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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 아빠 Nov 20. 2019

늘 아이들과 특별한 순간을 기록하고 싶다

- 슬로베니아 보힌 호수 매력에 빠지다(육아휴직여행)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거의 매일 사진을 찍었다. 성장하는 과정을 내 눈으로만 기억하는데 자신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당시 스마트폰을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늘 손이 닿는 곳에 디지털카메라를 두고 수시로 아이의 모습을 기록했다. 그런데 둘째는 첫째에 비하면 촬영 자료가 턱없이 적은 편이다. 큰 아이만큼 신선함이 적은 탓도 있겠지만, 육아휴직까지 내고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 있으니 사진 찍는 행위가 번거롭고 귀찮았던 것이다. 두고두고 둘째에겐 미안할 일이지만 만 1세가 되기까지 예쁘고 해맑은 모습을 담아내는 것에 게을렀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유사한 경험을 한다. 둘 이상 키우는 경우, 성장 기록이 적다는 엄마들을 많이 봤다. 큰 아이 떼는 앨범 하나 만들려면 사진을 고르고 골라야 했는데, 둘째는 앨범 하나 채우려니 사진이 모자라다고 했다. 첫째 아이는 대외적으로 돌잔치를 하더라도, 둘째는 가족들과 조촐하게 식사하고 끝내는 경우도 많다. 이걸 차별이라고까지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현실에서는 이렇게 감정의 차이와 결과물의 차이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내 아이는 첫째냐 둘째냐와 무관하게 특별하다. 그리고 의미 있는 순간, 잊을 수 없는 광경은 기록하고 싶다. 기념일, 이름 붙은 날, 가족들이 많이들 모인 날, 특별한 외출한 날이 아이 돌보며 셔터 소리 내는 손이 바쁠 날들인데, 뭐니 뭐니 해도 여행만 한 게 없다. 일상과 다른 멋진 배경에 행복한 아이의 표정을 함께 담아내면 돈으로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이 된다. 

마음 같아서는 커다란 렌즈 딸린 장비나 하다못해 미러리스 카메라라도 챙겨서 여행을 떠나고 싶었으나, 7살, 14개월 두 딸을 돌보면서 사진 찍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걸 알기에 접었다. 그나마 스마트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가 넣었다가 하며 촬영하고 아이들을 쫓는 것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래도 매일 찾아갈 수 있는 집 근처도 아니고, 일정만 맞으면 떠날 수 있는 동아시아 지역도 아니고, 출근으로부터 자유로운 육아휴직 기간 중에 욕심내서 찾은 유럽인데 이 순간을 내 눈으로만 담아두는 건 직무유기나 다름없었다. 그랬기에 슬로베니아 보힌 호수처럼 아름다운 곳을 찾으면 이 특별한 순간의 감성과 영원히 남길 기록 모두 포기할 수 없었다.


슬로베니아 보힌 호수, Bohinjsko jezero, Lake Bohinj는 우리가 머무는 기간 동안, 하루에도 여러 차례 다른 빛깔을 보였다. 산악지대를 끼고 수시로 풍광이 변했다. 그래서 흐린 날이라도 일단 수영복을 챙겨야 했다. 언제든 날이 환해질 수 있고 물놀이할 수 있었다.

날이 조금 쌀쌀하니 “적당히 들어가자~” 하다가, “애라~ 모르겠다! 그냥 들어가 놀아라~” 했다가, 결국 팬티만 입고 풍덩! 보힌 호수에 몸을 맡겼다. 바닥이 깨끗하게 비치는 투명함에 무리 지어 헤엄치는 물고기 보는 것도 신기했고 저 멀리 설산과 구름을 끼고도 아래에선 물놀이할 수 있는 상황이 놀라웠다. 둘째 아이는 이곳 보힌 Bohinj에 오기 전까진 어지간한 물에 발을 담그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서슴없이 들어간다. 여행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는 조금씩 더 자라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임산부는 만삭인데 배만 뽈록 나왔다. 둘째가 뭔가 아는 듯 임산부 여인과 그 남편 앞에서 재롱을 부린다. 엉겁결에 그들과 얘기를 시작했는데, 젊은 슬로베니안 커플이었다. 보힌 호수에서 제일 멋진 포인트라며, 밤낮으로 와서 수영한다는 그들은, 블레드는 관광객으로 북적이니 별로 추천하지 않는단다. 

조건만 맞는다면 여기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어. 그래서 당신들이 부러워. 여긴 아이들이 자라기에 정말 좋은 나라야

진심으로 이곳이 좋다고 얘기하는데, 나에게 job을 구하고 이주하란다. 내 영어는 그렇게 유창하지 않다고 했더니, 충분하단다. 그럴 리가, 용기 내라 해준 립서비스겠지. 슬로베니아도 젊은이들의 실업률이 높은 편이고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 중 많은 이들이 더 좋은 보수를 위해 독일로 간다. 그런데 이 친구 말이 슬로베니아가 아이 키우기 좋아서, 자기 친구들 중 좋은 보수로 이스탄불이나 독일로 떠났다가 아이 낳고 다시 돌아온 경우가 많다 한다. 

슬로베니아 국토가 전라도 정도라는데, 이런 호수가 영토 한가운데 있다는 건 축복이다


보힌 호수 Bohinjsko jezero, Lake Bohinj의 매력은 도처에 다양한 activities가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두 아이를 돌보느라, 반의반도 즐기지 못한 건 아닐까 아쉽기도 하다

보힌 호수 첫날부터 큰아이는 배를 타겠다고 했다. 호수 끝에서 끝으로 1시간마다 다니는 작은 유람선이 있기에 그거 얘기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카누를 타겠다는 것이었다. 실상 2인용이라도 혼자 노 젓겠구나, 큰아이 4살 때 태국 크라비에 가서 당시 세 식구가 탄 카누를 사실상 혼자 고생해서 파도를 헤쳐나간 경험이 떠올랐다. 그런데 호수가 워낙 잔잔해서 힘 안 들이고 배는 쭉쭉 나갔다. 카누를 대여해주는 샵에서 호수까지 끌고 가는 게 힘들었을 뿐... 다행히 어린 딸의 도움 못 받고 혼자 낑낑거리며 카누를 끌고 가는 처연한 아시안을 중년의 유러피언 신사가 도와주어 겨우 옮겼다.

천국의 하늘 호수가 따로 없었다. 스마트폰을 물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꺼내서 촬영을 하는데 한 장 한 장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다. 둘째 아이가 낮잠만 길었어도 호수 반대편 끝을 찍고 돌아왔을 것 같다.

그리고, 멋진 절경을 볼 수 있는 곳. 보겔 Vogel. 보겔은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데, 겨울엔 스키를 타기 위해 활용되는 듯하다. 여기 오니 보힌에서 처음으로 한국 단체관광객들을 마주친다. 그런데 이곳 보겔 Vogel은 아내와 큰아이만 올라가서 한 시간 놀다 내려왔다. 둘째가 낮잠 삼매경에 빠져 나는 차 안에서 대기해야 했다. 동물 먹이 주는 거만큼 동심을 원초적으로 돌리는 게 또 있을까. 이 높은 산꼭대기에 염소우리가 있었다. 사실 염소우리는 산꼭대기 아니라 호수가 바로 앞에도 있었다. 1유로 내고 먹이 뽑기를 하면 염소들이 알아서 밥 내놓으라고 우리 구멍으로 머리를 내민다. 염소우리에 놀이터를 엮어놓아서 언니가 염소 챙길 때 둘째 아이는 그네를 타며 놀았다

그리고 암벽등반체험. 염소우리 옆에 떡하니 암벽등반코스가 있고 10유로에 10분 정도 체험 가능하다기에, 7살밖에 되지 않은 큰아이가 덜컥해보겠다고 한다.

그런데 암벽 앞에 가는데 오래간만에 흔치 않은 동양인 여성이 서양인 남편, 혼혈아이와 함께 암벽 등반을 마치고 장비를 챙기고 있다. 운동으로 인해 다부진 어깨와 태닝 한 피부가 교포스럽지만 영락없는 한국인 얼굴이기에 큰아이가 태연스럽게 한국어로 말을 걸려다가, 느낌이 애매한 걸 느끼며

where are you from?

큰아이가 여행 중 배운 몇 안 되는 영어로 묻자,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독일에서 왔단다. 어색함을 무마하고자, 내가 "Woher kommen Sie?", "Ich komme in Seoul"해가며, 짧은 독일어로 웃음을 주며, 그들의 2살 반 혼혈아들과 둘째 딸이 어울리는 걸 보는데, 그녀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실은 한국에서 태어났어. 그리고 독일 부모에게서 자랐어

그녀는 입양된 한국계 독일인이었다. 난 태연한 척 "그래서 내 아이가 당신이 한국말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정도로 마무리했다. 얼굴은 서울 지하철에서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20대 한국 여성인데 체격은 훨씬 다부진 그녀를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아들이, 아내 표현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에서 만난 고려인 3세 외모를 닮아 굉장히 이지적이었는데, 여행 중에 마주한 아시아계 혼혈이나 아시아계 유러피언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도 들었다. 이날 저녁, 큰아이에게 '입양'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알려주었다. 여전히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 같진 않지만, 세상엔 우리 네 식구 같은 유형의 가족이 전부가 아니고, 다양한 구성이 존재하고 이상한 게 아니란 걸 알게 해 준 것이 소박한 소득인 듯싶었다.

그리고 큰아이는 설레는 마음으로 암벽등반을 했고, 의외의 재능도 발견했다. 겁이 많은 줄 알았는데, 요령을 터득하자 척척 올라가는 걸 보니, 이 맛에 아빠하고 딸바보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파트 5층 높이까진 오른 듯했다. 칭찬을 많이 했더니 한참이 지난 요즘도 언제 암벽 등반하러 가보자고 생뚱맞게 요구하곤 한다

트리글라브 Triglav 산을 끼고 있는 보힌 호수는 하루에도 날씨가 수도 없이 바뀐다. 이곳에서 만난 현지인 말이 각각 다른 3개 예보를 보고 와도 잘 모른단다. 심지어 나도 기상예보를 tv로 보는데, 맑고 흐리고 비도 옵니다 라고 하니 일기예보는 그저 형식적인 연출로만 느껴졌다. 여하튼 볕 좋을 때는 풍경이 다 그림이다. 차로 호수 주변과 숙소를 오가며 중간에 세워놓고 사진 찍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아이들 챙기느라 그 모든 순간을 담아올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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