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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비즈 Jun 26. 2020

나는 왜 사표를 냈나

40세까지 일한 걸로 묻어가는 한국 사회?


<한국 사회서 40살이 되자마자 회사를 떠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 국내 중앙 일간지 기자로 종횡무진 활약하다가 그동안 이뤘던 것을 뒤로 하고 농사를 짓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무엇을 느꼈기에 회사를 떠났을까요. 그가 갑작스레 새로운 삶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김선우 작가의 신간 '40세에 은퇴하다'(10월 출간 예정)를 보면 한국 직장 문화와 사회 분위기가 읽힙니다. 자기 주도적 선택이 삶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인터비즈가 책 내용을 일부 소개합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다니던 신문사에 사표를 내겠다는 뜻을 밝히고 인사를 다녔다. 회사 선후배들을 주로 만났고, 당시 지면 원고를 쓰는 필자들도 많이 만났는데, 극과 극의 2가지 의견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왜 그만두려는 거지? 김 기자 이제 마흔이잖아.
지금부터는 이제까지 쌓아온 걸로 사는 곳이 한국 사회야.
나이가 들수록 대접 받고 묻어가는
‘Seniority Based’ 사회의 기득권을 그냥 버리기 아깝지 않나.”


한 경영학과 교수의 조언이었다. 나이 마흔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생각은 많이 해봤지만 이런 식의 아주 현실적인 접근은 새로웠다. 40세까지 일한 걸로 묻어가는 사회라… 고민만 늘었다. 반대로 베스트셀러 작가인 한 심리학과 교수는 소주 한 잔을 사주며 잘 결정했다고 격려해줬다.


“사람들이 죽기 전에 가장 후회하는 일이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많이 갖지 못한 거라고 하잖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어떻게 보면 더 그래.
무엇보다 가족과 함께하는 삶이 우선이지.
잘 생각했네.


사표를 쓸 때 한 가지 생각만 했다. 지금 잡고 있는 줄이 아무리 좋아도 다른 줄을 잡기 위해서는 지금 잡고 있는 줄을 놓아야만 한다는 생각. 왜 다른 줄을 잡아야 하는지, 다른 줄이 어떤 줄인지, 다른 줄이 있기는 한 건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13년차 신문 기자인 나는 주눅이 들어 있었다. 갈수록 줄어드는 인쇄 매체의 영향력과 광고 때문에 기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분위기는 자존심 하나로 사는 기자들의 어깨를 처지게 만들었다. 비판은 전투력이라도 높여주지만 무관심은 슬프다. 그래도 어쩌랴, 조금씩 변화에 익숙해져갈 수밖에.


신문을 읽는 사람이 감소하면서 영향력도 줄어들고 있었지만 기자가 싫지는 않았다. 기자는 자율성이 가장 높은 직업 중 하나다. 똑같은 일을 다시 하게 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일이 항상 새롭다는 것도 장점이다. 어떤 사건의 최전선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축복이다. 나에게 기자는 분에 넘칠 만큼 다이내믹한 직업이었다.



사실 내가 지쳤던 가장 큰 원인은 신문 산업의 위기가 아니라 5년차 기러기 남편이자 아빠였기 때문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냥 기러기도 아니고 아이 하나 딸린 기러기. 첫째는 공부하는 엄마를 따라 미국에 살면서 거의 미국 사람이 다 되어가고 있었고, 둘째는 한국에서 양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지만 엄마의 존재를 엄마라는 단어로만 알면서 자라고 있었다. 아빠인 나조차도 둘째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집 밖에서 하루 16시간 이상씩 보내는 날이 많았다. 엄마 없이 사는 둘째는 사실 아빠 얼굴도 잘 보지 못하고 사는 셈이었다.


사표를 내겠다고 하자 미국에 있는 아내가 대뜸 미쳤냐고 했다. “당신은 회사 생활이 필요한 사람이야. 조직에 속해서 안정감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 왜 사표를 내? 내가 박사 그만두고 들어갈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지금 잡고 있는 줄, 가보지 않은 길, 기회비용과 리스크, 경력 관리… 수많은 생각들이 맴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사표를 쓸 때는 지금 잡고 있는 줄을 놓아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이라도 했는데, 이제는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그냥 네 식구가 함께 사는 행복한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미국행 비행기 표부터 결제했다. 그리고 둘째와 둘이서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만 해도 나는 아내가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1년 정도 집에서 아이들과 놀면서 쉴 계획이었다. 그 뒤에는 또 어찌 되겠지 했다. 그만큼 난 지쳐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한심하고 위험한 생각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몇 달이 걸리지 않았다.


다만 사표를 쓴 지 6년이 지난 지금 한 가지는 확실히 배웠다. 지금 잡고 있는 줄을 놓아야만 다른 줄을 잡을 수 있다는 건 진리라는 사실. 사표를 내기로 작정했을 때 아내와 지인들의 설득으로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기자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또 사회적으로는 아무도 아닌 존재로서 느끼는 행복감은 절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집에서 놀면 처음에는 스트레스가 쌓이지만 논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받아들이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고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새로 잡은 줄이 어떤 줄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 잡고 있는 줄을 놓아야만 확인이 가능하다. 익숙함을 놓아버린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새로움이 주는 활력은 충분히 느껴볼 가치가 있다.



하지만 40세까지 일한 걸로 평생을 묻어간다는 건 잘 모르겠다. 우리 사회가 너무도 변화무쌍해졌기 때문이다. 아직 소수의 ‘축복받은’ 직종에서는 40세까지 일한 걸로 묻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러기엔 경쟁이 너무 치열하고 삶이 굉장히 길어졌다. 영국 런던 경영대학원 린다 그래튼, 앤드루 스콧 교수가 쓴 『100세 인생 The 100-Year Life』에서는 교육, 취직, 은퇴의 3단계로 이뤄졌던 인생의 단계가 여러 단계로 늘어나며 각 단계 사이에 과도기를 거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태어나서 한 가지 일만 하는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앞으로는 3단계의 삶에서 벗어나 단계가 바뀔 때마다 탐색자가 되어 인생의 새로운 단계를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때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좋다고 한다. 나는 단 한 번도 나에게 던져보지 않았던 이런 질문들을 사표를 던져놓고 묻기 시작했다


필자 김선우
약력
-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인문지리학과 졸업
- 워싱턴대(시애틀) 경영학 석사
- 새로운 삶을 발견하기 위해 현재 미국 시애틀 근처 시골에서 작은 농장 운영 중
-40세에 은퇴하다 출간 예정


인터비즈 임현석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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