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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 아빠 Nov 25. 2019

편견 없이 누구와도 친해질 수 있어, 아이도 어른도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한달살기 시작, 하고 싶은 건 늘 많다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 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길 위에서의 생각 - 류시화 

얼마나, 어디까지 걸어가면, 그제서야 우린 충분히 걸어왔다고, 그 길을 함께 걷던 사람들에게, 감히 쉬어가자고 제안할 수 있을까? 

그리고 휘휘 넘어가는 갈대처럼, 떠나는 순간의 설렘과 준비하는 과정의 의지와는 별개로 여행 중에 또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버린다. 지치고, 지루하고, 목적도 상실한다.

육아휴직여행이란 이름으로 유럽 장기여행을 온 후, 짧게는 이틀 길게는 일주일 정도 머무르며 짐을 풀고 다시 싸는 방랑객의 삶을 한 달 정도 지내고 나니, 집에 머무르며 일상을 꾸려가는 안정을 꿈꾸게 되었다. 그렇게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한달살기를 시작했고, 그 출발의 거창한 기대감에 비해 기대치 않은 지루함과 또 다른 자유와 신선함에 대한 갈망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한달살기, 정확하게는 4주를 살았던 숙소는 구시가와 걸어서 10분 거리인 ilirska ulica, hrvatski trg였다. 주택가였고, 가까이에 종합병원도 있었고, 각종 놀이터나 공원도 인접해서 한 선택이었다. 가족친화적 환경을 찾았는데, 호스트 보리스는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 또래라서 장난감이 있고 좋았다. 심지어 쓰고 남아 뜯지 않은 기저귀까지 제공받았다

사실상 제일 먼저 한건 말라 울리차Mala Ulica라는 아이들을 위한 실내놀이터 혹은 보육시설에 연간 등록을 하고 카드를 발급받은 것이다. 아이 둘 데리고 한번 갈 때 4유로 드는데, 연간은 60유로... 즉 15번만 가면 본전이다 싶었다. 28일 살면서 15번 안 가겠나 해서 거금 60유로를 썼다. 그런데 하나의 패턴처럼 뚜렷한 계획이 없으면 "말라 울리차나 가자~"하며 일정을 진취적으로 짜지 못하게 되는 단점도 생겼다. 그래도 큰아이에겐 마음껏 놀 공간, 우연찮게 친구를 만들 기회까지, 소중하고 고마운 곳이다. 그리고 매일 5시에 미술활동도 있고, 주말엔 오전, 오후 두 번 특별한 미술활동이 있었다. 

이곳에서 큰아이는 많은 인연들을 만났다. 우선 큰아이와 한참 어울려 놀고 친해진 프랑카Franka와 우르슈카Urska. 큰아이를 보며 너무 귀엽고 예쁘다며 놀아준 언니들이다. 내 눈엔 니들이 더 이쁘다 얘들아, 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은 못 하고 영어가 서툴러 구글 번역기로 서로 하고 싶은 말을 주고받았다. 

큰아이가 친해진 언니 파예Faye.. 엄마가 슬로베니아인이고, 아빠가 스페인계 프랑스인으로 추정되는데, 불어, 영어, 슬로베니아어도 하고 스페인어도 좀 한단다. 내가 번역된 슬로베니아어로 “Ali govorite Angleško?”하며 “영어 할 수 있어?”하고 묻자,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하는 거니?”라고 영어로 되묻는 언어 천재였다^^ 

동갑내기 친구 로잘리아는 주말 미술 선생님 딸이다. 서로 취향이 비슷한 걸 대번에 알아보더니, “집에 가서 밥 먹자~”란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땀 흘려 뛰어놀았다.

말라 울리차 외에도 아이들은 오전 11시쯤 동네 놀이터에 가면, 인근 보육시설에서 나온 둘째 아이 또래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교사들도 우호적이라서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모래 장난하며 어울려 놀았다

사실 말라 울리차Mala Ulica에서 나 역시 많은 유럽인 부모와 뻔한 대화를 나누며 소통했다. “애 몇 개월이에요?”, “여기 어떻게 왔어요?”, “슬로베니아 좋아요?”등등 이미 마르고 닳도록 한 얘기를 자주 해도 그 덕에 영어도 늘고 육아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되레 한국에서 지난 일 년간 집에 박혀 둘째 돌보며 하루 종일 아내 말고는 말 걸 사람 없던 시절이 떠올랐다. 영양가 없는 소소한 대화라도, 그렇게 누구든 얘기 나누며 사람을 마주하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타국에서 짧은 영어 써가며 절실히 느꼈다.


류블랴나는 자전거 천국이다. 나는 둘째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큰 자전거 가게부터 작은 중고가게, 또는 인터넷 중고나라 등에서 아내를 위한 성인 자전거와 큰아이를 위한 보조바퀴 달린 자전거를 구하러 다녔다. 그런데 사이즈가 맞지 않던가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싼 등 조건이 맞지 않아 헛물만 키다 끝났다. 

아내도 관악기를 배우거나, 요가 강습에 참여하려는 시도를 포함해서 정기적인 문화강습을 찾아다녔으나 모두 하지 못했다. 가장 핫한 여름휴가 피크 시즌이란 암벽을 만나, 우리의 한 달 살기 주요 일상은 말라 울리차라는 아이들 실내 놀이터에 가는 게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건 많지만 하지 못하는 게 많아지면서 한달살기의 아쉬움이 쌓이고 긴 여름의 정체기가 시작되었다. 이건 아내에게 굉장히 큰 악재였다.

강변 따라 Petkovškovo nabrežje에서 넉살 좋은 큰아이가 조형물에 매달려서 놀다가 알게 된 영국인 알렉, 그리고 잘생긴 브라질/프랑스인 스벤, 관광 온 가족의 아이들끼리도 언어와 상관없이 친해져 두어 시간을 뛰어놀고 헤어지곤 했다. 

그리고 큰아이 기호에 딱 맞는 곳을 찾았는데 이른바 ‘과학실험하는 집’(The House of experiments)이었다. 남들은 한 시간 정도 체험하고 놀다 나가는데, 큰아이는 거의 3-4시간을 이 안에서 실험하며 놀 수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이샤’는 먼저 큰아이에게 함께 실험하고 놀자고 다가왔다. 위로 두 언니가 이 실험의 집에서 시큰둥했던 게 이유였을 거다. 아빠의 직장 따라 영국으로, 독일로 이사를 다녔다는 이샤는, 역시나 아빠가 슬로베니아에 일이 있어서 아빠 엄마 삼자매가 함께 여름휴가를 류블랴나에서 보내고 있다 했다. 인도 계열 같은데 아빠가 꽤 유능하신가 보구나 싶었다. 이샤 엄마가 이런저런 수다를 시작했는데, 영국에서 살 땐 아이 셋 다 너무 어려서 더블 유모차 끌고 다니며 고생 많이 했다고 말한다. “휴가가 휴가가 아니었겠네요”, 애 키우는 고생은 전 세계 공통이지, 짧은 나의 영어에도 깔깔 웃는 이샤 엄마를 보며, 모국어는 장황해서 지루하지만, 영어는 쉬운 단어만 짧게 해서 유머러스한 동양 남자가 된다는 아내의 표현을 떠올리며 약간의 자신감이 생긴다(늘 그런 건 아니다. 어쩔 땐 "너 영어 너무 못해서 못 알아듣겠으니, 여기 써봐"하는 경우도 생긴다)

여행을 시작하며,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인종과 국가가 달라도 편견 없이 누구와도 친해질 수 있다는 걸 경험하길 바랬다. 그런데 그것은 아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가능하단 걸, 아이를 통해 경험했다. 감사할 일이다.

그리고 둘째 아이가 밥 먹는 입이 슬슬 짧아지기 시작하더니 피곤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큰아이에겐 사실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매일 미술활동이 있고, 또래 친구들이 있는데 가끔 절친 인양 가까워지는 일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찰나에 둘째가 아플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아내는 생각보다 일찍 류블랴나에서 흥밋거리가 소진되었다.

아무도 정답은 없다. 머무르면 떠나고 싶고, 떠나면 잠시 머무르고도 싶다. 거처를 쉼 없이 옮기니 잠시 정착하고 싶어 한 달 살기를 했는데, 어딘가 진득하니 엉덩이를 붙이니 매일 새로운 것을 보던 나그네의 삶이 그립다.

한달살기가 시작되니 그동안 없던 청소, 빨래, 설거지 등으로 인해 아내와 나는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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