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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 아빠 Dec 05. 2019

단조로움은 권태가 아니라 행복이다 (아빠육아)

- 폴란드 바르샤바 한달살기, 좋은 공원은 병도 낫는다 (육아휴직여행)

천국의 삶은 우리를 미지로 끌고 가는 직선 경주와는 동떨어졌다. 그것은 모험이 아닌 셈이다. 이미 아는 것들 속에서 뱅뱅 도는 삶인 것이다. 그 단조로움은 권태가 아니라 행복이다.
인간의 삶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라고 테레자는 생각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육아휴직을 내고, 아이가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을 피부로 느끼지 못할 즈음 난 우울증에 걸렸고, 스스로 단조로움의 굴레에 갇혀있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나는 불행하다’라고 써놓고 하루를 보내는 듯한 내 모습에 질려버린 아내가 덥석 유럽행 비행기 티켓을 질렀다. 그렇게 유럽여행과 유럽에서 한달살기가 시작되고, 아내와 아이들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하루에도 큰 만족감을 얻곤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집 앞 놀이터와 인근 공원 산책만 하는 것은 너무 뻔하지 않나?’ 생각하며, 내가 선두에 서서 조금 욕심을 낸 외출을 했을 때는 그 의도와 상관없이 지치고 허탈했다. 처음에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외출이니 무리해선 안된다는 결론을 얻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문제는 뻔한 하루가 아니라, 내 욕망에 미치지 못하는 하루였다. 특별한 날은, 어딜 가서 무얼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것을 느끼느냐에 있었다.


처음 모코토브Mokotów로 숙소를 옮긴 날, 불성실한 숙소 호스트 덕에 아내가 숙소에 남아 청소 및 정리를 했고, 나는 아이들과 동네 놀이터, 공원 나들이를 나갔다. Park Morskie Oko는 숙소 옆 큰길 건너자마자 있었고, 무난한 놀이터였다. 이 작은 공원에는 무려 놀이터만 3개 있었다. 아이들은 기호에 맞게 놀이터 순회를 했고, 그중 가장 큰 놀이터에서 큰아이는 한 살 많은 오빠와 놀이터 기구를 넘나들며 친해졌다. 할머니부터 손자들까지 3대가 함께 쉬러 온 대가족이었고, 오빠 한 명과 친해지고 나니 가족들 모두와 웃으며 거리낌 없이 인사를 나누는데,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나는 미뤄오던 폴란드어 간단 회화들을 그제야 구글 번역기를 돌려 확인 후 대화를 시도했다. “몇 살이니?”, “우린 한국인이야”, “안녕 do widzenia~”, “고마워요 Dziękuję!” 그 얼마 안 되는 단어들을 스마트폰이 번역해준 대로 서툴게 말하고, 그걸 듣는 가족들이 깔깔 웃으며 발음과 억양을 교정해주며 낯선 유럽 땅에서 서툰 연결고리가 생겼다.

다음날 아침, 다시 공원 산책을 나서니 어느 방향으로 가냐에 따라 풍경도 달랐다. 그렇게 오전 한번, 둘째 아이 낮잠 자고 일어나면 오후 한번 놀이터를 찾곤 했다. 그렇게 큰아이는 동네 친구 톨라와 가까워졌다. 한 살 어린 톨라와 말도 안 통하는데 숨바꼭질도 하며 노는 걸 보며, 어쩌면 언어가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를 제한하고 방해하는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톨라는 할머니가 데리고 나왔는데 이후에도 약속 없이 두 번 더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났다. “또 만나~”하며 헤어질 때는 설마 했는데, 인연이란 게 다시 만나야 한다면 어떻게든 다시 만나게 되는 것 같았다. 오전부터 많은 엄마들, 할머니들, 종종 할아버지들이 아이들을 돌보며 놀이터로 나온다. 조부모가 아이들 돌보는 모습은 한국이나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나 폴란드나 매한가지였다. 초면에도 인사 나누고 말을 섞고 친구가 되는 데는 애나 어른이나 놀이터가 최고였다. 

그저 집 가까이에 공원, 놀이터가 있고, 저들이 뛰노는 것을 멀찌감치 지켜보면 육아의 절반은 해결되는지도 모른다. 그 단조로움만으로도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었는데...... 어쩌면 장기여행은, 한달살기는 날 위한 핑계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코토브 Mokotów에 일주일동안 지내면서 날씨만 좋으면 오전 산책으로 와지엔키 파크Łazienki Królewskie를 찾았다. 아내에겐 단연코 와지엔키 공원이 바르샤바에서 일등이었다. 여행을 마친 이후에도, 두고두고 아내가 극찬을 하고 그리워하는 와지엔키 파크 Łazienki Królewskie는 키 큰 수목에 잘 드리워진 그늘로 이뤄진 넓은 공원이다. 거의 열흘간 매일 산책을 찾았는데, 크기가 워낙 커서 입구와 출구를 달리하며 삼림욕을 했다. 그렇게 바르샤바 한달살기의 오전 중 절반은 이 공원을 걸었다.

친구 Kuba가 공원 이름 와지엔키Łazienki는 폴란드말로 bathroom인데, 자기는 그렇게 이름 붙은 사연을 모르겠다고 했다. 아내에게 알려줬더니, 원래 중세, 근대시대 궁전에는 화장실을 대신할 커다란 공원을 조성하고 귀족들이 품위 있는 척하다가도 널따란 공원 어디서든 화장실 용무를 보지 않았냐며, 그래서 화장실이란 이름이 붙지 않았을까 말했다. 웹에서 검색해보니 사냥을 마친 귀족들이 여기서 목욕을 해서 와지엔키 파크 Łazienki Królewskie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아내는 이 공원에서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 건강해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이렇게 좋은 공원은 치유의 힘이 있다. 평일에도 현장학습 나온 학생 그룹이 많았고, 여행객보다는 현지인들이 일상 중에 편하게 휴식차 찾는 곳이었다. 와지엔키 파크 Łazienki Królewskie 와의 첫 만남 이후, 우리의 모코토브 일상은 정해졌다. 오전엔 공원 산책, 점심식사는 저렴하게 한식당 도시락, 오후엔 Nowy teatr 극장 나들이... 단조롭고 동네 사람 같은 생활이었다.

공원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연못에 오리 구경, 가끔 숲 속에서 뛰어나온 야생 공작새를 쫓는 추격전, 아이스크림 및 와플가게에서 소소한 군것질, 그러다가 잔디에서 현지 아이들과 아무 개연성 없이 시작된 술래잡기를 하다가 귀가하는 게 공원 나들이의 전부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공원에서 죽치고 있는 걸 잘 못한다. 아이들과 아내가 아니면, 구태여 시도해보지 않았을 새로운 여행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가족들은 내가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을 걸어오고 소통을 하고 내가 누구인지 확인해줬다.

일요일 오후, 아들과 둘이서 산책 나온 현지인 아빠와 긴 얘기를 나눴다. 한국의 정치, 경제에 대해 잘 모른다기에 지난 2~3년간의 여정(탄핵, 새 대통령 선출, 북미 간의 대화 등)부터 동북아시아의 경제와 패권 문제까지 별의별 얘기를 다 나눴다. 폴란드를 포함한 유럽 전역이 우파가 득세해서 걱정이고 싸우고 있다는 그의 말에, 미중일이 그러하여 한국도 걱정이란 얘기 등으로 응답했다. 그간 몰랐던 폴란드 사정을 알게 되어 유익했고, 귀국하면 매일 영어뉴스 공부를 해서 실력을 제대로 키워야겠다는 절실함도 느꼈다.


아내가 류블랴나에서 다음 행선지를 바르샤바 Warszawa로 급선회를 한 이후, 따로 바르샤바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아내가 선택했으니, 그 이후 여정도 아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는 게 큰 이유지만 무언가 계획하면 자꾸 욕심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저 아이들 좋아하는 거나 하고 다니면 되지... 많이 내려놓고 출발했던 바르샤바행이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공원, 놀이터, 숙소 가까운 극장이 움직이는 범위였다.

그런데 공항에서 내려 첫 숙소로 향할 때, 저 멀리 독특하고 높은 건물을 본 것을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Palace of Culture and Science, Pałac Kultury i Nauki, 문화 과학 궁전쯤 되려나? 유럽연합에서 8번째로 높은 건물이라는 문화과학궁전은 스탈린이 폴란드에 증여 건축한 건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회주의 체제의 산물이라며 바르샤바 Warszawa 시민들은 저 상징물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하는데, 일단 눈에 띄게 우뚝 솟은 그 웅장함에 반해서, 새롭게 시작한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키운 계기가 되었다.

하루는 둘째가 낮잠에서 깨자, 나는 문화과학궁전에 가보자고 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인근 공원, 놀이터를 가고 싶어 했다. 나는 문화과학궁전에서 공연 일정도 확인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트램으로 네 정거장만 이동하면 코 앞인 게 마음에 들어서, 공원은 언제든 갈 수 있으니 저 마천루부터 가보자고 재촉했다. 

하지만 이날은 그냥 공원에 가는 게 맞았다. 내 욕심 때문에 날씨나 컨디션이 맞지 않는데 무리해서 랜드마크를 찾은 셈이 된 것이다. 화가 난 아내가 "꼭 그렇게 자기에게만 의미가 있는 이벤트를 만들어야 했어?" 하며 폐부를 찔러온다.

아무 공부도 준비도 없이 찾은 바르샤바 Warszawa지만 막상 발을 디디니 가보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았다. 그리고 아이들의 다양한 표정이 담긴 사진도 욕심이 났다. 문화과학궁전 길 건너에 쇼핑센터에 가려다가 인파에 질려서 차 한잔 마시고 숙소 인근 공원에 가기로 한다. 헛걸음 한 셈이다. 이렇게 욕심과 현실은 궤를 달리 했다. 생각도 욕망도 다른 네 사람이, 컨디션도 다 다르고 모두가 만족하긴 어렵다.

놀이터와 공원만 찾는 일상 속에 한 번씩 특별한 장소를 욕심냈는데, 이마저도 다 생각이 달랐다. 큰아이가 지나가며 본 문화과학궁전의 거미 전시회 현수막을 떠올리며 거길 꼭 가야겠단다. 전망대도 아니고 공연도 아니고 거미 전시회 때문에 우린 해 질 무렵 문화과학궁전에 다시 갔다. 크로아티아 자다르에선 뱀 전시회를, 바르샤바에선 거미 전시회를 기어코 가보신 큰따님, 엉겁결에 따라온 둘째 따님, 그렇게 우리는 욕망이 엇갈렸다. 그래도 문화과학궁전은 이후에도 여러 번 찾을 만큼 공간 자체가 매력 있고 좋았다

바르샤바 와서 대부분 홍보물에서 말하고, 친구 Kuba도 추천한 곳이 Copernicus Science Centre이다. 코페르니쿠스 과학센터에 가면 애들이 너무 좋아한다라, 류블랴나에서도 과학실험을 즐긴 큰아이를 생각해서 전철 타고 방문했다. 그런데 이곳 Copernicus Science Centre는 관람객이 너무 많았다. 공간도 넓고 실험 도구도 많은데 아이들에게 기회가 쉬이 오지 않는다. 그리고 3D 영화관은 둘째는 어리다고 못 들어가게 하고 큰아이는 혼자 들어가긴에 어려서 안된단다. 결국 여기서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경험했다.

그리고 우연히 브로츠와프 Wrocław에 살고 계시는 교민 가족, 건이, 준이와 그들의 엄마를 만나게 된다. 아빠 업무 일정으로 바르샤바 놀러 온 건이, 준이네는 우리 따님들과 나이, 터울이 똑같았다. 덕분에 짧은 시간이지만 잘 어울려 놀았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아니 결혼하기 전에, 이른바 여행을 떠나면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목록으로 만들어서 하나씩 해내는 것에서 만족감을 얻었다. 돌이켜보면 어른으로서의 삶은 그런 식으로 늘 진행되었다. 목표를 정하고 준비를 하고 달성하는 방식 말이다. 하지만 아빠 육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아내와 아이들과 매 순간 붙어 있으면서 생이 작동하는 방식이 기존에 내가 배우고 살아온 방식과 다르단 것을 느끼게 된다. 단순하고 반복되고 뻔한 하루라도, 그 순간 만족스럽게 웃을 수 있으면 그게 행복이고, 그게 특별함이다. 설사 내가 낸 욕심을 채우지 못한다고 해도, 아이들의 즐거움은 기대치 않은 곳에서 오는 특수한 경험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아이들과의 교감은 은행 금고가 아니다. 잔고가 쌓이지도 복리로 불어나지도 않는다. 그날그날 정성이 필요한 작은 화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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