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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Sep 18. 2023

여행 중 생겨서는 안 될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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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 동안 매일 한 끼를 먹었다. 호텔 숙박의 꽃이라는 조식은 구경조차 못했다. 패키지 일정이 너무 빡빡하다 보니 매일 호텔 조식 먹고 바로 출발해야 했다. 스케줄을 잘 소화해 내야 하는 게 아니라 단어 그대로 음식을 잘 소화시켜야 하는 하드코어 미션이었다. 버스 이동시간은 기본 4시간 정도였는데 급똥 트라우마가 있는 나에게 장시간 이동 전 음식물 섭취는 급똥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생각해 음식을 입에도 안 댔다.


화장실을 마음대로 갈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 그냥 자의로 곡기를 끊어버렸다. 조식만 먹지 않으면 되지 왜 호들갑이냐 생각할 수 있지만 점심 먹고 또 5-6시간 이동하는 날이 많아 점심식사도 위험했다. 차라리 안 먹고 안 싸지 싶어 매일 조식과 점심은 굶고 저녁만 간신히 먹었다.


식사시간마다 내가 보이지 않으니 셋째 날부터 패키지 주민들이 H에게 나의 행방을 물었다. H는 교양스럽게 적당히 둘러 말했지만 남의 집 숟가락 브랜드까지 알고 싶어 하는 오지랖 아줌마 부대는 스무고개 게임처럼 계속 물었다한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한 버스를 탄 동지라 생각하고 이실직고했다. 자식 가진 부모로서 아줌마부대는 과민성대장염 DNA를 가진 나를 본인의 딸처럼 걱정해 줬다. 마음 편히 먹을 거 잘 챙겨 먹고 급할 때마다 인솔자한테 말해 가까운 휴게소에 가서 볼일 보고 가면 된다고, 본인들은 중간중간 잠시 쉬었다 가는 거 개의치 않으니 마음껏 볼일 보라고 했다. 졸지에 미래 시어머님들에게 똥프리패스를 받았다.


감사하지만 더 불편했다. 연신 그들의 대화주제는 '오늘 뭐 좀 먹었어?''오늘 화장실 갔어?''신호 왔어?' 등 온통 나의 배변활동이었고 나의 오장육부의 대주주가 된 거처럼 본인들끼리 열띤 종목토론을 이끌어갔다. 밤에 호텔에 가서 화장실을 가게끔 패턴을 맞춰라, 항상 비상사태를 대비해 비닐봉지를 들고 다녀라 (.. 응?) 조금씩 나눠서 싸라 등등 등등.

제발요.

제 장기에 지분 없으시니 제발 신경 꺼주세요.

혼자 있고 싶어요.


 주식'장'의 장이 그 대장소장의 장이 아니라니까요.




굶은 상태로 유럽여행을 하기엔 체력이 너무 딸렸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처럼 아침을 굶으니 여행 다닐 맛도 안 났다. 유럽의 조식은 얼마나 맛있을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피카소, 소피마르소가 먹은 유럽의 아침은 어떨까 싶은 궁금함이 잘 참아오던 나의 식욕을 폭발시켰다.


상상력이 풍부한 타입으로 머릿속에 급똥 시뮬레이션을 가동해 최최최악의 상황을 그려봤다. 겁 없이 만끽한 조식 때문에 버스 이동 중 급신호가 왔고 운전기사는 길가에 주차할 수 없으니 조금만 참아달라 말하고는 남일 인 듯 시속 10킬로를 밟고 느릿느릿 달렸다. 나의 괄약끈은 첫 키스를 앞둔 연인처럼 할까 말까 밀땅을 하고는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장의 대문이 활짝 열려버렸다. 느슨해진 유럽여행씬에 긴장감을 준 나의 급똥, 장례식장 버금가는 침묵 속에 나만 황홀해진 분위기. 뒷수습은 어쩌지. 폴란드 버스기사가 나를 풍기문란죄 및 공공위험죄, 테러리스트로 신고하면 어쩌지. 식은땀이 났다. 아 물론 이건 나의 상상이다.


그냥 안먹는게 낫겠다 결론지었다.

하지만 7일째가 되던 날, 인솔자가 조식 후 1시간 30분의 짧은 이동이라 알려주길래 그 정도 시간이면 괜찮을 것 같아 조식을 먹어보기로 큰마음 먹었다.

영화 설국열차

조심조심 첫 한입을 아앙.

마치 새색시가 남편의 얼굴을 처음 보는 듯한 설레임으로 한입 베어물기.


맛있다.


신선한 과일과 갓 구운 외국산 빵들과 꼬소한 커피, 따뜻한 수프, 샐러드들이 가득했다. 아 나의 패키지 일행들은 이렇게 맛있는 걸 먹었었구나. 안 먹은 나만 병신이구나. 나만 즐기지 못했네 으이구 으이구 호구새끼. 앞으로 배탈이고 나발이고 남은 기한동안 조식을 악착같이 챙겨 먹어야겠다 다짐했다. 패키지 사람들이 나만 빼고 아침마다 기분 좋은 이유가 있었네.


나름 조절한다고 한 접시 적당히 맛있게 먹고 버스를 탔는데 출발 40분 정도 됐을 때 ㅈ됐음을 감지했다. 

꾸르륵꾸르륵.

평소 하루 한 끼만 먹다가 꼭두새벽부터 식이섬유가 가득한 채소와 기름끼가 있는 베이컨을 먹으니 대장이 놀랬는지 연신 뱃가죽을 두드려 댔다.


똑똑 저기 계세여?

오늘 아침부터 겁 없이 과식 하셨쎄여??

지금부터 대장 롤러코스터를 한번 보여드릴까 합니다.


... 모든 병은 마음에서 온다고 했다. 그래 이건 현실이 아니고 내가 만들어낸 상상일 거야. 내가 괜히 배가 아플 것 같다고 지레 겁먹고 쫄아있어서 아프다고 느끼는 걸 지도 몰라. 그럼 그럼. 눈을 감고 평온한 생각을 했지만 배가 정말 아팠다.


지금 이 배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이 그냥 스쳐 지나갈 불장난 같은 순간의 통증인지 아님 급똥이 동반된 똥꼬살인예고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착 20분 전이라 중간에 휴게소도 없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입술은 떨렸다. 확 지려버려?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간신히 정신줄을 부여잡았다. 앤디워홀의 유명한 명언인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네가 똥을 싸도 박수를 쳐 줄 것이다' 아닌 '일단 똥을 싸라 그러면 유명해질 것이다' 의 장본인으로 SNS 대스타가 될 것 같았다.


급한 마음에 네이버검색을 했다. '급똥'이라 검색만 해도 쏟아지는 생명의 은인 같은 정보들.

다리 꼬아주기, 배를 힘껏 내밀기, 발꿈치로 똥꼬 압박하기, 순간 뺨을 후려쳐서 잠시 기절하기 등.

....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 카더라 방법들이 많았지만 그중 간단하지만 효과가 있다는 혈자리 누르기가 눈에 띄었다.


이거다.


지식인이 알려주는 대로 팔에 있는 장문혈 혈자리를 눌렀다. 조금 가라앉은 것 같은 긴가민가한 기분.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갑자기 꾸르륵- 큰 대지진이 느껴졌고 나도 모르게 혈자리를 세게, 아주 세게, 손톱으로 혈관을 뚫어버릴 것 같은 강한 압력으로 눌렀다. 쏟아라 힘.


으아아아아ㅏㅏㅏㅏ.

아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악ㄱ.

왼팔을 마비시켜 버린 나와 그걸 지켜보는 H.

기분 탓인지 배는 가라앉았다. 어쩜 팔의 통증이 급똥의 고통을 잊게 했을지도 모른다.

고통을 고통으로 치료해 버렸다.

이 숨막히는 모든 과정은 오롯이 나 혼자만 알고있는 40분간의 조용한 혈투였다.



다행이야

항문에 혈자리가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휴.




유럽의 어느 날이었다.







+

날 지옥으로 밀어 떨어뜨린

처음이자 마지막 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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