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란 Piran 여행,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대가(육아휴직여행)
피란 Piran-Pirano 여행 이야기
류블랴나에서 한달살기를 하는 중에 피란 Piran에 다녀오자, 피란 여행을 하자는 얘긴 해오던 와중에 숙소를 예약했다. 우리의 여행 계획이 계속 바뀌다 보니, 크로아티아 로빈, 풀라에 갈 확률이 낮아지던 시점이었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탁 트인 바다를 보고 싶었다.
그러다 둘째 아이가 열이 나서 숙소에 요청해서 5일 뒤로 미뤘다. 호스트 야카Jaka는 흔쾌히 일정 조정에 응해줬고, 월요일 출발이던 계획이 토요일로 바뀌었다. 그런데 렌터카 이동을 알아보던 중, 야카Jaka와 류블랴나 호스트 보리스 Boris 모두 차로 가지 말라한다. 성수기라서 해안가 방향 교통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기차로 류블랴나에서 코페르 Koper까지 가서 코페르에서 피란으로 버스 이동 편으로 결정했다. 문제는 새벽 6시 13분 기차라 아침잠을 쫓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차 시간 대략 2시간 반, 버스 40분 도합 3시간을 가는데, 우린 크로아티아에서 여유 있게 기차 여행했던 생각만 하고 토요일 새벽기차를 결정한 것이다
새벽잠을 깨우고 피로한 아이들을 들쳐 매고 류블랴나 기차역에 도착, 빵과 음료수를 구입하고 기차 플랫폼에 가는데 탑승객이 많고 자전거 등 짐이 많이 오른다. 그러려니 하고 탔는데, 세상에! 객실은 6명씩 방으로 이뤄져 있고, 그나마도 자리가 남아있지 않았다! 일부 승객들은 통로, 짐칸, 흡연실에 나눠 앉고 애들이 있는 우리는 당황하고 말았다. 기차내 승무원 할아버지들에게 “우린 애들이 있다. 자리 어떻게 안 되겠냐” 물으니 한번 알아봐 준다며 뚱보들이 발 뻗고 앉은 칸에 두 자리 찾았다며 끼워 앉으란다.
그런데 객실 한 칸이 텀 비어있고, 승무원용도 아닌데 private 이라며 못 들어가게 한다. “우린 아이들이 있다, 애들 아프면 책임질 거냐? 애들 생각해서 share 해달라” 요구에도 안된다며 화낸다. 엄연히 승객 객실인데, 갑자기 접근금지 딱지를 붙이고 여긴 승무원 자리니 가란다. 열 받은 나는 이번 여행 처음으로 현지인에게 신경질을 내며 티켓을 코앞에서 흔들며 니들 다 클레임 걸어서 문제 삼을 거라고,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없다고 따졌다. 그 승무원 노인네 둘은 끝까지 배려해주지 않았다.
결국 아내와 큰아이는 뚱보들과 객실에서, 나는 둘째와 자전거가 가득한 짐칸에서 피란으로 이동했다. 피란 가는 길이 전쟁통에 도망가는 피란민(避亂民) 신세가 된 기분이었다. 둘째가 다행히 감자와 바나나를 새벽식으로 때워가며 많이 칭얼거리지 않고 류블랴나-코페르 Koper 기차를 잘 버텨주었다.
그런데 코페르에서 피란 가는 버스도 만석이었다. 주말에 돗자리 하나 매고 놀러 가는 현지인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버스 안 공기는 답답했고, 40분 가는 버스도 도로 정체를 어찌하지 못했으며 해안선 따라 버스가 도는데, 큰아이가 멀미를 했다. 결국 버스 안에 큰애가 토하고 입술이 하얗게 벌벌 떨고, 둘째도 뻗히기 시작한다.
누가 피란 가자고 했지? 왜 이렇게 가자고 했지? 머릿속엔 책임을 묻는 신경질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판에 피란 Piran 공용 버스터미널에 드디어 도착한다. 그리고 마중 나온 호스트 야카Jaka의 어머니인, 클라브디야 Klavdija를 만나면서 상황이 풀리기 시작했다
우선 클라브디야 Klavdija는 너무나 친절하고 유머러스한 60대 아줌마였다. 가식 없고 여유롭고 진심으로 잘해줘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 전쟁 피란민을 구해준 사람처럼 고맙고 반가웠다. 나중에 아내와, 나이 먹어도 저렇게 품격과 센스를 갖추며 먹어야 하지 않을까 얘기 나눌 정도였으니까... 아들인 호스트 야카Jaka는 비엔나에서 살고 있고, 포르토로즈에서 사는 클라브디야 Klavdija가 이곳 숙소를 관리하는데, 피란은 좁아서 숙소나 상점, 식당 운영하는 사람이 대부분 친구에 친척으로 다 아는 사이라고 한다.
운이 좋은 걸까? 후기 없이 감으로 아내가 고른 이 숙소는 우리가 첫 손님인, 리모델링한 지 얼마 안 된 곳이었다. 널찍하고 천장도 높고 에어컨도 방마다 있고 무엇보다 화장실과 욕실이 좋아, 류블랴나 한달살기 숙소의 좁은 욕실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이틀간 누릴 수 있었다.
힘겨운 오전 이동으로 지친 식구들이 낮잠에 빠진 사이, 잠시 구경 나온 피란 해안가는 예상보다 훨씬 더웠다. 제일 먼저 잠에서 깬 둘째 아이와 골목 산책을 나섰는데, 이곳 골목길은 유모차 끌기 굉장히 나쁜 환경이다. 크로아티아 해안가 도시인 스플리트, 자다르만 해도 먼지 한 톨 앉이 않을듯한 깔끔함과 매끈한 도로 환경이 좋아 유모차가 덜컹거릴 일이 없었는데, 결국 유모차는 피란 체류기간 중 숙소에 봉인되고 걷다가 아기띠 하기를 반복하며 돌아다녔다.
피란 여름 축제 기간으로, 우리가 여행한 토, 일요일이 Tartini Square에서 마지막 발레 공연이 있었다. 큰아이가 공연 관람에 그치지 않고 광장에서 홀로 독무를 추며 발레 마니아의 면모를 보여줬다. 그 흥을 담아 해안선을 따라 산책 중에도 그녀의 발레는 멈추지 않았다. 이번 장기 유럽 체류의 마지막 바다라는 생각을 곱씹으며, 아드리아해와 당분간 작별인사를 나눴다.
피란 둘째 날, 아침산책을 나서는데 둘째 아이는 광장에서 금세 또래를 친구 삼아 함께 논다. 피란에 가족여행 왔다는 슬로베니아 현지인 엄마가, 저 작은 애를 데리고 참 멀리서 어떻게 여기까지 여행 왔냐며 자기는 애가 어려서 유모차니 아기띠니 하고 못 댕겨서 외국여행 꿈도 안 꾼단다. 슬로베니아든 크로아티아든 어딜 가나 낯선이와 대화의 물꼬를 트게 만드는 아이들, 그리고 대부분 또래 아이를 키우는 유럽인 엄마 아빠들, 이제 습관이 되어버린 육아와 여행에 대한 이야기들인데, 반복되지만 전혀 무료하지 않다.
누군가 그랬단다. 피란 Piran은 슬로베니아의 작은 두브로브니크라고 말이다. 크로아티아 여행하며, 너무 남쪽으로 동떨어져서 두브로브니크를 스킵한 아쉬움을 여기서 달랜 셈이다. 여하간 아름다움을 누릴 호사는 공짜로 쥐어지진 않았다.
피란 Piran은 그렇지 않아도 더운 날씨가 더더 해진 느낌이다. 물론 고국의 가족 친지 친구들은 이맘때 상상 못 할 더위에 지쳐 있는 8월 초순이다. 집 떠나면 고생이지만, 그래도 우린 특별한 시간을 누리고 있다. 그렇게 가장 더울 한낮은 낮잠을 자며 한숨 돌리고, 해가 뉘엿 넘어가길 기다리다가, 이번 유럽여행의 마지막이 된 바다수영에 나섰다.
두 번째 낮잠까지 깨고 저녁 즈음 해가 석양으로 넘어갈 때, 광장으로 나와서 동네 아이들, 현지인 관광객 아이들과 어울려서 노는 둘째 아이. 15개월 꼬맹이를 배려하며 함께 공놀이 하는 마음씨가 고맙다.
피란 Piran에서 류블랴나로 돌아가는 날, 아내가 배낭을 싸는 동안 잠시 아침 산책을 나섰는데 너무 덥다. 그리고 내 컨디션이 말이 아니다. 속이 더부룩하고 싸하니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전날 생선요리, 탄산음료, 무리한 트리에스테 해안 수영, 어깨와 등이 살짝 타익은 느낌까지 최악의 조합이 그간 잘 버텨온 체력을 소진시켰다. 밤잠 안자며 블로그에 글 올린 것까지 포함해서 이게 여행인지, 육아인지 분간 안 가는 시간을 만 2달 보내니 슬슬 아플 법도 했다. 큰아이는 여행 와서 신나게 뛰논 덕에 건강해졌고, 아내는 예민해서 크게 탈 나기 전에 조금씩 나눠서 아프니 그때그때 나눠서 쉬었고, 둘째 아이가 한참 아팠다가 좋아졌는데... 이젠 내가 문제였다
피란에서 류블랴나로 돌아가는 날, 포르토로즈에서 차를 렌트했다. 피란 숙소 호스트 클라브디야 Klavdija가 렌터카 사무실까지 태워다 주며, 슬로베니아에서 무슨 일 생겼는데 답 없으면 언제든 전화하면 도와주겠다 한다. 이 아줌마 빈말 아닌 진심이다. 너무 고마웠다. “여태껏 만난 모든 숙소 호스트 중에 당신이 최고예요. 애들 더 커서 예쁜 숙녀 돼서 반갑게 꼭 다시 만나요~” 긴 인생의 짧은 여행이지만,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고 꼭 다시 보고픈 사람도 있다.
류블랴나로 돌아가는 길에 포스토이나 Postojna가 있어서 들렀다. 류블랴나 곳곳에 포스토이나 동굴에 오라는 광고가 즐비해서 큰아이가 "동굴 가고 싶어! 동굴 가고 싶어!" 노래하던 터였다. 포스토이나 동굴을 얕잡아 보고 갔는데, 세상에나, 무슨 전 유럽인은 다 모인 것 같이 인산인해다. 컨디션도 엉망인데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동굴체험 약속은 지키자며 입장권 구매하려는데 동굴+전시관 하나가, 네 식구 다해서 100eu 가까이 될 만큼 비쌌다. 아내가 "백유로 내고 고생을 샀구나~"하며 동굴에 입장하는데, 동굴 안은 얼어 죽을 만큼 춥고, 스텝의 실수로 난 유모차를 계속 들고 다니며 둘째 춥지 말라고 아기띠 하고 동굴을 다녀야 했다. 그리고 포스토이나 동굴 기차는 인디아나 존스 저리 가라 할 만큼 무시무시한 쾌속열차였다
제대로 된 안전장치도 없어 누구 하나 다치면 어쩌나 싶게 초고속 열차로 동굴 입퇴장을 했고, 근 한 시간을 군사 행군하듯 동굴 안을 걸었다. 중간에 힘들어서 쓰러진 할머니도 있었다. 내가 낑낑거리는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행 온 청년들이 도와주겠다고 한다. “나 11년 전에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집트 여행했어! 다합에서 홍해 바다 헤엄쳐서 너희 나라 건너갈까 하다가 말았어” 사우디 아재들과 낄낄거리며 내 중동 여행 넋두리하며 길고 길었던 포스토이나 Postojna 동굴 훈련을 버텼다.
둘째가 꼬박 3일 열나고 아팠듯, 나도 꼬박 3일 동안 아파서 제대로 된 나들이도 즐기지 못했다. 근교 여행하자며 차는 빌렸지, 날씨는 너무 덥지, 시기는 초성수기라 유명한 여행지는 사람이 미어터지지, 몸은 아프지... 아내는 렌트비용을 아까워했고, 아이들은 집순이 생활에 답답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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