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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 아빠 Nov 21. 2019

육아도 여행도 인생도, 예정 없이 내려진 선물

- 웅장한 산자락의 크란스카고라에서 소박한 콜라주 예술의 크란까지

인생은 결국, 결코 잘하리라는 보장도 없이 - 거듭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가 몇 가지의 간단한 항목으로 요약되고 정리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도 버티고 있는, 그래서 아무 일 없이 흘러가고 있는 우리의 삶은 - 실은 그래서 기적이다.
                                                                - 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中에서


우리 부부는 첫째 아이를 낳고 3년 넘게 둘째를 가질 계획이 없었다. 꿈도 꾸지 않았고, 실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 우리는 둘째를 낳았고, 밑그림 없이 전체를 그려낸 그림처럼 육아휴직을 선택하고, 예정 없이 2년을 집에 있었다. 갑작스레 육아휴직여행 타이틀을 걸고, 네 식구는 부랴부랴 짐을 싸서 유럽으로 장기여행을 떠났다. 변곡점을 찾으라면 있겠지만 길게 풀어놓고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흐름과 기운에 치여서 기적처럼 여기까지 달려왔다.

여행으로 길 위에 서있는 하루하루를 넘길수록, 이 이야기를 어떻게 마감할지, 어떻게 마무리할지 궁금했다. 어쩌면 평이하고 무난한 결말일 수 있는데, 은근히 특별하고 위대한 엔딩에 대한 기대감에 양쪽 귀가 벌겋게 달궈지는 기분이었다.

나 스스로는 속도전쟁이 벌어지는 생계와 커리어에 목을 맨 잘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해야 한다고 말하는 세상 저변의 것을 보기 좋게 뒤틀고 선택한 육아휴직, 여행이 좋았고 으쓱했다. 어쩌면 실제로 내 앞에 펼쳐질 일들을 진지하게 상상하지 않고,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에 함의된 은유나 상징이 특별했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내가 설정한 인생 안에서만 그런 척한 것이지, 진정 가족들과 부딪히고 아이와 호흡하는 것에는 무지했던 불량 아빠였다. 어쩌면 이런 불량 아빠는 '프로'의 세계에 맹렬히 돌진하는 사람들에겐 약한 자들의 현실 도피쯤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하루가, 일상이, 생각보다 촘촘하고 느리게 흘러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무심코 올려다본 파란 하늘에 넋 놓고 1분 동안 서있어 본 사람이라면, 우울증에 걸린 육아휴직 아빠가 가족들과 떠난 이런 방식이 흥미로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 같은 부모는 앞으로도, 10년 후에도 계속 나올 것이다. 최소한 몽상가들이 꿈꾸는 좋은 세상이 오기 전까진 청춘들이 넘어지고 패배하며 벽에 부딪히는 일이 반복되는 이상 각자 방식의 일탈로부터 위로받고 싶을 것이다.


크란스카고라Kranjska Gora부터는 한국에서 정해놓은 일정이 아니라, 여행 다니며 아내와 상의하며 결정한 코스와 일정, 숙소였다. 2주 만에 귀국할지, 4개월을 보낼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는 마낭에 일정을 모두 짜 놓고 나올 수도 없었거니와 무엇이 우리 취향과 맞을지도 궁금했고 어떻게 이야기가 풀려나갈지 열린 전개를 기대했던 터였다.

보힌 Bohinj 다음 일정으로 크란스카고라를 넣은 데는 트리글라브 Triglav 산을 적극적으로 누려보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조금 애매해졌다. 일단 좀 춥기도 했고 날씨도 소나기가 퍼부은 날도 있었고, 아내는 컨디션 난조를 보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세탁기 있는 숙소에 가자 그간 대강대강 손빨래했던 옷들을 아내는 대대적으로 돌리기 시작해서 졸지에 집순이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곳, 아이들과 무엇을 해야 하나 좀 애매했다. 큰아이는 자전거를 배우지 못해 가르치려 해도 보조바퀴 없이 처음부터 뒤에서 잡아주는 게 쉽지 않았으니 자전거로 오솔길 달리는 낭만은 접었다. 결국 좋은 경치를 두고 슬렁슬렁 산책을 나서는데, 여름임에도 은근 으스스하고 갈 곳 많아도 어딜 좋아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쯤 되니 이런 2~5일 간격으로 짐을 싸고 푸는 여행에 다들 지쳤다는 인상을 받았다.

야스나 호수 Jezero Jasna는 산책하긴 좋았으나 수영하긴 추웠다. 유럽 아이들은 상관 안 하고 팬티바람으로 뛰어들었지만. 둘째 아이가 워낙 호수로 돌진해서 당황스러웠다. 큰아이는 호숫가를 귀엽게 헤엄치는 새끼오리에게 과자를 주었는데, 여행 온 독일 언니들(혹은 오스트리아 언니들)이 "어우~ 저런 거 먹이로 주면 생태계나 쟤들 건강이나 다 나쁠 텐데..."라고 말하는 듯 구시렁대었다. 눈치가 보여 큰아이에게 그만 주자 했다.

아내가 숙소에서 낮잠을 청해서, 아이들과 드라이브 나갔다. 사실 한국에서부터 꼭 오르고 싶은 산 코스인 Vršič pass를 “에라~모르겠다!”하며 올랐다. 브르시치 패스라 읽어야 하나? 여하튼 바이크족에게도 나름 유명한 트리글라브 Triglav 산을 오르는 구불구불 도로인데, 멀미는 안 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둘째 아이가 짜증이 나서 아주 곤혹스러웠다. 

그리고 산 중턱에 나름 유명한 Russian Chapel 예배당은, 1차 세계대전엔가 러시아 죄수들이 지은 나무 예배당이라고 하는데, 이게 왜 여기 있어 싶게 생뚱맞은 게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그리고 Vršič pass 정상에 오르니 비가 내렸다. 상상만 했지 못 올 줄 알았는데, 나름 한가하게 올라와서 다행이지 싶었다. 


겨울에는 스키 천국, 여름엔 바이크 천국인 푸른 초원에서 아이들은 신나게 뛰놀았다. 초원 옆 커피숍에는 간이 놀이터가 있었고, 주로 독일어 쓰는 관광객들을 많이 마주쳤다. 아이가 있는 집은 대부분 둘 이상이고 외동 키우는 집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유러피언 엄마들이 대부분 나이가 많았다. 우리 가족보다 더 늦은 나이에 막내 아이를 출산을 했을 텐데 꽤나 건강했다. 한두 살 하는 아이를 캐빈에 태우고 자전거 타며 달리는 중년부부들까지 건강하고 놀라웠다. 난 초원에 풀어놓은 아이들 뒤쫓기도 벅찬데 말이다.


크란스카고라Kranjska Gora에서 류블랴나로 돌아가는 길, 류블랴나에서 한 달 살기가 예정된 시점, 차로 이동 중에 시간이 애매하게 뜬 상황, 우리가 크란 Kranj에 잠시 머문 몇 가지 우연과 필연의 조합이었다. 물론 슬로베니아 한인회 회장님께서 추천해주신 기억도 이유라면 이유다. 

크란이란 작은 도시는 정말 한산했다. 그래도 나름 휴가지 중심으로 다니다가, 이름은 있되 핫하지 않은 곳은 슬로베니아에서 처음이었다. 그래도 류블랴나 공항은 실은 크란에서 더 가까운데, 굳이 사람들이 크란을 찾는 것 같진 않았다. 마침 주말을 앞두고 저녁엔 페스티벌이 있는데도 한산했다. 

그런데 도시가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크란은 사바강을 끼고 작은 섬 지역엔 대형 쇼핑몰이 몰려있고, 바로 옆 구시가는 메인도로 하나, 그것도 차 없는 도로에 작은 건물들이 다 모여있어서, 대충 걸으면 20분도 안 걸려서 구시가를 다 둘러볼 수 있었다. 우리에겐 시간이 충분했고 크란 주차장 주차비도 무료여서, 더 어슬렁거리게 되었다.

그런데, 크란은 예술가의 감성과 감각이 충만했다. 아내가 관심 있고 좋아하는 다양한 종류의 꼴라쥬 아트가 도시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정말 우연히 Layerjeva hiša라는 커피숍 및 갤러리에 들어서는데 한참 꼴라쥬 전시회가 진행 중이었다

간혹 삶에서 보너스 같은 게 있곤 한다. 계획도 준비도 노력도 없이 소소한 선물 같은 그런 것, 우리에게 크란은 그랬다.

이제 정말 한달살기하러 류블랴나에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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