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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Aug 28. 2023

여행을 가기도 전에 울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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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었다.

실로 오랜만의 긴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완벽하고 싶었다. 원래 치 떨리는 계획형 인간형이긴 하지만 왠지 다시는 없을 유럽여행을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준비하고 싶어 0부터 100까지 빠짐없이 하나하나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게 문제가 되었다.

패키지여행이라서 준비할 건 건강한 몸뚱아리와 돈이었는데 패키지가 처음인 나는 항상 하던 배낭여행자의 기본마음가짐대로 쓸데없이 너무 디테일했다. 패키지에서 다 알아서 해주는것도 모르고 이것저것 많이 준비해 갔다. 정해진 수화물 23kg를 아슬아슬하게 딱 맞췄다. 돌아올 때 기념품을 사서 들고 온다면 무게가 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속옷과 양말은 버리고 오기로 했다.(그래봤자 몇 그램 안 나가지만 허허) 친구 H가 걱정스레 말했다. 혹시나 우리가 버린 속옷과 양말이 이상한 범죄로 이어지거나 한국과 유럽의 우호적인 관계가 내 빤쥬 한장으로 수틀릴수 있다고. 그래서 깨끗이 세탁을 한 뒤 가위로 갈기갈기 찢어 휴지로 감싼 뒤 버리면 될거라 생각해서 큰가위까지 챙겨갔다.


완벽하다 생각하고 짐을 야무지게 싼 밤, 꿈을 꾸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입국한 날, 우리 집으로 유럽에서 택배가 날아왔다.

곱게곱게 비닐에 칭칭 감겨져 온 물건은 바로 내가 버린, 갈기갈기 찢긴 팬티들이 착불로 굳이 배송된 것이다. 체코에서 하나 크로아티아에서 하나 독일에서 하나.. 6개국 12도시에 흩어진 팬티가 다 모여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마치 드래곤볼처럼.


'놓고 가신 손님의 귀중품을 찾아 돌려드립니다. 굿럭'

...라는 메모와 함께.


택배 착불비 450만 원.

으어어어억 소름끼치는 악몽.

홍콩할머니귀신보다 더 무서운 착불.


그래서 안 버리고 고이 접어 한국으로 들고 귀환했다.

독일의 달달한 초콜렛을 버리고

꿉꿉한 빨래더미를 선택했어요.



으이구 으이구.




여행 가기 전, 속눈썹 연장을 할까 말까 고민만 2주 했다. 더울 것 같은데 또 사진은 예쁘게 나오고 싶고, 불편할 것 같은데 유럽 사람들한테 예쁘게 보이고 싶은, 알쏭달쏭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고민만 계속하다가 예약을 너무 늦게 해 버렸다. 역시 고민은 구매만 늦출 뿐. 이왕 마음먹었으면 뭐든 빨리 하는 게 답이다. 하지만 난 이번엔 너무 늦었다. 출발 3일 전에 겨우 예약이 되었다. 투자하는 김에 속눈썹 붙인 티가 팍팍 나게 과도한 가짜 속눈썹을 붙여달라 했다.


그리고는 시술 후 깨달았다. 나의 눈은 본드에 굉장히 예민하다는 것을. 붙인 그 순간부터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속눈썹을 붙이니 확실히 눈도 선명해 보이고 예쁨이 +1 추가되었지만 눈이 불편하고 가려웠다. 눈을 깜빡일때마다 속눈썹의 그림자 때문에 답-답하고 시아확보도 잘 되지 않아  당장이라도 뜯어내고 싶었지만 투자한 돈이 아까워 일단은 참기로 했다. 내 것이 아닌 남의 털이라 그런지 눈을 뜨는 매 순간순간마다 눈에 불편한 추를 단것처럼 불편했다.

불편. 아름다움과 바꾼 시력.

아름다움을 얻었지만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어요.

이것이 눈뜬 장님.


무거워 무거워. 입은 웃지만 눈을 울고 있는 나. 기괴해.

하지만 놀랍게도 유럽에서 찍은 나의 사진들은 속눈썹이 화려하게 올려가 환하게 웃고있는 앞모습이 아닌

오직 뒷모습뿐이다. 이럴꺼면 뒷통수에 속눈썹을 붙일걸 그랬어요.


속눈썹을 왜 붙인 것인가.

으이구 으이구.



평소 과민성대장염을 앓고 있는 나는, 화장실을 당장 쓸 수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배가 아프다. 그래서 웬만해서 차를 타기 전 한두 끼 정도는 굶는다 그래야 혹시나 생길 급똥 사태를 대비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건 나의 경험에서 나온 무서운 트라우마이다. 그렇다고 내가 바지에 진짜 지렸다는 건 아니고. 거의 99.9999%으로 항문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열릴 뻔 한 일이 비교적 최근에 생겼었다. 크게 한번 호되게 당한 뒤로 급똥 노이로제와 트라우마의 콤비네이션이 되어 공포심이 생긴 것이다.


집에서 인천공항까지 버스타고 4시간, 유럽까지 비행기로 12시간, 내려서 숙소까지 버스로 5시간, 총 21시간을 화장실 자유 없이 견딘다는 생각만으로 장이 미친 듯 몸서리치는 것 같았다. 그래. 불안하게 있을 바에 급똥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이 낫겠다 싶어 나는 장청소약을 출발 2일 전에 먹었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한국에서 다 배출하고 가자는 마음으로.


하지만 장청소약이 바로 효과를 발휘하지 않고 출발 하루 전,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항버스 타기 11시간 전에 반응이 왔다. 그것도 심하게 왔다. 한두 번으로 끝날 이벤트성 항문 개방이 아닌 며칠 동안 오픈마켓이 될 것 같은 심각한 장 상태였다. 그렇다. 긴장, 과도한 화장실 스트레스와 급똥 트라우마가 겹쳐 멀쩡하던 장이 급성장염이 되어버린 것이다. 분명 장을 싹 비운 것 같은데도 물만 마셔도, 아니 공기만 마셔도.

뿌에에엥.

방구를 뀐 거 같은데 이게 방구인지 다른 뭔가인지 모르겠어요.


그냥 날 죽어..ㅕ...줘.

물조차 마시지 않았다. 장이 움직이는걸 최소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결국 25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으이구 으이구.



25시간(비행기 4시간 지연)을 달려 유럽에 도착한 나는,

급성장염과 무거운 속눈썹 후유증으로 여행 시작부터 힘들었다.

행복한데 행복하지 않아.



이때는 몰랐다.

도착한 날이 가장 즐거운 날이었음을.

4시간 지연된 비행기가 패키지여행 고생길의 시작이었음을 이때 눈치챘어야 했다.





끗.




이때가 가장 좋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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