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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 아빠 Nov 28. 2019

아빠는 1년 내내 여름이면 좋겠어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한달살기 마무리, 우리가 사랑한 여름

어릴 적, 아니 최소한 학창 시절에 '좋아하는 계절은?'이란 질문에 의심할 여지없이 '겨울!'이라고 외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또 이유도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지만, 뭔가 입가에서 내뱉을 수 있는 하얀 입김이 주는 따뜻함의 역설이 낭만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당연한 얘기지만 눈싸움도 꽤나 좋아했고 말이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육아를 시작하기 전부터 추위를 끔찍하게 싫어하게 된 계기는 아마도 여행일 것이다. 여름에는 옷차림도 가볍고 땀 흘리면 흘리는대로 더러워지면 그대로, 그냥 무냥 허허 낙낙 이렇게 걷는 게 좋고 뭔가 무소유를 실천하는 기분에 취하곤 했다. 그러다 추위가 닥친 유럽을 거닐면서 눈 쌓인 도로를 움츠리고 걷다가 뼈 속까지 시린 외로움에 시달리다 보니 '아.... 겨울 젠장, 내가 다신 겨울 좋다 하나 봐라' 하며 여름 예찬론자가 되었다.

6월 말을 정점으로 해가 슬슬 짧아지기 시작하면 괜스레 초조하고 안타깝다. 나에게 여름은, '저녁 있는 삶'과 연결이 된다. 아이들과 홑겹의 옷을 두르고, 왜 잠들지 않냐며 투덜거려도 늦은 밤까지 동네 산책을 나설 수 있다. 불 꺼진 동네를 걷고, 아무도 없는 어둑어둑한 놀이터에서 그네도 탈 수 있다. 육아휴직도 끝나고, 여행이 아닌 여름에도 우리는 별 준비물 없이도, 휴대품 없이도, 주말이면 무작정 걷다가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 이내는 아이들과 데이트에 나설 수 있다. 기록할만한 순간이 없어서 찍어둔 사진도 몇 장 없어도, '이게 아빠가 널 사랑한 증거야'라 말할 순 없지만, 그렇게 쏘다니며 근거리의 모든 아파트 단지 놀이터를 섭렵했고 어지간한 백화점과 대형마트 쇼핑몰의 장난감 코너는 다 구석구석 둘러봤고, 충동적으로 폐장 1시간을 남긴 수목원을 찾아가 한바탕 뛰어놀다 돌아오기도 하고, 야간에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낯선 풍경과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서 한달살기하며 느낀 행복은, 여름의 한 복판에서 누린 자유와도 같다. 그렇게 해방감을 누리는 여름의 한 복판에서 또 다른 계절이 다가오는 느낌은, 아직 선생님이 내주지 않은 부담스러운 분량의 숙제 같다. 시간이 흐르면 어떡하지? 지금 충분히 괜찮은데, 이다음이 별로면 어쩌지? 뭐, 또 좀 움츠리고 견디면 더 좋은 시간이 다시 오지 않을까? 라며 아이들과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을 함께 걷는다.


류블랴나 한달살기 숙소 호스트 Boris가 추천한 공원을 해가 많이 넘어간 늦은 오후에 찾았다. 역시 차로 5분 거리, 버스는 없고 걸어가긴 애매한 위치의 코델예보 공원 Kodeljevo, 보리스가 지난해 여름의 대부분을 가족들과 이 공원에서 보냈다 했는데. 가보니 그럴 법했다.

아이들은 현지인 아이들과 거리낌 없이 놀았고, 나와 아내는 멀찌감치에서 지켜보며 류블랴나 사람들 마냥 쉬었다. 그리고 이곳 현지인들이 격 없이 인사도 하고 친절하다. 중국인으로 생각했는지 "니하오마~"하기에 한국인이라 하자, 한국어 인사법을 물어온다.

그러던 중 만난 사람 크리스는 궁금한 게 많은지 한참을 얘기 나눴다. 처음엔 자기 아들에게 짧은 한국어를 알려달라며 다가오더니, 왜 슬로베니아에 긴 여행을 오게 되었는지, 한국에서 남자의 육아휴직이 흔한지, 금전적 지원은 있는지까지 엉겁결에 내 짧은 1년여간의 여정을 다 들려주었다. 어디 묵고 있는지 얘기하는데 나와 같은 ilirska ulica에 산단다. 나는 ulica 36, 크리스는 ulica 23, “완전 이웃이구마! 집 근처에서 또 보자! 또 만나면 그땐 초대할게!”하며 헤어졌는데 결국 못 만났다(혹시 피해 다닌 건 아닐까?)

보통 여행하며 만나게 되는 외국인은 다음과 같다

1. 여행객을 상대하는 현지인(식당, 숙소, 가이드 등등)

2. 여행을 하는 외국인(주로 다른 유럽 사람)

3. 여행을 하는 현지인(자국이라 더 여유 있는)

4. 그냥 말 그대로 현지인

1번은 원래 친절하게 나와 우리 가족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고, 2번도 오픈 마인드라서 함께 여행지 얘기도 하고 정보도 공유한다. 3번도 1,2번처럼 친절하고 상냥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4번, 관광지, 여행 등과 아무 상관없는 날것 그대로 현지인은 그냥 열흘남짓 유럽여행 와선 만나기 어렵다. 어쩌면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을 뛰어놀게 할 공원과 놀이터를 찾다 보니 우리 부부는 수많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엄마 아빠들과 만날 기회가 생겼던 것 같다. 마치 "어쩐 일로 여기에 있니?" 하는 느낌으로 시작한 대화가, 짧지만 육아까지 엮어서 삶을 쭉 복기하듯 말을 하고 나면 그 관심과 호기심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아이들이 부쩍 자라면, 다시 이렇게 현지인과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까? 어쩌면 다신 얻지 못할 소중한 소통을 나는 누렸는지도 모른다.

더위를 뚫고 나름 욕심내서 슈코피아 로카 Škofja Loka를 찾은 날, 아내와 아주 사소한 트집으로 말싸움이 붙어 차로 30분 거리를 30년처럼 운전해서 도착했다. 그리고 류블랴나에서 느끼지 못하는 고즈넉한 매력을, 더운 날씨와 내 컨디션 난조 덕에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더워도 너무 더운 날이었다. 카페에서 만난 네덜란드 가족, 교회 앞에서 만난 네덜란드 노부부 말이 자기네 나라도 너무 건조하고 덥단다. 8월 초순, 지구촌 북반구가 모두 더위에 지쳐있는걸 유럽에서 엉겁결에 확인한다.


장난감 가게 Ristanc의 주인 루치야 Lucija 할머니가 더운 여름 어딜 가면 좋을지 묻는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에겐 티볼리 파크 Tivoli가 있어. 녹지가 넓고 그늘도 많고 아이들 놀이터도 있고 미술관, 커피숍도 있어서 날씨 좋은 여름에 최고야

한국에 가족 친지들이 무더운 여름을 보내는 동안, 이곳 류블랴나에서 어떻게 더위를 유쾌하고 현명하게 보낼까 하던 우리는 뒤늦게 티볼리 파크 Tivoli를 찾게 된다.

“진작에 시작한 한달살기인데, 왜 이제야 여길 왔지?” 류블랴나를 떠나기 한주를 남기고서야 티볼리 파크가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멀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도심과 공원 사이 기찻길이 있다 보니, 뭔가 우악스러운 철길을 건너야 할지도 몰라하며 내가 오해한 게 이곳에 늦게 방문한 원인이다.

그래서 우린 남은 기간 매일 티볼리 파크 Tivoli에 왔다. 아침 먹고 나와서 아내는 미술관에서 커피 한잔하고, 아이들은 놀이터, 공원 녹지에서 뛰놀고, 점심 도시락 사다 먹고 낮잠도 자며, 무언가 더 하지 않아도 건강한 우리의 여름 나기였다. 그리고 큰아이가 류블랴나에서 가장 사랑한 놀이터, 매달리는 도르래가 있는 이 티볼리 파크 놀이터에 취해 집에도 안 가려하고 잠에서 깨면 놀이터 얘기부터 할 정도였다.

주말에도 류블랴나 학교나 보육시설에서 아이들은 단체로 티볼리 파크 Tivoli에서 뛰놀았다.

8살 내외 꽤나 큰 아이들도 남녀 모두 팬티만 입고 물총 싸움을 했다. 우리는 언제 설치해보나 싶게 가방 한편을 차지했던 해먹을 드디어 개시했다. 아이들은 공원 놀이터에서 장난감도 자유롭게 공유하고 놀았다. 낯선 이방인의 아이에게 늘 호의적인 류블랴나 가족들 덕에 사랑스러운 여름 나기가 가능했다.

이제 류블랴나 한달살기를 정리하고 다음 행선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 기존 계획대로 크로아티아 리예카로 기차 타고 내려가서 바다 마을, 항구도시 구경하고 자그레브에서 비행기 타고 귀국하느냐, 아니면 비행 스케줄과 아웃 도시를 변경해서 동유럽 타도시를 가느냐... 류블랴나 한달살기에서 아쉬움이 많았던 아내에게 선택권을 일임하고 아이들과 류블랴나의 여름을 정리해나갔다.

한참 남았다고 생각해서 여유 넘쳤던 한달살기도 끝날 때가 되니 무언가 뭉클했다. 언제 끝날까 싶은 수험생 시절도, 군생활도 시간 지나면 총알처럼 흘러갔고, 느리게 가길 바랐던 다른 여행들도 지나고 보면 다 한순간이다. 한달살기도, 기간만 한 달일 뿐, 지나고 보면 다 찰나이다. 한달살기 숙소가 엘리베이터 없는 5층 건물 제일 위층이라 매일 5층 계단을 한 팔엔 둘째 아이를 안고 다른 팔엔 폴딩 유모차를 매고 오르내렸다. 그걸 한 달간 했다는 게 지나서 생각하니 장하다. 

혹시 누군가 류블랴나에서 한달살기를 계획한다면 요금 할인만 생각해서 한 달 통째로 한집과 계약하기보단 1주일 단위로 지역을 바꿔가며 너덧군데 숙소에서 지내는 걸 추천한다. 류블랴나는 분명 작지만 거점이 바뀌면 지역에 따라 생활 반경이나 할 수 있는 선택범위가 바뀐다는 점에서, 그리고 주 단위로 환기된다는 점에서 숙소가 고정되는 것보다 훨씬 좋다.

큰아이의 집안에서 시간을 채우고 무료함을 달래고자 고국의 어린이집 친구들에게 엽서를 썼다. 그림도 그리고 류블랴나 지도, 팸플릿 등을 동봉해서 큰아이 어린이집으로 국제 우편을 보냈다. 잘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기 전까지 우리의 소포가 어디 대기권 밖 우주에서 떠다니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했더랬다.

몇 살이에요? 이름이 뭐예요? 남자? 여자?

둘째 아이는 여행을 시작하던 시절, "14개월이에요"로 시작했는데, 류블랴나를 떠날 때쯤 "16개월이에요"가 되었다. 이후 한 달을 더 보냈으니, 14개월에서 한 타자에서의 삶은 17개월에서 마무리했다. 숫자가 하나씩 늘어갈수록 더 크고 더 야성적이 되어갔다. 둘째는 말 그대로 길 위에서 키운 기분이었다. 밖에 나가는 것을 좋아해서 아침부터 나가자고 떼를 쓰고, 요구하는 것도 많다. 요즘은 부끄러움을 좀 타지만, 낯선 어른들과 눈 맞추고 교류도 능숙하고 또래 아이들과 잘 뛰어놀았다. 고정된 루틴이 없이, 잠자리도 자주 바뀌니 16개월 인생, 처음으로 매일매일 하루하루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 아쉬운 건 역시 제대로 연극 등 공연 관람을 못한 것. 유럽이 전반적으로 7~8월에 극장들이 대대적으로 휴가를 갖고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새로운 시즌에 들어간다. 슬로베니아에 있던 기간이 여름휴가 성수기였던지라 연극 극장이나 오페라, 발레는 거의 휴관이고, 그나마 류블랴나 페스티벌에 초청된 뮤지컬이나 무용 공연도 일정이 어긋나서 보지 못했다.

류블랴나도 네다섯 군데 멋진 극단, 극장이 있고, 시내버스 전면 광고로 극단 배우들 사진이 붙어 있을 만큼 연극배우들의 위상도 높았다. 아내 말대로 동유럽 국가들이 사회주의 시절부터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공연이 활용되어 배우들이 선전의 선봉대에 많이 섰던 것이 명예나 인식에서도 크게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던 듯하다. 그중 류블랴나가 자랑하는 인형극장 루트코브노 글레달리스체 류블랴나가 공연을 놓친 점이 제일 섭섭했다. Lutkovno gledališče Ljubljana, 루트코브노 글레달리스체 류블랴나, 말 그대로 인형극장 류블랴나는 우리가 단순히 상상하는 인형을 뒤에서 조정하는 형식이 아닌, 다양한 실험을 통한 진보적인 형태의 표현을 구사하는 극장이었다. 크로아티아 자다르에서 열린 인형극 페스티벌에서 그들의 공연 'somewhere else'를  만난 게 인연이 되어 류블랴나를 찾아 극장에 왔건만, 인형극 박물관만 실컷 놀러 간 것에 만족해야 했다. 

큰아이는 류블랴나 말라 울리차Mala Ulica에서 많은 미술 작품을 만들었다. 짐에 다 넣지 못해서 챙겨 온 것들 몇몇만 기록으로 남겼다. 집 앞 성당에 미사 참여를 꼭 하고 싶었는데, 떠나기 전날 저녁 미사에 참가했다. 낯선 이방인의 미사 참가에도 전혀 벽이 없었다. 신부님이 기타 들고 노래하는데 왠지 종교의식도 신도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콘서트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른 새벽잠을 물리치고 공항에 왔는데 아이들은 씩씩하고 유쾌했다. 류블랴나 공항은 자그마했고, 수속도 짧았으며 절차도 간단한 편이었다. 우린 슬로베니아 국적기인 아드리아 Adria 항공을 이용했다. 그렇게 1시간 20여분 비행기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도착한 곳은 폴란드 바르샤바 Warszawa! 마치 다시 여행을 시작하는 기분으로, 설렘을 안고 쇼팽 공항에 발을 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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