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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Sep 07. 2023

아무래도 여행 잘 못 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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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땅을 밟았다.

아니 정확히 말해 독일 땅을 30분만 밟고 바로 체코로 이동해야 했다.


패키지여행이라 버스 기사가 내려주는 곳에 자야 하고 가이드가 데리고 가는 곳을 관광하고 차려져 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고 처음 보는 물건을 쇼핑을 해야 했다. 상당히 편리하지만 상당히 불편하다. 나는 이래라저래라 하는 걸 못 참는 배배 꼬인 성격이라 패키지가 안 맞다는 걸 미리 결제하기 전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미 카드값은 청구가 되었고 낯선 외국땅에 덜컥 와버렸다. 먹으라면 먹고 사진 찍으라면 찍고 버스 타라 하면 타 기다리라면 가만히 있는 가마니가 되어야 했다.


사실 패키지가 편하긴 하다. 여행계획을 따로 짜지 않아도 되고, 모든 게 다 준비되어 있다. 말 그대로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들면 되는 것이다. 다만 이동 시간이 조오오오오오오오온나 길고 자유시간이 1도 없다는 게 아쉬울 뿐. 예를 들어 2시간 관광하고 6시간 이동하는 뭐 그런 비효율의 끝판이라고 해야 하나 허허.




첫날은 체코 프라하의 일정이었다. 다시와도 좋았다. 관광지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지만 동양인 관광객은 우리뿐이어서 괜히 외국에 온 기분이었다 (... 응?) 우리 패키지 모든 일행분들은 남는 건 사진뿐이라며 틈틈이 사진을 엄-청 많이 굉장히 찍으셨다. 그중 이모 5인방이 압권이었는데 나는 아이돌 뮤직비디오 찍으러 온 줄 알았다. 유명관광지 앞은 물론이고 외국인 사이를 여유롭게 걷는 스트릿샷을 비롯하여 점프샷, 나 한가해요샷, 나 곧 이 건물로 들어가려고 줄 서있어요 샷, 지금 음식이 입안에 들어갑니다 샷 등 1분 1초 헛으로 쓰지 않고 숨 쉬듯 사진을 찍으셨다. 50대 이신 것 같은데 열정이 대단하셔들.


비교적 사진을 많이 안 찍는 나와 H를 발견하고는  본인들의 단체샷을 부탁하셨다. 나는 또 오지랖 유전자가 있어 부탁받은 건 열정을 다해 완벽하게 고객의 니즈에 맞춰 잘해야 된다는 쓸데없는 강박관념에 최선을 다해 찍어줬다. 한분당 150컷씩 5명이면 1039484928컷 정도 찍어줬다. 습관성 노예근성은 답이 없다.


나 여기서 좀 찍어줘요 앵무새 5인방 이모들이 프라하성 안에 있는 교회탑 앞에서 단체샷을 부탁하셨는데 처음에는 일렬로 서서 멀쩡히 찍으시다가 식상했는지 갑자기 점프를 하더니 그것도 모자라,

미스에이 'Bad girl, Good girl.' 뮤직비디오 중

단체로 돌바닥에서 뒹구르르르. 베드걸 귯걸.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처럼 이모들은 돌바닥에 굴러도 유럽이 좋다는 말을 실천하고 계셨다.

이모들은 찰나의 인생샷을 위해 백만 해외관광객들의 '저것들은 뭐지'의 눈빛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옳다구나. 인생은 이렇게 이모들 마인드로 살아야 한다. 남의 시선 신경 쓰느라 즐기지 못한 나 자신은 그저 하류인생이었구나.

한 수 배워갑니다. 유럽은 역시 돌바닥에서 굴러야 제맛.


이모들은 즐거워서 이리저리 구르며 까르르했지만 정작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는,

이제 제발 그... 그만.

1000장 찍으면 됐쟈나여.

프로사진러 김양, 개망신에 고개를 못 들다.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

기다리다 지쳤어요 씨벌.



빡세게 프라하 중심지를 한 바퀴 돌고 저녁 늦게 관광버스로 돌아가려는데, 나와 H는 인생 마지막 프라하 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야경을 두 눈에 가득 담으려 일행 제일 뒤에 서서 천천히 걷고 있었다. 관광지에서 10분만 걸어 나오니 금방 어둑한 골목길들이 나왔고 인적이 드물었다.


"아뇽하세열."


어디선가 한국말이 들렸다. 나와 H는 동시에 뒤를 돌아봤고 낯선 외국인 가족이 우리 뒤에 걸어오고 있었다.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아주머니와 7세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여자아이가 다시 인사를 했다.


"아뇽하세요 rr"


타국에서 듣는 내 나라말이란. 캬 국뽕이 차오른다.

에콰도르 사람이라 했다. 딸아이가 블랙핑크를 좋아해서 영상을 자주 본다고, 한국 사람들을 너무 좋아한다고 했다.


이것이 K-pop이지.

국가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인 국뽕, 치사량 초과. 아이가 사랑스럽기도 하고 해서 잠시 걷는 동안 대화를 시도했다. 언어는 다르지만 음악으로 우리는 하나라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블랙핑크 멤버 중에 누구를 좋아하냐고 아이에게 물었고, 공감대 형성을 위해 나도 블랙핑크 멤버 중 한 명을 좋아한다고 말해야 됐는데 순간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 나이 곧 40살에 여자아이돌 멤버 이름을 줄줄 외우고 있을 리가. 그냥 다짜고짜 나는 유진을 좋아한다고 했다. 멤버 중 한 명은 유진이겠거니. 얻어걸리겠지.


"유진? 아돈노. 아이 라이크 제니."

해석: 유진? 난 그런 거 모르겠고 제니가 짱이야.


나중에 버스에서 찾아보니 블랙핑크에 유진은 없더라 허허. 공감대 형성 및 문화 교류 실패. 에콰도르와 한국 협상 결렬. 이제는 외웠다 제니 로제 리사 지수 헤헷.


아이는 나중에 크면 꼭 한국에 가보고 싶다 했다. 우리 꼭 나중에 다시 만나자는 말도 안 되는 헛된 소리를 했지만 타국에서 만난 아이에게 꿈을 심어준 것 같은 뿌듯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버스에 올라탔는데, 버스 기사가 요즘 관광지에 가족 소매치기가 극성이니 조심하라고 했다.

.... 혹시?


가이드에게 급하게 물었다.

혹시 가족소매치기가 에콰도르 국적 시민입니까?

혹시 그들이 블랙핑크를 좋아합니까?


가이드는 나를 병신 보듯 했다. 뭐래 저년.

뒤늦게 가방과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없어진 건 없다.

다행이다. 괜히 의심했어. 미안해요 Lo siento.





첫날 체코 일정은 힘들었다. 강행군이었다.

호텔에 도착하니 밤 10시였다. 먼저 씻고 나와 곧바로 잠이 들었고 푹 잤다. 다음날 새벽에 깨서 침대에 앉아있으니 H가 코를 골았다. 그녀는 무호흡증이 있는데 피로가 겹쳐서 계속 숨넘어갈 듯 꺽-꺽 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겨 H가 일어나면 놀려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어나길 기다렸다.


드라이기 소리에 깬 H는 나를 보자마자 웃어댔다. 어제 씻고 나오니 내가 이를 갈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간다는 표현보다는 이빨을 호두까기 인형처럼 닥닥닥 거렸다고 해야 하나. 본인은 내가 자다가 땅콩을 까먹는다 생각했다 한다.  치아가 걱정된다며 개구기를 구해서 입에 처넣어주고 싶다 했다. 그리고는 나를 김개구기라 불렀다. 뭐.. 재갈을 안 물리는 게 어디야 싶었다 김재갈보다는 김개구기가 낫지 그럼 그럼.


이에 질세라 나도 H가 밤새 숨을 허덕허덕거렸다며 보란 듯이 흉내를 냈다. 끄어억 꺽. 산소가 필요해 보인다고 나는 H를 산소호흡기 즉, 이소흡기라 불렀다.


그렇게 곧 나이 40인,

김개구이소흡기는

남은 일정동안 매일밤 이빨을 갈고 코를 골며 숙면을 취했다.



어쩐지, 우리만 매번 제일 끝방을 주더라.




이 모든 일이 소름 끼치게

여행 첫날, 하루동안 있었던 일이다.





+


11박 에피소드

언제 다 쓰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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