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조선의 여성②
하루를 빼 먹었으니 본론으로 바로 돌입하자. 변란 이후 남자가 부족해 첩을 들이는 것이 장려됐다 해도 조선을 세운 사람들은 대부분 성리학을 배우는 사대부들이었다. 고매한 정신을 가졌던, 혹은 가진 척했던 유학자들이 한 여자를 아내로 삼고 평생 해로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지 않았을 리 없다. - 그래서 이런 노래도 있지 않은가? “조강지처가 좋더라♬ 썬...” - 사대부들은 조선 전기 내내 첩을 들이는데 매우 조심스러웠고, 명백한 이유 없이 첩을 들일 경우 지탄받았다. 조선 왕조 500년 중 적어도 200년간은 그래왔다. 두 번의 큰 변란이 지나간 후 양반이자 부자인 사람들이 첩을 들이고, 홀로된 여인들이 첩으로 재혼하는 것이 장려되는 분위기가 형성됐지만 200년간 미덕으로 여겨왔던 것을 까마득하게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여전히 특별한 명분 없이 첩을 여럿 들이는 것은 여색을 탐한다는 비난을 들었다.
변란이 끝난 직후에는 조선 전기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재혼도 불의한 일이 아니었고, 전쟁에서 남성 못지않게 의기를 보여준 여성들이 회자되면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더 좋아진 측면도 있었다. 일단 수가 많으면 목소리가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이치기 때문이다. 다만 처첩제가 활성화 되면서 재산상속이나 가문의 제사문제가 남성을 중심으로 재편됐다. 원래 힘은 곳간에서 나오는 법이고, 유학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남성만이 제사를 주관할 수 있게 된 점은 예상보다 빠르게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하락시키는 계기가 된다.
태고부터 남성의 최대 과제는 자손 번식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커다란 난관이 있다. 여성은 출산을 하기 때문에 스스로 낳은 자식이 자신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음을 100%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남성은 그렇지가 않다. - 남성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도 습관처럼 아이가 태어나면 “아빠 꼭 빼닮았네!”하고 감탄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다. - 남성이 자신을 유독 닮은 아이에게 더 애정을 쏟는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렇게 안 그래도 원초적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남성들이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상속문제까지 걸리다보니 자신의 유전자 고르기는 더욱 신중해진다. 첩의 자식은 확률상 자신의 아이가 아닐 확률도 크다. 초기에 처첩제가 장려될 때에는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과부들의 재가가 많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실제로 이미 아이가 있는 경우도 있었으니 여성은 일단 상속 대상에서 제외하고, 정실부인의 아들만이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게 하면 문제는 아주 단순해진다. 또 여기에 장자 상속을 기본하면, 궁중의 예에도 어긋남이 없고, 기호학파에서 해석한 주자가례에도 부합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나이에 있는 아들이 자신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가장 수월했기 때문이라는 진짜 이유가 숨어 있다.
이러한 바탕에서 조선의 두 번째 전성기라 꼽히는 숙종 대에서 정조 대까지 꾸준히 여성의 발언권은 줄었다. 첩을 들이는 것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은 점차 옅어졌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역시 점차 경직됐다. 이런 사회적 기류 속에서 당시 사회를 더욱 안정화(?)시키고 남성들이 안전하게 자신들의 유전자를 퍼뜨릴 수 있게 해준 슈퍼 히어로가 등장하니 그가 바로 우암 송시열이다.
당시에는 납속책과 공명첩을 통해 신분이 상승한 자들이 많았고, 전체 인구 중 양반의 비율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이에 기존의 양반들은 공명첩을 통해 양반가문이 된 자들에게 양반다움을 갖출 수 있는 규율과 글공부가 필요하다 여겼고, 백성들 역시 언제 신분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기자 글을 배우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렇게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성리학의 가치가 전달되고 궁중이나 지체 높은 사대부 집안에서만 지키면 됐던 성리학의 규율들이 민초들에게 적용되기 시작했다.
물론 새로 신분을 얻은 사람들은 양반 흉내를 내고자 했던 것이지 실제 깊은 통찰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생활인이었고, 각박한 현실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양반의 모습을 갖추게 하려면 깊은 성리학적 통찰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당장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나누어 규율을 익히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근본 원리를 모르고 표면적인 현상만 습득하게 된 것이다.
이 딱딱한 규율의 중심에 우암 송시열을 대표로 한 기호학파가 있었고, 후대로 갈수록 경직성은 더 깊어졌다. 변란이후 사회는 변화보다 안정을 택하게 되고, 세도정치와 만나면서 체제유지에 집중하게 된다. 사회의 보수성은 개인의 보수성과도 일맥상통하게 되고 대체로 가부장적이란 말과 상통한다. 그래서 조선의 마지막 100여 년을 남긴 시기부터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 눈에 띌 정도로 두드러진다. 여성은 가급적 외부에 노출되어선 안 되었고, 아버지와 남편의 말에 복종해야 하며 아들을 훌륭한 인재로 만들어야 존재가치가 생긴다는 인식이 보편화 되어 갔다. 이러한 규율들을 한 발 떨어져서 살펴보면, 당시 남성들이 얼마나 편협한 시각으로 여성을 대했고, 또 얼마나 찌질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권력을 쥔 사람의 찌질함은 많은 경우 당위성으로 포장된다.
만약에 “무릇 여자는 칠거지약을 지켜야 하느니라.” 라고 하면 예전에는 “대관절 그게 무슨 소리다요?”하고 물었을 테지만 이제 성리학의 도가 민가에까지 들어온 터라 사대부 집안이든 양인의 집안이든 상관 없이 여성들은 “예, 아버님.”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