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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비즈 Jun 28. 2020

미국 튤립 농가가 코로나에서 살아남은 이야기


지난해 이맘때였다. 친한 94학번 고등학교 동기 5명이 오랜만에 모였다. 이들은 미국 시애틀에서 북쪽으로 차를 타고 1시간 반 정도 가면 나오는 마운트 버논(Mount Vernon) 고교 농구팀의 선수와 치어리더 및 응원단장 출신. 고교 졸업 후 각각 IT업계와 법조계, 보험업계 등으로 진출했지만 서로 연락의 끈은 놓지 않았다.


다섯은 일찌감치 모여 낮술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함께 튤립 농장을 인수하기로 의기투합했다. 고교 때 아르바이트로 튤립 농장에서 일해본 경험도 있는 터였다. 그리고 그렇게 2019년 여름 마운트 버논에 30 에이커(약 3만7000평) 짜리 튤립 농장을 사들였다. 2명의 여성 레이첼 워드 스파와서와 안젤라 스피어, 3명의 남성 랜디 하워드와 도니 켈츠, 앤드류 밀러는 이렇게 초보 튤립 농장주가 됐다. 농장 이름은 ‘튤립 타운’.


마운트 버논이 속한 스카짓 카운티(Skagit County)는 미국 상업용 튤립의 75%를 재배하는 튤립의 중심지다. 이 곳에서 30 에이커 크기의 농장은 작은 축에 속한다. 그러니까 이 동네서 튤립 농장을 사는 건 사실 처참하게 실패하기는 어려운 투자인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시기였다.



튤립 농장은 10개월 동안 준비해서 2달 동안 1년 전체의 매출이 나오는 구조의 비즈니스다. 튤립은 이전 해에 준비를 해서 이듬해 3월과 4월에 찬란하게 꽃을 피운다. 그런데 하필 2020년 3월과 4월에는 이례적인 일이 일어났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미국을 덮치기 시작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예정 됐던 튤립 축제는 취소됐다. 튤립 농장 방문도, 레스토랑 매출도, 호텔 숙박도 없었다. 축제 시기에 매년 지역 경제에 흘러 들어오던 6500만 달러가 사라져버렸다.


튤립은 언제나와 같이 아름답고 찬란하게 폈지만 아무도 구경 오지 않았다. 더욱 큰 문제는 아무도 튤립을 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매년 수백만 달러어치 튤립을 구매하던 큰 손이었던 미국의 전국 규모 유통업체들은 화장실 휴지와 같은 사재기 품목에 신경 쓰느라 튤립은 관심 밖이었다. 5명의 동업자 겸 친구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


하지만 이들에겐 2가지 강점이 있었다. 30년 동안 쌓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었다. 그리고 튤립 농장 운영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다. 잠깐, 무경험이 강점이라고? 그렇다. 이들은 갑작스럽게 비즈니스모델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요즘 스타트업에서 잘 쓰는 말로 ‘피벗(pivot)’이라고 한다.) 과거의 관행에 따라 움직여야 할 것만 같은 관성이나 굳어져 버린 오래된 버릇 같은 타성은 없었다. 그런 점이 빠르게 변화할 수 있는 동력을 마련해 줬다. 그래서 이들은 1000년 동안 재배가 되어온 튤립을 그 동안 어떻게 팔았는지는 완전히 무시하고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3월 중순 주정부가 삶에 필수적이지 않은 업체는 문을 닫고 주민들은 집에만 있으라는 봉쇄령을 내렸을 때 관광객들의 농장 방문을 취소하는 전화가 잇따랐다. 하지만 그 중 몇몇은 방문 일정 취소하면서 혹시 튤립 꽃다발을 보내줄 수 있는지 문의했다. 튤립 농장은 꽃집과 달라서 튤립 구근을 팔기는 하지만 직접 꽃다발을 만들어 보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5명은 창고에 600개의 배송 상자가 있으니 그걸 이용해 꽃다발이라도 보내보자고 했다. 주문이 200건 정도 들어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갇혀있는 집을 꽃으로 꾸미고 싶었던 것 같다. 600개의 상자는 단 하루 만에 동이 났고 몇 주 안에 튤립 20송이로 이뤄진 꽃다발 8000개를 배송했다. 튤립 농장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수익원 이었다.


그 와중에도 미국의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와 사망자 수는 늘어만 갔다. 5명의 친구들은 환자들을 돌보며 고생하고 있는 간호사와 의사들의 이야기를 뉴스를 통해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병원으로 튤립을 보내주는 캠페인을 해보자는 생각을 해냈다. 이름하여 ‘Color for Courage’(용감한 자들에게 색색의 튤립을 보내자는 뜻) 캠페인이었다. 캠페인도 성공이었다. 15달러짜리 꽃다발 4700여개가 병원에 보내졌다.


하지만 매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튤립 농장은 여전히 적막했다. 봉쇄령 때문이었다. 농장 주인들만 즐기기엔 아까운 광경이었다. 그래서 밀러 씨는 매일 동틀 무렵과 해질녘에 튤립 농장을 돌아다니며 페이스북 라이브로 멋진 꽃밭의 모습을 방송했다. 주문에 감사한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고 멋진 오늘의 노을을 놓치지 말라는 충고도 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들 덕분에 코로나바이러스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튤립 농장은 미국의 어머니날(매년 5월 둘째 일요일)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미국의 어머니날은 발렌타인데이와 함께 화훼업체에겐 대목인 날로 카네이션뿐 아니라 다양한 꽃이 많이 팔린다. 여기에는 물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서로를 믿고 의지한 끈끈한 우정도 한몫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롭게 비즈니스모델을 피벗하는 과감함과 혁신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니 인생에 있어서 어떤 때는 아무 것도 모르는 무경험자가 더 잘 살아남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그건 단순히 소 뒷발로 쥐를 잡듯이 운에 의지한 게 아니다. 과거의 경험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운 덕분일 것이다. 그 자유로움은 빠르게 변화를 받아들이고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



※ 참고 글

- 뉴욕타임즈: How 5 Friends Helped a Tulip Farm Make It to Mother’s Day


필자 김선우

약력

-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인문지리학과 졸업

- 워싱턴대(시애틀) 경영학 석사

- 동아일보 기자

- 새로운 삶을 발견하기 위해 현재 미국 시애틀 근처 시골에서 작은 농장 운영 중

- <40세에 은퇴하다> 작가


인터비즈 박소영 김재형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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