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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스머프 Mar 06. 2023

퇴사만 31번, 습관적 퇴사자의 고백

9. 퇴사는 건강에 좋다

복수심은 건강에 좋다
올드보이의 한 장면! (출처 = 유튜브)

나는 이렇게 바꿔 말해 보겠다. 

퇴사는 건강에 좋다!

이건 사실이다. 정기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회사 다닐 때에 비해 건강이 확연히 나아졌다. 첫 직장이었던 **문화재연구원 재직 당시, 나는 지금보다 10살 이상 어린 나이에 여러 가지 병을 진단받았다. 그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알콜성 치매(의증)'였다.


물론 생각보다 이런 진단을 받는 사람은 흔하다. 하지만 이십 대 후반과 삼십 대 초반에 그런 진단을 받는 사람은 드물다. 나는 원래 소주를 들이부으면 들이붓는 대로 마시는 사람이었다.


중3 때 첫사랑을 다른 친구에게 양보(?)하고 나서 혼자 걷다가 무작정 가게로 들어가 '그린 소주'를 사서 병나발을 불었던 것이 소주와의 첫 만남이다. 당시 소주맛이 뭔지도 몰랐지만 너무 쓰다는 생각을 했던 건 기억이 난다. 


그리고 고등학교 들어가서 모범생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생활을 하면서도 친구들과 술을 자주 먹었다. 고1 때는 심지어 학교에 납작한 네모모양의 작은 양주를 들고 와서 수업시간에 마시기도 하고, 막걸리를 막 밤새도록 퍼먹고 학교 사물함 위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것도 수업시간 내내.


대학교 때는 어휴... 말도 못 한다.


그렇게 술을 먹었는데도 나는 술이 얼마나 무서운 놈인 줄 몰랐다. 그러나 회사에 첫 직장에서 정말 기분 더러운 술자리를 많이 겪으면서 점차 술 무서운 걸 깨닫게 되었다.


나는 소주 두 병을 기본 주량을 알고 살아왔었다. 그때까진.

출처 = 픽셀즈

그러나 회사생활 5년 만에 내 주량은 소주 세 잔이 되었다. 그다음부터는 술이 나를 먹는 것이지 내가 술을 먹은 게 아니게 되었다. 세 잔 정도 먹을 때까지만 기억이 나고 그 이후로는 드문드문 기억이 끊겼다가 아예 암흑처럼 기억이 안나는 시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는 온갖 추태를 다 보였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모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 잔만 마셔도 눈이 풀리고 혀가 꼬이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걸 나쁘게 보는 사람도 없었다. 다행히 나의 주사는 그나마 정도를 지켰고, 기분 좋게 웃거나 친한 사람들을 깨무는 정도에서 멈췄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콜성 치매 의증이라는 진단을 받기 몇 주전인가... 내가 블랙아웃 상태에서 동료 여직원의 목을 졸랐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나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겉으론 멍청이처럼 헤헤거리고 다녔다. 그런데 회사 전체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해 여직원 목을 졸랐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장난으로 그런 것도 아니고 막 화를 내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랬다는 것이다. 당시 그 여직원과 나는 서로 근무지가 달랐기 때문에 거의 아무런 인간적 교류도 없었다. 그런데 그냥 갑자기 그러더라는 거다. 나는 기억이 아예 없다. 

다음 날 얘기를 듣고 너무 놀라서 사과를 하고, 사과의 뜻으로 선물도 하고 그랬지만 나는 부끄럽고 당황스러워서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술을 한동안 끊었다. 


그 회사를 다닐 때는 저녁에 가끔 맥주 한 캔 정도는 하기도 했는데, 퇴사를 한 이후에는 그것도 아예 끊었다. 


고고학을 그만두고 2년간 술을 끊었다. 그러다 아무 언론사에나 들어가 기사를 쓰기 시작했고, 좀 더 기사를 잘 쓰고 싶다는 생각에 신청했던 기사 쓰기 수업을 들었다. 그 수업 마지막 날 수강생들과 술을 먹었고 그들과 헤어진 후 거리를 헤매다가 24시간 여는 커피숍에서 잠이 들어 아침에 깼다.


또 언론사에 처음으로 급여를 받고 출근하기 시작했을 때, 술을 왕창 먹었다. 또 엉망으로 취해서 돌아다니다 핸드폰을 부수고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리고는 정말 5년 동안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최악의 직장을 몇 번씩 경험했지만 술을 안 먹었고, 퇴사를 밥 먹듯 하면서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약 10년간 술을 자제하며 살았다. 지금은 가끔 와이프와 와인을 마시거나 맥주 한두 캔 정도 먹으면서 산다. 

뉴질랜드 여행에서 직접 사가지고 온 '페레그린 피노누아 2017'(우측)

최근 몇 년간 규모가 꽤 있는 회사들을 다니면서 소주를 많이 마셔 본 적도 너댓 번 정도 있다. 그런데 블랙아웃 현상은 없었고 세 병을 먹어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덕에 건강검진에서 알콜성 치매 말고, 다른 것들을 진단받아야 했다. 5년간 깨끗했던 내 몸이 다시 회사에서 먹은 술 때문에 망가지는 것을 느꼈다.


회식은 웬만하면 참석을 안 하는데 굳이 오라고 할 때는 재차 거절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무조건 참석'과 같은 타이틀이 붙으면 자리는 채우게 된다. 거기서도 대부분 조절하면서 입만 붙이고 마는데 가끔 내 잔을 체크하는 새끼들이 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마시더라도 블랙아웃이 없다. 술을 먹지 않음으로써 '의증'의 의심을 떼어 버릴 수 있었던 거다. 나는 그 일등공신이 꾸준한 퇴사라고 생각한다. 회사에 다니면서 술을 아예 마시지 않기란 참 쉽지 않으니까...


1월에 퇴사한 이후 처음으로 정기적으로 검진받는 병원에서 간단한 검진을 받았다. 당뇨와 혈압 등 가족력이 있어서 정기적으로 혈액 검사를 포함한 간단한 검사를 받고 있다. 검진 당일, 의사는 결과는 3일 정도 후에 나오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나올 검진결과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을 얘기해 주었다.


의사는 그간 나의 혈액에 나쁜 지방의 수치가 높았던 점을 상기시켜주며, 이번에 결과가 나쁘면 다시 내원을 해서 정밀검사 및 처방전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건 대체로 나쁘지 않은데, 
무슨 무슨 수치가 정상보다 많이 높다면서...


긴장됐다. 가능한 꼼꼼하게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며칠 후 검진 결과가 나왔다.

사실 운동도 함 ㅎㅎ(출처 = 픽셀즈)

결과는 간기능, 신장기능, 혈당, 콜레스테롤, 빈혈 등 수치 모두 정상.


혈액마저 나의 퇴사를 축복한다.

다시 말하지만 퇴사는 당신의 생각보다 건강에 많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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