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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 아빠 Nov 26. 2019

꼬박 3일은 아파야 낫는다

- 류블랴나 한달살기, 유럽여행에서 아이가 아플 때

시행착오 없이 사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내 아이가 돌도 주어 먹고, 넘어져서 피도 나고, 엉뚱한 일 벌여놓고 낑낑대길 수십 차례 반복하겠지만, 매 순간이 삶에 대해 질문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그 또한 의미 없지 않다.

겪어봐야 알게 되는, 내 아이 아플 때 이야기이다. 인간은 매 순간 나 자신을 바라보며 살지만, 아이가 아플 때만큼은 세상 모든 아이 아픈 부모의 근심 걱정으로 대기는 눅눅해져 있는 듯하다.


류블랴나 한달살기가 열흘쯤 지나가던 금요일 오후 둘째 아이가 미열이 나더니, 토요일 오전 본격적으로 고열이 났다. 챙겨 온 싸구려 휴대용 귀체온계가 37도 후반대로 나오는데, 분명 38도대에 들어선 것이다. 해열제를 챙겨주고 미지근한 물수건으로 닦아주며 주말 밤을 보내야 했고, 결국 일요일 오후에 류블랴나 보건소-유아병동을 찾아갔다.

여행 떠나기 전, 갓 돌이 지난 둘째는 예방접종이 많았다. 3-4주에 걸쳐 접종하는데, 기간 중에 후두염도 앓았고, 장염도 앓았다. 열도 났다가 가라앉고, 잠도 설치고, 피부발진도 있어서, 돌치레 제대로 한다 싶었다.

그 와중에 여행은 가기로 했으니, 동네 소아과 의사에게 장기여행 가니 상비약 좀 처방해달라는데, "참 용감하시네요. 갓돌 지난 아이와 유럽 장기여행이라니..." 하며 약 처방을 안 해주는 의사를 보며, ‘두고 보자 여행 다니면서 안 아프고 건강하게 잘 다니마!’ 다짐한 바 있다. 

아쉽게도 내 다짐은 깨졌지만,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서 둘째 아이가 고열로 3일간 고생했던 일을 제외하곤 아이들은 여행 내내 건강했다. 여행을 결심하게 만든 큰아이의 폐렴 입원처럼 기관지 관련 질환은 근처에도 안 갔고, 둘째는 신경질적으로 팔을 벅벅 긁는 알레르기 증세도 없어졌다. 이렇듯 좋은 공기에서 마음껏 뛰노는 것만큼 건강에 좋은 건 없단 걸 증명하던 터였기에, 둘째가 열이 난 건 아쉬움이 컸다

한달살기 숙소 host 보리스에게 아이가 아플 경우를 물었는데, 괜히 야밤에 응급실 가지 말고 유아 보건소에 주중 주말 없이 7am~7pm이니 거길 가라기에, 열이 가라앉을 기미가 없어,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보건소를 찾았다. 아이 환자는 별로 없어 대기도 없었고, 간호사가 이것저것 묻는 거 메모하고, 의사를 만났는데, 인상 좋은 푸근한 할머니 의사 선생님이다. 그런데 영어가 많이 서툴다. 젊은 슬로베니아 사람들이 대부분 영어가 매우 뛰어난데, 나름 공부 잘해서 의사가 되셨을 텐데 영어를 너무 못해서 의외였다. 우리에겐 오히려 좋았다. 서툰 영어로 아이의 증상과 원인을 찾으며 얘기 나누다가, 고열 외에 아무 증상이 없으니 피검사하자고 하여 손가락 찔러서 피검사하고(많이 울었다) 원인불명의 바이러스이니 해열제 먹으면서 이틀만 기다려보자 한다. 약 처방도 없고 그냥 집에 가서 이부프로펜을 시간 맞춰서 고열이 날 때만 복용하라고 했다. 한국이었으면 항생제 내립다 때려 넣었을지 모를 일인데, 그저 아이들은 꼬박 3일 아프면 그냥 낫는지 기다리라 한다. 

보건소 분위기는 좋았다. 낯선 이방인에게 친절히 예우를 갖췄고 차분했다. 책 자판기에 인체의 신비 같은 책을 사겠다고 큰아이가 조르고 졸라서, 도서관에서 찾아보고 한국 가서 사는 걸로 타협했다. 그 외 병원 자판기도 제품들을 싸게 팔았다

여행을 시작하며, 오지에 가지 않는 이상 어딜 가나 병원은 있고 의사도 있고 애들도 있으니 아파도 당황하지 말자 했다. 물론 아이가 아프니 여행이고 구경이고 뭐고 올스톱, 워낙 칭얼거려서 아기띠 하고 달래느라 체력 방전, 짜증지수가 최대치로 오르는 상황이 반복되었지만, 이건 여행이 아니라 한국이었어도 생길 일이었다.

아내가 꼼꼼히 챙겨 온 비상약은, 개봉하지 않고 고스란히 고국으로 돌아가길 바랬지만, 결국 해열제와 현탁액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보건소 비용은 18유로 나왔고 여행자보험을 통해 23,000원 정도 환급받았다

어디 돌아다닐 여건은 안되고 아이는 아프지만 답답해하니 집 앞 교회에 앉아 열을 식혔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도와주세요” 없던 신앙도 생기는 기적을 아이가 아프자 경험한다. 둘째가 아픈 동안 큰아이는 일상 거의 전부를 양보해야 했다. 원래 계획했던 피란 Piran 여행도 일주일 가량 미뤘다. 아내와 보다 현명하게 한달살기를 보낼 궁리를 하며 다투기도 하고 책임을 물어가며 공방을 벌였는데, 뚜렷한 결론을 내진 못했다. 서울에 있었어도 그랬을 일이다. 우리는 류블랴나 한달살기 이후를 계획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둘째는 스스로 바이러스를 이겨내고 열은 꼬박 3일 나고 멈췄고 동시에 설사도 멈췄다. 조금 칭얼대긴 했지만 차차 좋아졌다. 그렇게 좋아지는 아이의 모습이 기특하게 느껴진다. 한 열흘 여행 나왔다가 이렇게 아팠다면 그냥 여행 자체가 날아간다 봐도 된다. 다행히 우리는 긴 여정이고, 한 번쯤 겪을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떠난 여행이다. 그렇게 우리는 8월, 우리 여행의 세 번째 달로 접어들고 있었다

둘째가 열이 내리고 컨디션을 회복하자, 우린 다시 길 위로 나서기로 한다. 다가올 주말에 예정대로 피란 Piran 여행을 갈 준비를 하고, 그전까지 박물관 등 가고 싶은 곳을 찾아 나선다.

당연한 얘기지만, 7월 말-8월 중순은 유럽도 여름휴가 성수기다. 곳곳에 유럽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로 그득하고, 현지인들은 산으로 바다로 휴가를 떠난다. 날도 무척 더워서 움직이는 동선에 그늘을 안배해야 지치지 않는다. 지나서 생각해보니, 이 기간 중에 조금 더 북쪽 지방에 있었어야 했나 아쉬운 마음도 든다. 정답은 없다. 여하튼 숙소도 렌터카도 여행지 이곳저곳 모두 쉽지 않은 초초 성수기였다.

전부터 가고 싶었던 city museum과 Cankarjev dom에 방문했다. 더운 날씨에 한적하고 공간이 조용하니 넓고, 8월 중에 무리해서 딱히 갈 곳이 없고 하여 아이들과 쉬엄쉬엄 텅 빈 전시장과 홀을 독점하고 놀았다. 그리고 류블랴나의 박물관과 갤러리는 아이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어 큰아이가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 외에도 실내 공간에 곳곳에 일반 학생들이나 아마추어의 작품전이 상시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다 감상한 작은 복도 갤러리에서는 women's hand라는 제목의 여성 뮤지션의 생생한 사진전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여행이 길어지니 국가와 인종에 대한 의미와 구분이 무색해진다. 내 조상 위로 거슬러거슬러 찾아보면 흑인 핏줄이 분명 있을 듯하다며, 아이들과 깔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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