고르고 부르는 대로 지불하니 역시 콘줌 konzum이 더 싸고 품질이 좋단다. 체리, 사과 등을 사고 성당으로 이동한다. 소소하게 돈을 주고 잔돈 받는 것을 큰아이 밤톨이에게 맡기니 참 쑥스러워한다.

자그레브 대성당. 일요일 아침 7시에 미사가 시작된다. 단체관광객으로 이뤄진 깃발부대가 당도하지 않은 이른 시각, 성당 앞 넓은 광장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혹 7살, 2살 즈음 아이와 유럽여행을 계획한다면 이른 새벽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넓은 광장의 위치를 꼭 확인하라고 권하고 싶다. 해가 쨍한 여름 낮에는 그늘이 짧고 단체관광객이 인산인해를 이루기에 아침 산책만큼 좋은 게 없다.

걷다 지치면 이제 막 문을 연 카페에서 커피 한잔에 디저트 정도를 주문하고 오면서 사온 빵과 과일을 아이들과 나눠 먹는다. 그 시간까지도 거리는 조용하다. 해가 중천으로 오를 때쯤이면 관광객과 현지인으로 북적일 테지만, 우리 가족은 ‘비수기’ 시간대를 이용했다. 

걷다가 쉬다가 뛰놀다를 반복하며 자그레브 구도심 산책의 하이라이트 성 마르크 성당에 도착한다. 레고 성당으로 유명하다는 이곳의 매력은 구도심의 고지대에 넓은 광장을 끼고 위치한 것이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펑온함이 생긴다. 성당 우측에 국회, 좌측에 대통령궁인데, 둘째를 풀어놓으니 자꾸 국회 건물에 들어간다. 

둘째가 태어난 이후, 육아휴직을 내가며 내 집에서 아이들을 봐왔건만 그 시간이 의미 있고 소중하게 느끼질 못했다. 그런데 길 위에서, 낯선 타국 땅에서 아이들과 짐을 싸들고 함께 여행을 하니, 육아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눈에 넌지시 이 문구가 들어온다.

life is a one time offer, use it well


한국에서 긴 겨울 집에만 있다가, 봄이 오자 미세먼지 공습으로 날이 따뜻해졌음에도 집에서 대기를 해야 했다. 두 아이들에게서 아이다움을 주지 못한 게 미안했었다. 어찌 보면 아내와 과감하게 유럽여행을 강행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아이들이 마음껏 햇볕을 받으며 땀 흘리고 놀게 하고 싶었던 것도 하나 있었다.

모처럼 유럽 여행을 왔다는데 구애받지 않고 놀이터를 찾아갔다. 구글 지도에서 igralište을 검색하니 숙소 가까운 곳에 각기 다른 놀이터를 찾아다니며 놀았다. 세상 어디든 아이들이 자란다면 놀이터는 있다. 낮시간에는 아무래도 학교에 가는 시간이니, 큰딸은 저녁이 되기까진 놀이터를 찾은 동생뻘 아이들과 논다. 그게 되레 친근하고 좋았다. 

자그레브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아이는 '야히야'라는 Arabic 이름을 가진 혼혈 남자아이였다. 우리 나이로 4살인데, 큰딸과 비등하게 크고 건강했고 아빠, 남동생과 놀러 나왔다. 아빠 말로는 엄마는 흑인 농구선수다(그만큼 크단 건지 진짜 농구선순지는 모르겠지만) 격 없이 한참을 큰아이와 뛰어노는 아이들도 있고, 2-3살 즈음의 아이들은 둘째 아이에게 호기심을 보이고 넘어뜨리기도 하며 놀았다

둘째는 여행 오기 직전 남산 백범광장 외출 때 얻은 장염으로 열흘을 고생했는데(덕분에 분유를 뗐다) 유럽 땅을 밟자 초반엔 놀이터에서 돌멩이를 입에 넣고 담배꽁초 만지고 해도 소화기관에 아무런 탈이 없었다. 역시 아이들은 밖에서 흙 만지고 흙 퍼먹으며 자라야 하는 건가.

여행 초반부터 완급조절이 중요했다. 어쨌든 둘째는 낮잠을 두어 시간 자야 하고 너무 많이 걷거나 너무 늦게 귀가해도 피곤해서 안된다. 덥석 "가자! 빨리! 서둘러~"했다가 곤혹스러운 상황이 수시로 생겼다. 길 위에서 자유로웠지만, 아프거나 지치면 안 된다는 강박은 늘 있었다.

여행을 떠나온 후, 일주일쯤 지났을 시점에 아내가 문득 말했다

“그래도 우리 나와 있는 동안 좀 더 행복해진 것 같지 않아?”

여전히 호흡이 다르고 오해가 생겨서 마음 상한 건 한국이나 크로아티아나 똑같았다. 아내도 큰딸도 마찬가지다. 둘째는 하고 싶은 게 더 뚜렷해지니 떼쓰고 짜증 낼 땐 이길 수가 없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여행 당시에나 불평과 신경질이 가득한 못된 불량 아빠다. 집이 답답하다고 떠나온 여행이라지만 여전한 건 여전한 거지, 근데 좀 더 행복해진 건 맞는 것 같았다. 남은 여행 기간 부디 건강하길, 그리고 설령 슬럼프가 와도 조금 더 행복한 우리라는 마음 변치 않길 기도하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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