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란드 바르샤바 한달살기, 구시가의 매력이란!(육아휴직여행)
낮밤 눈동자색 첫인사까지 모두 바뀌면
추억 미련 그리움은 흔한 이방인의 고향 얘기...
차창 밖 흩어지는 낯선 가로수 한 번도 기댄 적 없는
'도착'(박정현 노래-월간 윤종신 中)
아내가 좋아해서 한동안 하루 종일 이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 큰딸이 지금 둘째 정도의 나이였을 때다. 아이는 그 선율과 가사를 기억하고 먼저 흥얼거리더니, 트램을 타고 창밖의 풍경을 휴대폰으로 영상을 찍으며 인터렉티브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아내와 7살, 14개월 아이를 동반해서 떠난 동유럽 여행은 석 달 째로 접어들었고, 계속 이동하던 여행을 넘어 한달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비행기를 타고 내리면 이전의 익숙함은 온데간데없고 새로운 적응이 시작된다. 처음부터 이방인이었지만, 다시 이방인이 되는 기분이었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여행, 류블랴나 한달살기까지 긴 시간 달마티안 지역에서 보내다가 바르샤바 Warszawa로 행선지를 옮기게 된 건 오랜 시간 고민 끝에 내린 큰 변화였다. 류블랴나 한달살기는 내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어 선택한 여정이었다면, 이후 행선지와 여정은 아내의 의중을 많이 반영하기로 했다. 처음엔 베를린에 가보고 싶던 아내는 숙소 비용이 높고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은 데서 한계를 느끼다가, 부다페스트, 뮌헨 등 예전부터 가보고 싶던 도시를 검색하다가 숙소 선택의 기회가 넓고 물가도 저렴하며 무엇보다 8월에도 다양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폴란드 바르샤바Warszawa로 급선회를 하게 되었다. 귀국 항공일정과 아웃 도시도 바꾸며, 애당초 여행 출발할 때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만 생각했던 우리에게 다시 새로운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컨디션을 고려하여 도시 이동은 피로를 최소화하는 것으로 살펴보았고, 숙소는 3-7일 간격으로 옮겨서 뻔한 장소와 일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아내는 숙소 고르는 일종의 쇼핑 욕구도 느끼고(본인은 그게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 일인지 항변하지만) 다양한 공간을 경험하는 기회도 갖기로 했다.
그렇게 찾은 올드타운 인근 숙소는 다행스럽게도 이른 비행 도착으로 early check-in을 해야 했던 우리 가족의 편의를 봐주었다. 호스트 Aneta가 "올가 Olga가 너희를 맞이해줄 거야"라고 했을 땐, 올가 Olga란 이름이 동유럽권에서 워낙 오래되고 흔한 이름인지라(물론 그리스 가톨릭 교회 성인 이름이지만) 60대 아줌마가 나오나 했는데, 소녀시대 써니 같은 쾌활한 아가씨가 마중 나와서 놀랐다. 써니 닮았다는 평가는 순전히 아내의 생각인데, 외모, 목소리와 말투, 뉘앙스까지 완전 폴란드 써니란다. 여하튼 밝은 호스트(의 직원)와 새로운 숙소를 만나니 마음이 많이 놓인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를 거치며 환대와 친절함이 익숙한 우리가 공항 내리는 순간부터 무뚝뚝한 경찰, 프랑스 배우 멜라니 로랑을 닮았어도 시큰둥했던 유심칩 판매 직원, "바르샤바 크네~"했더니 "런던이 크지 바르샤바가 크긴~"하며 무안하게 했던 우버 uber 기사까지 뭔가 냉랭한 분위기에 경직되었는데 올가 Olga를 만나니 모든 게 편견이었구나 하게 된다. 숙소는 올드타운 북쪽 초입에 위치한 작은 아파트였다
8월 15일은, 폴란드 국군의 날이자 성모승천 대축일이다. 써니 말로는 독립기념일이나 다름없다는데 상점들이 많이들 쉬고 사람들로 많이 붐빌 거란다. 어, 한국도 광복절인데, 낯선 이국땅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폴란드 바르샤바 Warszawa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시간 맞춰서 군사 퍼레이드도 구경 가자 했는데, 도로도 구간 폐쇄가 많고 워낙 현지인들이 많이 외출 나와서 가보진 못했다.
새벽 비행기로 도착해서 식사가 부실했기에 가까운 식당을 찾다가 2층이 한산한 케밥집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고 모두들 낮잠에 들어갔다. 쿠나, 유로를 쓰다가 새로운 통화 즈워티를 쓰려니 적응도 필요하고 모든 게 낯설다. 점원들도 뭔가 덜 친절한듯하다. 익숙하게 써온 슬로베니아의 짧은 인사들도 리셋해야 하는데 급작스럽게 결정된 바르샤바행이라 폴란드 기초회화는 들춰보지 않았다.
아내와 큰아이가 어린이 전용극장을 구경간 사이, 낯선 얼굴의 남자가 둘째 아이에게 인사를 하며 호의를 보인다. 그는 인도 출신의 '와라', 여자 친구와 그녀의 딸과 휴일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와라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려는데 둘째와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한다. “why not?” 폴란드에 왔는데, 인도계 남자로부터 둘째의 앞날을 축복하는 기도(아마도 힌두교식)를 선물 받는 의외의 경험을 했다. 와라 덕에 조금씩 낯선 도시에 긴장이 누그러졌다.
인어상이 유명한 올드타운 마켓 광장에 가니, 관광객보다 많은 현지인들이 폴란드 국기를 들고 기념일을 즐기고 있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여행, 설렘은 아이들이 더 컸다. 그렇게 Stare Miasto 광장에 도착했더니, 넓고 트인 풍경에 해방감을 느꼈는지 아이들이 깔깔 웃으며 뛰어놀았다. 무덥던 슬로베니아에서 북쪽으로 올라와서 그런지 제법 선선했고, 아직은 모든 게 약간 어색한 엄마 아빠에 비해 아이들은 초원을 뛰놀던 때처럼 자유로웠다. 광장에선 바이올린, 기타, 실로폰 등 다양한 악기의 버스킹 공연이 있었고, 마술쇼를 하는 아저씨도 있었다. 둘째는 계단만 있어도 즐거워하며 쉬지 않고 오르내렸다.
이튿날 아침 다시 광장으로 산책을 나섰는데, 처음 여행을 시작했던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의 새벽이 떠올랐다. 설렘, 선선한 공기, 활기찬 여행의 기운과, 햇살 받으며 뛰노는 아이들의 유쾌함까지 그대로였다.
큰아이가 하도 졸라서 120 즈워티를 지불하고 마차를 타게 된다. 돈 아껴야 하는데, 마차 타고 4인 가족이 광장을 한 바퀴 돌며 사람들이 다들 쳐다보는 느낌이 꼭 중국인 갑부 가족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사실 웬만해선 큰아이가 떼써도 저 비싸고 말 냄새도 지독한 마차를 타지 않을 텐데 마부 할아버지가 너무 좋은 분이라서 타게 되었다. 바르샤바 스타레 미아스토 광장에는 꽤 많은 집시 아이들이 구걸을 하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요령껏 피하고 있는데, 마차 할아버지는 집시 아이들이 말을 만지고 먹이를 주는 것을 흔쾌히 허락해주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집시들이 근처에만 와도 화를 내며 쫓아내는데, 마음씨 좋게 그들을 대하는 할아버지 모습이 좋아서 엉겁결에 큰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게 된 것이다. 120 즈워티면, 3만 5천 원이 넘는 돈인데, 하루 생활비를 마차 값에 다 치른 셈이었다. 그 외에도 광장에서 칼싸움을 청하는 커다란 닭 인형에 낚여서 5 즈워티도 지불하는 등 바르샤바 한달살기 초반부터 흥이 넘치는 큰아이가 과소비를 재촉했다. 큰아이는 어떻게 하면 자기도 버스킹을 하며 돈을 받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에, 어린 나이에 그리하면 부모가 시켜서 구걸하러 나온 거라 오해받는다 하며 뜯어말렸다.
바르샤바는 류블랴나에서 한달살기 할 때와 비교하면 훨씬 큰 도시였다. 건물 높이부터 다르고 도시를 가르는 비스와 강을 두고 동서쪽은 개성도 정취도 달랐다. 부지런히 숙소를 검색하던 아내는 그런 바르샤바 Warszawa의 특징을 감안하여 숙소 위치를 배분했다. 물론 아이들에겐 놀이터와 공원이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가가 더 중요했다.
바르샤바 한달살기 두 번째 숙소는 유대인 게토 지구에 인접한 오래된 아파트였다. 이 숙소에 있는 동안은, 바르샤바와 폴란드의 2차 세계대전 시절의 아픈 역사를 둘러볼 계획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공연 관람을 다닐 차례였다.
숙소 앞에는 그간 체험해보지 못한 형태의 놀이 기구가 있어 큰아이는 신이 났다. 물론 둘째 아이도 신기해하며 새로운 놀이터에 적응했다. 놀이터에는 우리 자매에게 호감을 보이며 함께 뛰논 아이가 있는가 하면, 낯선 사람들이 자기 홈그라운드에 왔다며 모래를 유모차와 아이들에게 뿌리는 아이도 있었다. 2-3살 전후의 꼬마라 인종차별 같진 않았고 심술궂은 텃새 같은 느낌이다. 아이 엄마가 더 적극적으로 아이를 혼내지 않으니 우리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올드타운 등 관광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와서 주민들의 놀이터로 오니, 바르샤바 사람들의 무뚝뚝함의 원인이 더 명확해졌다. 기본적으로 슬로베니아 사람들보다 영어가 서툴다. 그러니 낯선 사람과 어설프게 대화하길 원하질 않으니 교류가 잘 안되었다. 류블랴나에선 생뚱맞게 그들의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나에게 주저 없이 묻고 호의를 표시했는데, 이곳 바르샤바에선 쑥스럽게 웃는데 대화를 트지 않았다. 물론 이 역시 다른 동네 갔을 때부터 상황이 반전되었지만 말이다.
유대인 게토지역 건물,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격리 수용하다가, 나중에 수용소로 끌고 가 학살했던 아픈 기억의 역사, 게토 봉기도 있었으나 많은 이들이 진압당하고 죽음을 맞았다. 그 역사의 아픔치곤 건물의 보존 상태나 환경이 특별하진 않았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2차 세계대전 시절 유사한 역사적 아픔이 있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눈앞의 낡은 건물에서 쓸쓸한 감상이 들었다. 큰아이에게 우리 식민지 역사나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한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 신형철 산문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中에서
토요일 오전 산책을 나왔다가 유난히 아이들이 많이 모여 있고 유난히 아빠들이 많이 나온 놀이터를 발견했다. 늘 그랬듯, 아이들이 먼저 함께 뛰어놀고 자연스럽게 어른들이 눈인사를 나누고, 낯선 동양인과 호구조사를 하고 나면 육아하는 부모로서 동질감을 공유하며 친구가 된다.
놀이터 한쪽 구석에 사람들이 11시가 되자 몰려간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까운 공립 어린이 도서관에서 토요일마다 이렇게 극단을 초청해서 작은 인형극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인형극은 재미없었다. 동물들이 주인공인 익숙한 모험동화 같은데 너무 익숙한 방식의 인형극이었다. 폴란드어를 모르니, 아이들도 적당히 보다가 다시 흩어져서 논다. 그리고 인형극 배우들 덕분에 폴란드어 인사말을 쉽게 배웠다. 젠 도브리! dzień dobry!
아내가 류블랴나에서 검색해서 보고 싶어 했던 공연 PIĘKNY NIECZUŁY(아름답다)를 보기 위해 테아트르 Teatr(극장)를 찾았다. 공연은 샹송 가수 에디뜨 피아프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었다
6살 여자아이도 함께 볼게요
매표소 직원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영어자막도 없는데, 낯선 동양인 어른이 본다는 것도 신기하고 어린 여자아이도 공연을 보겠다니...... 하지만 아내와 큰아이는 공연 즐겁게 잘 봤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아내와 아이는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많은 공연을 즐겼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편견 없이 누구와도 친해질 수 있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어떤 공연도, 어떤 예술도 다 즐기고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극장 가까이에 우야즈도브스키 공원 Ujazdowski Park을 찾았다. 아이들은 연못에 오리들이 관심이었다. 오리, 비둘기 모이도 주고, 간식도 먹으며 오후 산책을 누렸다. 아이들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떠나온 한달살기라서 우리에겐 늘 좋은 공원과 놀이터가 어디 있는지를 제일 먼저 확인했다. 그리고 서서히 저녁에 연극 공연을 볼 수 있는 여건이 되어서 극장 위치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한 절차가 되었다.
그리고 둘째 아이는 아기띠에 안겨서 잠드는 습관을 졸업했다. 둘째가 태어나고 육아휴직을 시작하며, 정말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든 육아용품이었다. 때론 2시간이 넘도록 아기띠에 안겨서도 잠들지 않겠다며 손톱으로 아빠 옆구리를 할퀴었고, 서로가 서로를 속박하는 묶임에 나 역시 애증이 차고 넘쳤다. 집 떠나서 아빠와 아이는 그렇게 한 계단 뛰어넘는 성장을 했다. 둘째는 작은 아기침대도 졸업하고 어른 매트리스 구석구석을 뒹굴며 잠이 들었다. 길 위에서 아이는 작은 습관부터 하나씩 자유를 얻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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