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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비즈 Jul 30. 2020

조선 건국 개국공신이 2인자 자리를 지켜낸 방법

역사로 알아보는 전문경영인이 살아남는 법

창업 군주에게 개국공신이자 핵심 참모의 존재는 가장 필요하지만 동시에 가장 위협적이다. 창업기 재상은 생존을 위해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창업 이후 미련 없이 초야에 묻히든가, 철저하게 일인자에게 욕심과 야망이 없다는 것을 호소하면서 실무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초대 재상이었던 '조준'은 후자를 택했다.

 

DBR 150호에는 고려 말 조선 건국의 개국공신이었던 조준이 자신의 원대한 꿈, 토지개혁을 완수하고자 다소 굴종적이지만 2인자의 자리를 어떻게 지켜냈는지 그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들짐승이 다 없어지고 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 (野獸已盡獵狗烹)
- 사마천의 사기(史記) -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이 구절은 큰 공을 세웠지만 자신이 섬겼던 주군에 의해 숙청되고 마는 개국공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묘사한 것이다.

 

'사냥을 하러 가서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는 쓸모가 없어지니 삶아 먹는다'라는 의미의 사자성어, 토사구팽(兎死狗烹)으로도 표현된다. 쉽게 말해 필요할 때 요긴하게 써먹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혹하게 버린다는 것이다.

 

건국의 원훈이자 수석 참모인 재상일수록 목숨은 위태로웠다. 창업과정에서 쌓인 재상의 지분이 왕권을 확립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천하를 다스리고 새로운 국가 시스템을 기획해낼 정도의 걸출한 능력을 가지고 혹시 군주에게 대항하지는 않을까 일인자는 두려운 것이다.

 

특히 일인자를 잇는 후계자 입장에서 개국공신은 더 큰 부담이다. 새 임금에 비해 개국공신인 재상은 나이와 경륜이 훨씬 위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재상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도 없다. 필요로 할 때만 자문 역할을 해주면 좋겠지만 개국공신 재상의 무게를 내세우며 사사건건 국정에 간섭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렇다 보니 애초에 재상을 제거해 이런 위협요인을 근본적으로 차단해버리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명나라의 법과 제도를 만든 이선장과 조선왕조를 설계한 정도전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자신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군주를 만나거나 아예 군주에게 반기를 드는 게 아닌 이상 창업기 재상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단 두 가지였다. 대업을 이룬 후 미련 없이 떠나버리는 것과 철저히 군주에게 맞춰가며 행정가로서의 임무에만 집중하는 것뿐이다.

 

이 두 가지 선택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나는 권력에 욕심이 없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창업자에게 끊임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 한 몸 살아남기 위한 처절하고 비굴한 태도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왕조 건설에 참여한 개국 재상으로서 그 꿈을 이어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다.

 

조선의 초대 재상이었던 조준은 정도전과 더불어 조선 건국을 주도한 인물로 위의 두 가지 선택 중 후자에 해당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건국과 함께 추진된 각종 제도와 개혁 정책이 안정적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실무를 책임졌다.

 

특히 조선 초 토지제도인 과전법 체제 확립에 있어 조준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혁신에 앞장 서던 그가 조선이 건국되고 재상에 오르고 난 후부터 오로지 행정가로서의 임무에만 집중하며 '실무형' 재상으로만 변모했다. 조준의 일화를 통해 그 이유를 살펴보자.

 

 

토지 개혁가에서 조선 건국의 개국공신이 된 '조준'

 

조준은 '백성에게는 먹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라 생각했다. 그래서 관직생활을 하는 내내 토지제도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다. 고려의 당시 토지제도는 나랏일을 하는 군인과 관료에게 직급에 맞는 토지를 나누어주고 당사자가 일을 그만두거나 죽으면 국가가 환수해가는 체계였다.

 

조준은 백성이 근본이란 인정(人政)의 실현을 기치로 내걸며 당시 토지제도에 문제점을 느꼈고 토지개혁을 추진한다. 조준은 사적인 토지교환을 금지하고 토지 환수 절차를 엄격하게 하여 토지 소유욕을 제어하고자 했다. 1390년 9월, 권문세족들이 이중삼중으로 가지고 있던 토지문서를 전면 소각하고 이듬해 5월 새로운 토지제인 과전법을 완성한다.

 

 

토지개혁의 과정에서 기득권의 낡은 시스템이 가진 한계를 느낀 조준은 단순히 체제 내에서 이루어지는 개혁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이성계에 합류하게 된다. 정도전, 남은 등과 함께 조선이란 새 왕조의 건설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려를 지키려던 정몽주가 이성계의 측근을 제거하려 했을 때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사람은 이성계의 보좌역인 조준"이라고 거론했을 정도로 조준은 조선 건국 세력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다.

 


 


두 명의 군주를 섬긴 킹 메이커 '조준'의 처세술

 

조준은 조선의 개국과 함께 우시중에 올랐고 수도권 일대의 군권을 장악하는 경기도통사란 막강한 관직을 위임받게 된다. 그러나 조준은 이 자리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린다.

 

상소에서 조준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며 토지개혁 등 자신이 이룬 성과는 오로지 태조 덕분이라는 점을 강조했고 조선이 건설되기까지 태조의 사소한 선택과 행동들에 일일이 당위성을 부여하며 예찬했다.

 

자신의 권력이 늘어나면서 생겨날 의심을 피함과 동시에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정리해 태조의 권위를 세워주고자 한 것이다.

 

조준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경기 지역뿐 아니라 다섯 개 도의 병력을 총괄하는 오도도총제사로 임명되기까지 한다. 이때부터 조준은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주어진 권력 크기만큼 위험도 커졌다는 걸 느낀 것이다.

 

조준은 각종 제도와 의례 절차의 세부사항을 마련하며 새 왕조가 기틀을 다져가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해 힘썼지만 정치적 이슈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권력을 향한 조준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1차 왕자의 난 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1398년 8월 26일 세자의 자리가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자신이 아닌 배다른 이복동생인 방석에게로 돌아간 데 불만을 품고 있던 정안군(훗날의 태종)은 무력을 동원해 방석의 지지 세력을 숙청했다. 정안군은 정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당시 수상이었던 좌정승 조준을 호출한다.

 

당시 조준은 명색이 재상으로서 어울리지 않는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인다. 만약 조준이 정안군의 행위를 두둔하면 태조를 향한 반역으로 몰릴 것이고 정안군에 반대하면 자신 또한 방석의 일파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준은 태종 5년(1405)에 죽기 전까지 재상의 자리를 지킨다. 태종을 확고하게 지지해 준 것도 아닌데 태종은 왜 조준을 계속해서 재상으로 곁에 뒀을까.

 

실제로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태종은 조준이 죽은 뒤에도 어진 정승을 논평할 때면 조준을 모범으로 삼으라 말할 정도로 조준을 높게 평가했다.

 

조준은 재상 시절 "임금이 내린 명령이라 할지라도 옳지 못한 점이 있으면 이를 멈추게 하라"고 말했을 정도로 예스맨 타입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태종은 본인의 왕권을 강화하는 데 방해물이 될 수도 있는 조준을 아꼈을까.

 

조준은 정치적 사안에 나서지 않는 태도로 일관했다. 권력 욕심과 야망에는 뜻이 없다는 것을 내비치고자 한 것으로 풀이된다. 자기가 먼저 자신의 약점을 군주에게 드러내 군주의 의심을 완화시키고 같은 편이라는 인식을 군주에게 심어준 것이다. 동시에 조준은 완벽한 행정가였다.

 

조준은 태조와 태종이란 카리마스가 강한 두 명의 군주를 묵묵히 보좌하며 시대에 걸맞은 행정정책으로 국정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국가 경영에 행정적으로 큰 도움이 되는 재상인데다가, 권력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그런 2인자를 내칠 군주는 없을 것이다.



탁월한 능력으로 많은 경영 성과를 이뤄낸 전문경영인이 불명예 퇴진을 하는 경우가 있다. 오너 또는 이사회와의 갈등 때문이다.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전문경영인이라 할지라도 그 권력은 '위임'된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힘을 부여한 사람이 언제든 그 권력을 회수해 갈 수 있다.

 

따라서 전문경영인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 경영권자와 우호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때 참고할 만한 것이 조준의 처세술이다.

 

조준은 행정 실무에 집중해 대체 불가능한 본인의 전문 영역을 구축했고 권력에 욕심이 없다는 걸 계속해서 내비친 결과 두 명의 왕을 섬길 수 있었다. 개국공신이자 태조의 핵심 참모였던 조준이 태종 즉위 후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생존법이라 할 수 있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50호

필자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인터비즈 박소영 김재형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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