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는 사람들의 루틴을 보면 꼭 감사일기를 쓴다고 한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감사일기를 써야 될 것 같은데 생각보다 감사할 일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젖은 수건 물 짜듯 억지로 감사즙을 짜봐야겠다.
2023년 4월 10일 월요일
일단 눈뜬것에 감사를.
2023년 4월 11일 화요일
오늘은 내 생일이다. 요즘은 평범하게 사는 게 오히려 더 어려운 시대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평범한 삶을 선물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하루다. 몇 년 만에 고향집에서 맞는 생일이라 거한 대기업 맛집 생일 상을 기대했다. 자고 일어나서 바로 밥을 먹는 타입이 아닌데 오늘따라 엄마가 생일날에는 오곡찹쌀밥을 먹어야 한다고 잘 자고 있는 나를 억지로 깨워 꾸역꾸역 먹였다. 먹으면서도 이건 아닌데 싶었는데 결국 체했다. 그냥 제대로 꽉 체했다. 생일 계획으로 점심때 유명 중국집에 가서 중화요리 코스 먹고 저녁에 샤브샤브 뷔페에 가서 뜨끈한 국물에 야들야들한 소고기 데처 먹을랬는데 아침부터 찹쌀떡밥에 제대로 체해서 하루종일 손따고 소화제 먹고 넋이 나간채로 보냈다.
새파랗게 질린 내 얼굴을 보고 아빠가 그래도 챙길 건 챙겨야지 하면서 봉투를 건넸다.
필요한 거 있으면 보태써라고 많지는 않지만 대략 300만 원 정도 될 것이라고 했다.
감동.
감사해요 아빠.
정말 감사일기를 쓰려고 마음먹으니 감사한 일이 생기네요.
아빠 앞에서 대놓고 봉투를 확인하면 속물로 비칠까 봐 아빠한테 연신 고맙다고 굽신굽신 거린 뒤 아빠가 방에서 나간 다음 설레는 마음으로 확인했다.
응. 당첨되면 그때 300만 원. 현금이라고 말 안 했다.
심지어 로또 용지 교환은 내 돈으로.
너무 일찍 감사하다고 연신 굽신거린 게 후회된다. 어쩐지 봉투가 너무 얇더라.
* 숫자 1도 안 맞았음.
2023년 4월 12일 수요일
출판제의를 거절했다. 세 번째인가. 아직은 쉬엄쉬엄 놀면서 쓰고 싶은걸 아무거나 아무 때나 쓰고 싶다. 긍정적으로 재밌게 글 읽어주신 출판사에 감사드리며.
2023년 4월 13일 목요일
생일에 맞춰 친구가 집으로 선물을 보내줬다. 테라브레스 구강청결제 세트인데. 혼란스럽다. 무슨 의미가 담겼을까. 내가 입냄새가 난다는 걸 돌려 깐 건가. 애써 생각해서 보낸 선물인데 정확한 의도를 물어볼 수도 없고. 흠. 그냥 고맙다고 했다. 다가오는 8월 친구생일날 비듬샴푸세트로 복수해야겠다. 눈에는 눈, 입냄새에는 비듬으로.
2023년 4월 14일 금요일
오늘은 집에 정수기 점검하러 담당서비스 요원님이 방문하셨다. 보통 푸근하고 친절한 여사님이 오시는데 오늘은 잘생기고 친절한 젊은 훈남이 오셨다. 감사하다. 정말. 정수기물맛이유난히 더 시원한 느낌적인 느낌.
2023년 4월 15일 토요일
양쪽 어금니가 아파서 검진을 받으러 치과에 갔다. 매번 기본 몇만 원씩은 쓰고 오는 연쇄 충치마라서 치과 갈 때마다 치료의 고통보다 금액이 더 무서운 사람이다. 어금니가 중요한 치아인 데다가 양쪽 다 아프니 머릿속으로는 돈이 얼마나 나갈 건가 치과 석션 기계 소리보다 내 통장에 있는 돈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더 공포스러웠다. 다행히 어금니들에 큰 문제는 없고 잇몸이 부어있어서 통증을 느끼는 거라고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했다. 돈 굳었다고 생각하는 찰나에 다른 치아도 보더니 앞니 레진한 게 오래돼서 색깔이 누레졌다고 했다. 평소에도 약간 누렇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실제로 치과 선생님이 대놓고 말씀하시니까,
누렁누렁. 앞니에 노란 곰팡이가 피었어요.
앞니가 노랗게 노랗게 누렁니로 보이기 시작했다. 계속 신경 쓰일 것 같아 이왕이면 빨리 치료받자는 생각에 예상치도 못한 금액을 지출했다. 몇만 원 예상하고 치과 갔는데 십몇만원 쓰고 왔다. 예손치과 의사 선생님 감사해요. 덕분에 앞니를 활짝 드리 내밀고 웃을 수 있게 되었어요.
2023년 4월 16일 일요일
오늘도 눈뜬것에 감사를.
2023년 4월 17일 월요일
오늘은 sbs 컬투쇼 방청 당첨이 되어서 새벽 4시 차 타고 서울에 갔다 왔다. 엄마가 처음에는 연예인 봐서 뭐 하냐며 파주 아웃렛 가서 나이키 쇼핑하는 게 더 낫다고 격노했다. 라디오 스튜디오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탐탁지 않아 했다. 라디오 광고 중간중간에 바람잡이 해주시는 MC분이 리액션 잘해주면 상품권을 선물로 준다니까 엄마는 간이며 쓸개며 다 내줄듯한 프로방청꾼이 되었다. 라디오 방송이라 TV에 나올 일도 없는데 엄마는 중간중간 거울을 보며 계속 외모 점검을 했고 'MC양반 나 좀 봐주소'의 마음으로 영혼을 갈아 넣은 콧소리를 내며 별 시답잖은 농담에도 자지러지듯한 과한 리액션을 선보이며 까르르거렸다. 내 탓이오. 평소 상품권을 못 사드린 내가 죄인이다.
바람잡이씨가 멀리서 온 사람 손 들어보라 했다. 나대는 거 같아서 가만히 있었는데 엄마가 자꾸 옆구리를 찔렀다. 지역이름을 크게 외치니 다른 분들도 우리 모녀가 제일 멀리서 왔다고 한껏 거들어줬다. 그러던 찰나에 울산에서 온 2팀도 손을 들었다. 지역으로 따지면 우리 모녀가 제일 멀리서 왔는데 바람잡이씨가 잘 모르시는지 세 명이서 가위바위보를 하라 했다. 그렇게 나, 50대 아주머니, 초등학생 여자아이, 이렇게 3명이서 게임을 하려는 찰나에 바람잡이씨가 어른이 돼서 굳이 반드시 꼭 초등학생을 상대로 이겨야겠냐고 하길래 50대 아주머니는 사람 좋은 인상으로 아이에게 상품권을 양보한다고 포기하셨다. 그리고 이어지는,
저 시골 촌년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에게로 모아지는 다른 몇십 명의 시선.
멀리서 서울 구경 온 귀엽고 사랑스러운 우리 대한민국의 새싹인 초등학생의 꿈과 희망과 즐거움과 행복을 위해 내가 기꺼이 포기를 할 것인지, 간이며 쓸개며 다 빼버리고 리액션 로봇처럼 억지 텐션을 보이는 58년생 우리 엄마의 상품권을 향한 무서운 집념을 응원할 것인지 그 짧은 3초 동안 고민했다.
결국 나는, 핏줄을 선택했다. 도전하겠습니다. 자라나는 새싹 밟고 지옥 가겠습니다.
이겨도 망신, 져도 개망신인 게임. 가위바위보 한판으로 내가 이겼고 기어이 상품권을 악착같이 받아냈다. 졌지만 잘 싸웠다가 아닌 이겼지만 참 못났다. 게임에서 진 아이가 상처받지 않게 MC분이 다른 선물도 주고 사진도 찍어주고 해서 마음이 조금은 편했다. 상품권을 엄마에게 주니 그 이후로 엄마는 더 이상 오버리액션을 하지 않고 처음으로 편하게 정자세로 라디오를 즐기셨다.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