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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 아빠 Dec 03. 2019

너희와 함께 나를 둘러싼 세계가 넓어진다(아빠육아)

- 폴란드 바르샤바 한달살기, 다시 현지인이 되는 경험(육아휴직 여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나를 둘러싼 세계와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다. 우리는 나를 둘러싼 세계를 확장해나가면서 내가 모르는 세계를 줄여나간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모르는 세계는 늘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하게 마련이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 김중혁)

큰아이가 태어나고, 내가 모르는 세계를 하나둘씩 경험하게 되었다. 둘째가 태어난 이후, 그리고 육아휴직을 시작한 이후, 아마 평생 몰랐을 새로운 세계가 나에게 열렸다. 설사 평생 모르고 살아도 될 세계를 알게 되었다 해도, 그게 너희들과 함께라면 의미 없진 않다.


숙소를 Old Mokotów 올드 모코토브로 옮겼다. 바르샤바 Warszawa 남쪽으로 지도로 보면 주거 밀집 지역이고 와지엔키 파크 Łazienki Park 가 가깝다. 아내가 여기에 일주일이나 숙소를 잡았을 때는 ‘뭔가 있겠거니...’ 했는데, 이 동네는 우리 가족에게 멋진 극장과 공원을 선물했다. 우선 극장 Nowy teatr 노비 테아트르, 영어식으로 말하자면 new theater에서의 이야기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놀러 간 노비 테아트르에서 제일 많이 들은 질문은 바로...

여기 사니?

숙소는 그냥 바르샤바 스타일의 아파트 밀집지역인데, 걸어서 1분 거리에 웬 창고 건물 하나가 있고, ‘TEATR’ 극장이란 네온사인을 달고 있다. 아내가 바르샤바에 오기 전부터 궁금했던 노비 테아트르 Nowy teatr였다.

극장에 걸린 공연 일정 및 레퍼토리를 훑어보고 숙소에 돌아와서 번역기를 돌려보는데, 금, 토요일에 춤 공연이 있다.

여보, 이스라엘에서 온 새로운 춤 공연이래

처음 아내에게 얘기했을 땐 시큰둥했다. 나도 “이스라엘 댄스?”하며, 탈무드 읽어줄 듯한 수염이 긴 랍비가 "안녕하세요~이스라엘에서 왔습니다~"하며 덩실덩실 탈춤 추는 걸 상상했다. 

노비 테아트르는 예전 공장 및 창고 건물을 개조한 공연극장이었고, 내부에 멋진 커피숍이 있었다. 홈페이지가 org로 끝나는 걸 보니 정부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듯했는데 분위기가 굉장히 자유로웠다.

극장 앞 광장이, 처음엔 특별할 거 없이 휑해서 뭔가 했는데, 저녁이 가까워오자 동네 아이들이 부모들과 함께 하나둘 모여든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사람들이 오고, 아이들이 챙겨 온 공이며 장난감들이 뒤섞여 놀기 시작한다. 아이를 동반하지 않은 어른들도 편하게 의자를 펴고 앉아 술도 마시고 식사를 하고 대화도 하고 책도 읽는다

물론 아예 아무것도 없진 않았다. 큰아이가 충분히 즐겨 놀만한 구름다리나 시시껄렁한 놀이터 도구들 정도는 있었다. 반려견과 산책 나온 이들 덕분에 한참 개에게 빠져있는 둘째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누군가의 킥보드가 잠시 우리 것이 되었다가 다시 주인의 손으로 넘어갔고, 여기서 아이들과도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별다른 도구 없이 그냥 뛰놀고 어울렸다. 

극장 안 카페에는 서점도 있는데 여느 서점과는 확실히 다른 풍경이었다. 둘째 아이는 서가 아래를 포복해가며 노는데 아무도 제재하지 않았다.


재밌는 에피소드 1, 둘째가 이제 갓 돌을 지난 듯한 아이와 아이 엄마를 보며 "아가! 아가!"라고 외쳤다. 그런데 아이 엄마가 깜짝 놀라기에 내가 "한국말로 '아가'는 baby에요. 우리 부부가 '아가~'하고 부르는 걸 기억해서, 당신 아이에게 '아가'라고 한 거예요"라고 설명해줬다. 그러자 "오! 사실 내 이름이 Agnieszka인데, 줄여서 Aga라고 불려요. 그런데 당신 딸이 나보고 “아가! 아가!” 불러서 어떻게 내 이름을 알지? 하며 놀란 거예요!" 하며 활짝 웃는다. 

소소한 호기심과 농담을 매개로 이 동네 주민들과 편하게 얘기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아내는 이스라엘에서 온 안무가 Michael Getman의 워크숍에 참가했다. 내가 랍비가 추는 전통무용이 아니라 현대무용인걸 확인하고, 금요일 공연인데 수요일 저녁에 무료 워크숍을 하니까 한번 가보라고 권했는데, 아내가 큰아이가 참가하게 하고 구경이나 하겠다며 소극적이다가 막상 워크숍 현장에 가니 흥미를 느끼고 현지인들과 함께 댄스 워크숍에 참가했다. 프로 댄서뿐 아니라 아마추어, 취미로 춤추는 사람까지 특별하진 않지만 아내에게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아내와 큰아이는 이스라엘에서 온 현대무용 공연을 즐기게 되었다. 

토요일 오전, 아이들을 위한 무료 단편영화 관람이 있다고 해서 노비 테아트르 Nowy teatr에 일찍 왔다. 이곳은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수업 및 체험을 진행함은 물론 어른들을 위한 커피와 음식도 훌륭하게 제공했다. 한 시간여 동안 단편 애니메이션을 여러 편 보여준다기에 뭘까 하며 자리를 폈다. 11시가 되자 별다른 코멘트 없이 스크린에 영화가 시작된다. 관람 분위기도 자유롭고 편하다. 둘째 아이가 낮잠이 고파 칭얼거려서 먼저 숙소로 복귀했지만 큰아이는 동네 아이들과 키득거리며 단편 애니메이션을 마음껏 즐겼다. 단편영화 상영이 끝나고 어린이 만들기 수업도 있어서 자연스레 참여했다.

재밌는 에피소드 2, 아이들이 함께 뛰놀던 폴란드 나이로 두 살 남자아이 Kuba와 많이 친해졌는데, 엉겁결에 그 아이 아빠와도 말을 텄다. 아바타 배우 샘 워딩턴 닮은 아이 아빠는 본인 이름도 Kuba란다. 원래 알렉산더인데 미드 네임이 Kuba라서 어릴 적부터 그냥 쿠바로 불렸단다. Kuba 아빠 Kuba에게 처음 이름을 소개하고 소개받을 땐, '쿠바? 그 카스트로의 Cuba?' 하며 헷갈려서 스펠링을 확인했다. 하기사 놀이터에선 그네 타며 친해진 여자아이의 이름을 그녀의 할머니께 물으니 "알라~"라는 거다. 이 사람들 무슬림도 아닌데 왠 알라? 했는데 이름이 Ala란다. 

독일과 폴란드를 오가며 IT업계에서 일하는 Kuba가 “여기 사니?”라고 물으며 시작된 대화는 내 여행과 Nowy teatr의 매력, 육아의 고충, 폴란드 여행까지 이어졌다. Kuba가 크라쿠프 여행을 적극 추천하는데, 바르샤바 건물들은 전쟁 후 재건한 것이 대부분이고 공산주의 체제 하에 만들어져서 매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연락처를 주면 바르샤바 여행 정보를 줄게, Kuba의 수줍은 호의에 고맙다고 했고, 다음날 문자메시지로 방대한 분량의 추천목록을 받았다. 

낯선 이에 대한 고마운 호의는 어디서 나올까? 아내와 얘기해봤는데, 한 가지 가정을 해봤다. 우리가 사는 서울의 동네 근린공원에 산책 갔는데 웬 서양인 아이와 우리 아이가 어울려 놀다가 아이 부모와 말을 트게 되면, 가장 먼저 묻겠지. "여기 사니?" 그리고 장기 여행자라고 하면 좀 더 유익하게 돌아다닐 곳을 알려주고 싶지 않을까? 여기 말고 제주도도 꼭 가봐~ 서울에선 강남은 안 가도 북촌마을은 가봐~하며 정보를 주지 않을까?

그렇게 아이들 덕분에 인연을 맺은 Kuba, 지구 상 어디서든 다시 보자는 훈훈한 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재밌는 에피소드 3, 모녀가 이스라엘에서 온 현대공연을 보는 동안, 나와 둘째 딸은 극장 밖에서 노는데, 열 살 막 넘은 듯한 잘생긴 쌍둥이 형제가 딸에게 함께 축구하며 놀길 권한다. "너무 아이라, 함께 공 갖고 놀 줄 몰라" 그때 그 형제의 삼촌이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 처음부터 패스하고 잘 차면 그게 이상하지~"하며 말을 걸어온다. 그는 크라쿠프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마테우스, 형 집에 놀러 왔는데 역시나 나에게 “여기 사니?”로 시작해서 묻지도 않은 본인의 스페인 요리 연수 계획부터 내 장기 유럽 체류 얘기까지 쉼 없이 수다 떨었다. 이 친구도 바르샤바 여행하며 아쉬울 부분을 크라쿠프에서 찾으라고 추천한다. 이번엔 못 가는데 이게 단서가 돼서 나는 결국 크라쿠프에 언젠간 가게 될까? 이게 인연이 되어 나를 둘러싼 세계를 확장해나가며 내가 모르는 세계를 줄여나가게 될까?

일요일, 비가 오는데, 극장 카페에 가니 이날은 뷔페식이다. 비가 오니 상대적으로 많은 현지인들이 바글거려도 여전히 극장 분위기는 자유롭고 좋았다. 아내와 서울에 돌아가도 이렇게 자유롭고 열린 공간을 찾아 아이들과 함께 가보자고 약속을 한다.

둘째가 태어나고 처음 내가 경험한 육아는 24시간 동안 아이만 바라보는 깜깜이 세상이었다. 낯선 유럽 대륙으로 건너와서 계획에 없던 한달살기가 시작되고 기대치 않은 현지인 체험을 하며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에 한걸음 발을 디딘 셈이다. 그럼에도 나와 아내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세계가 존재함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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