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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비즈 Jun 08. 2020

냉장보관 필요 없는 종이팩, '이 기업'에서 시작됐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가 우유칸 앞에 선다. 오늘은 어떤 우유를 살까 고민하던 찰나, 냉장고 말고도 실온에 있는 우유들이 눈에 들어온다. 문득 '실온에 우유를 오래 두면 상하지 않나?'라는 생각에 살펴보니 모두 '테트라팩(Tetra Pak)'이라는 로고가 박혀있다. 종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플라스틱도 아닌 포장지로 감싸져있다. 우유 코너 외에도 다양한 음료 패키지에서 흔히 봤던 그런 포장재다.



익숙하지만 낯선 테트라팩.. 어떻게 만들어졌지?


이 음료들의 포장지는 모두 테트라 팩이다.


테트라팩을 만든 기업의 이름 역시 '테트라팩'이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지만 의외로(?) 많은 제품들이 이 테트라팩 포장재를 사용하고 있다. 보기에 간단해 보이는 테트라팩은 그리 간단하게 만들어지진 않았다.


테트라팩을 만든 루벤 라우싱(Ruben Rausing)은 1930년대, 한 투자자와 함께 포장법 개발 회사를 운영했다. 그는 평소 식료품 유통 기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스웨덴에서 유통되는 우유들이 대부분 유리병이나 양철통에 담겨 판매되는 것을 보게 된다. 당시 양철통은 위생적이지 않고, 유리병은 제작비와 유통비가 굉장히 높았다. 설상가상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원자재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유리병을 다시 회수한다 해도 이 역시 깨끗이 씻기 어려워 소비자들도 구매를 꺼렸다. 라우싱은 새로운 우유 포장법과 유통법을 개선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우유의 별다른 포장방법이 없어 유리병이나 양철통을 사용했다.│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라우싱은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의 고충을 줄일 수 있는 새로운 우유 포장법에 대해 연구했다. 1943년 라우싱은 아내 엘리자베스와 식사를 하던 도중 이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내는 고심하던 중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긴 튜브로 우유가 끊기지 않게 채운 다음, 튜브를 끊어내면서 바로 밀봉하면 어떨까요?" 우유가 끊기지 않으면 포장 안의 기포가 제거되어 불순물이 사라질 것이라는 가정이었다.


라우싱은 높은 열을 가해 밀봉한다면 우유에서 탄맛이 날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우유에서는 탄맛이 나지 않았다. 이때 우유가 채워진 부분이 밀봉되면서 용기가 4면체 모양을 띄게 됐다. 라우싱은 그 모양에서 착안해 그리스어로 4를 가리키는 '테트라(Tetra)'를 넣어 '테트라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긴 튜브에 우유를 흘려보내고 뜨거운 열로 밀봉해 만들어진 사면체 팩, 테트라팩


하지만 우유를 끊지 않고 주입하는 동시에 진공포장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포장지와 내용물을 빠르게 살균하고 프로세스가 자동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법도 마련해야 했다. 우유가 다 포장된 후에는 빈틈없이 쌓을 수 있도록 하는 이동 방법도 필요했다.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마침내 1951년, 라우싱은 에릭 발렌베르크(Erik Wallenberg)박사와 함께 삼각뿔 형태의 4면체 '테트라팩 클래식'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라우싱의 동료 해리 예룬트(Harry Jarund)는 18개의 테트라팩 용기를 깔끔하고 촘촘히 쌓을 수 있는 여섯 면의 바스켓을 고안해냈다.


(좌) 여섯 면으로 이루어진 바스켓 (중) 테트라 클래식 (우) 루벤라우싱 박사


1952년, 테트라팩 컴퍼니는 테트라 클래식 생산 기계를 만들어 자신들의 포장 시스템을 스웨덴의 한 낙농협회에 납품했다. 이를 시작으로 1961년에는 무균 포장 용기인 '테트라 클래식 아셉틱(Aseptic:무균)'을 개발해 완전 멸균 상태로 우유를 포장했다. 아셉틱 개발 이후 테트라팩은 우유를 더욱 신선하고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게 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1969년부터는 벽돌 형태의 직육면체 패키지를 출시하면서 세계적으로 뻗어나갔다. 이외에도 현재 판매되는 초코에몽, 지코(ZICO)와 같은 팔각형 패키지 테트라 프리즈마 아셉틱(Tetra Brik Aseptic)부터 날렵한 쐐기모양의 테트라 웨지 아셉틱(Tetra Wedge Aseptic), 뚜껑형 테트라 탑(Tetra Top)과 테트라 렉스(Tetra Rex)까지 다양한 형태를 제작했다.


시중에 다양하게 판매되는 테트라 종류들│출처 인터비즈 자체 제작



포장재만 바꿨을 뿐인데 '이것'까지 챙길 수 있다?


겉보기엔 조금 더 두꺼운 종이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테트라팩은 종이팩과는 확연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경제적인 면에서 기존 포장재보다 효율이 높다. 테트라팩은 액체가 밖으로 새지 않는 알루미늄 코팅과 폴리에틸렌 코팅이 되어있다. 이는 액체를 흡수하지 않으면서 액체가 밖으로 새지 않아 내구성을 높이는 방식이다. 특히 알루미늄 호일은 포장 내용물 안에 산소와 빛의 침투를 막아 냉장 처리나 방부제 없이도 내용물을 안전하고 신선하게 보존 가능하다.


테트라팩으로 포장 끝나면 냉장차나 냉장기차 없이도 제품을 출하할 수 있다. 이는 식품 가공 업체의 배송이나 유통기한으로 인한 손실 비용을 절감시키는 요소다. 종이팩의 가벼운 무게도 출하비용을 급격히 감소시킨다. 또한 소비자 입장에서도 과거 양철통 냄새와 같은 이상한 냄새가 풍기지 않아 좋고, 종이팩의 한곳을 찢어 내용물을 붓거나 직접 마시면 그만이었다. 쉽게 깨지지 않아 내용물이 손실되거나 깨진 유리 파편에 노출될 위험도 없다.



환경적인 측면에서도 이점이 있다. 테트라팩은 냉장보관이 필요하지 않아 냉장으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을 감소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유통 시에도 유리병 우유는 전체 무게 중 포장재가 40%를 차지하지만, 테트라 팩 우유는 5%에 불과해 유통 과정 속 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 현재는 재활용도 100% 가능해 국제삼림관리협회(Forest Stewardship Council™)에서 '가공·유통 FSC'를 받아 친환경 포장재로 인정받았다.


루벤 라우싱 박사는 '포장지는 그것을 제작하는데 드는 비용보다 더 많은 돈을 아낄 수 있어야 한다(A package should save more than its costs)'는 창업 원칙을 세워 현재까지도 "소중한 것을 지킵니다(Protect What's Good)"라는 모토 아래 각국에 맞춘 환경 관련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2018년도 테트라팩이 참여한 난빛축제와 에코트리 행사


보이지 않는 수요를 찾거나 수요를 만들거나


현재 테트라팩은 전 세계 170여 개국, 2600여 개의 브랜드를 고객으로 두고 있다. 2018년도에 판매된 패키지만 1890억 개가 넘는다. 하지만 이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환영받은 것은 아니다. 테트라팩이 첫 출시된 유럽 국가와 달리, 문화적 환경이 다른 '미국' 시장을 공략하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냉장고 보급이 빨랐던 미국은 1970년에 이르러 대부분의 가정이 냉장고를 보유하고 있었다. 거대한 냉장고가 한가운데 자리 잡은 미국식 부엌은 매일 식료품을 소량으로 구입하는 유럽인과 달리 일주일치 식료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즉, 미국인들은 상하기 쉬운 음식이 냉장보관되지 않으면 불신할 수밖에 없는 조건으로 살아온 것이다. 당연히 '실온에서 보관 가능하다'라는 테트라팩의 장점도 메리트가 없었다.


하지만 테트라팩은 세계 최대의 소비시장인 미국을 포기할 수 없었다. 기존과는 다른 시장 공략법으로 미국 소비자 시장을 직접적으로 공략하는 것 대신, 기업 고객에 눈을 돌렸다. 이미 냉장고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보다 기업과 레스토랑을 설득하는 게 더 수월했다. 기업이나 레스토랑의 경우, 테트라팩을 사용하니 유통과 보관 과정에 들어가는 냉장시스템과 에너지 비용 절감되어 하나둘씩 테트라팩을 찾기 시작했다. 최종 소비자 대신 식료품점 등의 소매상을 공략하니 '보이지 않는 수요'가 시작된 것이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음료도 테트라팩을 사용 중이다.│출처 김혜연 인턴


또 다른 거대 시장 '중국'에 진출할 때는 아예 우유 보급 운동부터 벌였다. 1990년대까지 중국은 우유가 널리 보급되지 않아 우유 포장재에 대한 수요도 적었다. 테트라팩은 부모와 교사 등을 상대로 우유가 영양공급에 얼마나 좋은지 교육하고 중국에서 생산, 가공되는 원유의 품질 향상을 위해 낙농업자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다.테트라팩의 직접적인 고객은 테트라팩 서비스를 구매하는 식품 포장업체지만, 그 고객들의 고객인 식료품이나 최종 소비자들까지 생각한 전략이었다.


테트라팩은 이제 음료뿐 아니라 치즈, 아이스크림, 채소, 동물의 사료 등 다양한 패키징 제품을 만들고 있다. 심지어 주류 중에서도 '하이클래스'로 불리는 와인까지 테트라의 포장기법이 사용되고 있다. 기존의 와인병 하나를 운송할 때는 운송 중량의 절반이 포장재지만 테트라팩을 쓰면 93퍼센트가 와인이고 나머지 7퍼센트만이 포장이다. 마개 디자인을 추가한 테트라 프리즈마는 내용물을 따르기 쉽고 개봉 후 다시 봉할 수 있어 와인 용기로는 아주 매력적이다. 대표적으로 러시아의 코몬 사버(Comon Sava), 칠레의 소비뇽 블랑 (Sauvignon Blanc), 미국의 벤단지(Vendange)등이 테트라팩으로 포장된 와인을 판매 중이다.


경제적, 환경적, 디자인적으로도 장점이 많은 와인팩│출처 Comon Sava, Vendange


오늘날 테트라팩은 무균팩 시장에서 80%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2018년 순 매출은 15조원을 넘어섰고, 2010년 이후 모든 가치사슬에 대해 누적 총 10만 톤 이상의 CO2를 절약하고 있다. 테트라팩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이들이 찾는 포장재이지만, 여전히 처음처럼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포장재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인터비즈 박은애 조정현 / 그래픽 김도윤 inter-biz@naver.com


※ 출처 미표기 이미지테트라팩 코리아 블로그, 페이스북

※ 참고자료디맨드 : 세상의 수요를 미리 알아챈 사람들 (에이드리언 슬라이 워츠키, 칼 웨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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