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동안 매일 한 끼를 먹었다. 호텔 숙박의 꽃이라는 조식은 구경조차 못했다. 패키지 일정이 너무 빡빡하다 보니 매일 호텔 조식 먹고 바로 출발해야 했다. 스케줄을 잘 소화해 내야 하는 게 아니라 단어 그대로 음식을 잘 소화시켜야 하는 하드코어 미션이었다. 버스 이동시간은 기본 4시간 정도였는데 급똥 트라우마가 있는 나에게 장시간 이동 전 음식물 섭취는 급똥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생각해 음식을 입에도 안 댔다.
화장실을 마음대로 갈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 그냥 자의로 곡기를 끊어버렸다. 조식만 먹지 않으면 되지 왜 호들갑이냐 생각할 수 있지만 점심 먹고 또 5-6시간 이동하는 날이 많아 점심식사도 위험했다. 차라리 안 먹고 안 싸지 싶어 매일 조식과 점심은 굶고 저녁만 간신히 먹었다.
식사시간마다 내가 보이지 않으니 셋째 날부터 패키지 주민들이 H에게 나의 행방을 물었다. H는 교양스럽게 적당히 둘러 말했지만 남의 집 숟가락 브랜드까지 알고 싶어 하는 오지랖 아줌마 부대는 스무고개 게임처럼 계속 물었다한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한 버스를 탄 동지라 생각하고 이실직고했다. 자식 가진 부모로서 아줌마부대는 과민성대장염 DNA를 가진 나를 본인의 딸처럼 걱정해 줬다. 마음 편히 먹을 거 잘 챙겨 먹고 급할 때마다 인솔자한테 말해 가까운 휴게소에 가서 볼일 보고 가면 된다고, 본인들은 중간중간 잠시 쉬었다 가는 거 개의치 않으니 마음껏 볼일 보라고 했다. 졸지에 미래 시어머님들에게 똥프리패스를 받았다.
감사하지만 더 불편했다. 연신 그들의 대화주제는 '오늘 뭐 좀 먹었어?''오늘 화장실 갔어?''신호 왔어?' 등 온통 나의 배변활동이었고 나의 오장육부의 대주주가 된 거처럼 본인들끼리 열띤 종목토론을 이끌어갔다. 밤에 호텔에 가서 화장실을 가게끔 패턴을 맞춰라, 항상 비상사태를 대비해 비닐봉지를 들고 다녀라 (.. 응?) 조금씩 나눠서 싸라 등등 등등.
제발요.
제 장기에 지분 없으시니 제발 신경 꺼주세요.
혼자 있고 싶어요.
주식'장'의 장이 그 대장소장의 장이 아니라니까요.
굶은 상태로 유럽여행을 하기엔 체력이 너무 딸렸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처럼 아침을 굶으니 여행 다닐 맛도 안 났다. 유럽의 조식은 얼마나 맛있을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피카소, 소피마르소가 먹은 유럽의 아침은 어떨까 싶은 궁금함이 잘 참아오던 나의 식욕을 폭발시켰다.
난 상상력이 풍부한 타입으로 머릿속에 급똥 시뮬레이션을 가동해 최최최악의 상황을 그려봤다. 겁 없이 만끽한 조식 때문에 버스 이동 중 급신호가 왔고 운전기사는 길가에 주차할 수 없으니 조금만 참아달라 말하고는 남일 인 듯 시속 10킬로를 밟고 느릿느릿 달렸다. 나의 괄약끈은 첫 키스를 앞둔 연인처럼 할까 말까 밀땅을 하고는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장의 대문이 활짝 열려버렸다. 느슨해진 유럽여행씬에 긴장감을 준 나의 급똥, 장례식장 버금가는 침묵 속에 나만 황홀해진 분위기. 뒷수습은 어쩌지. 폴란드 버스기사가 나를 풍기문란죄 및 공공위험죄, 테러리스트로신고하면 어쩌지. 식은땀이 났다.아 물론 이건 나의 상상이다.
그냥 안먹는게 낫겠다 결론지었다.
하지만 7일째가 되던 날, 인솔자가 조식 후 1시간 30분의 짧은 이동이라 알려주길래 그 정도 시간이면 괜찮을 것 같아 조식을 먹어보기로 큰마음 먹었다.
영화 설국열차
조심조심 첫 한입을 아앙.
마치 새색시가 남편의 얼굴을 처음 보는 듯한 설레임으로 한입 베어물기.
맛있다.
신선한 과일과 갓 구운 외국산 빵들과 꼬소한 커피, 따뜻한 수프, 샐러드들이 가득했다. 아 나의 패키지 일행들은 이렇게 맛있는 걸 먹었었구나. 안 먹은 나만 병신이구나. 나만 즐기지 못했네 으이구 으이구 호구새끼. 앞으로 배탈이고 나발이고 남은 기한동안 조식을 악착같이 챙겨 먹어야겠다 다짐했다. 패키지 사람들이 나만 빼고 아침마다 기분 좋은 이유가 있었네.
나름 조절한다고 한 접시 적당히 맛있게 먹고 버스를 탔는데 출발 40분 정도 됐을 때 ㅈ됐음을 감지했다.
꾸르륵꾸르륵.
평소 하루 한 끼만 먹다가 꼭두새벽부터 식이섬유가 가득한 채소와 기름끼가 있는 베이컨을 먹으니 대장이 놀랬는지 연신 뱃가죽을 두드려 댔다.
똑똑 저기 계세여?
오늘 아침부터 겁 없이 과식 하셨쎄여??
지금부터 대장 롤러코스터를 한번 보여드릴까 합니다.
... 모든 병은 마음에서 온다고 했다. 그래 이건 현실이 아니고 내가 만들어낸 상상일 거야. 내가 괜히 배가 아플 것 같다고 지레 겁먹고 쫄아있어서 아프다고 느끼는 걸 지도 몰라. 그럼 그럼. 눈을 감고 평온한 생각을 했지만 배가 정말 아팠다.
지금 이 배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이 그냥 스쳐 지나갈 불장난 같은 순간의 통증인지 아님 급똥이 동반된 똥꼬살인예고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착 20분 전이라 중간에 휴게소도 없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입술은 떨렸다. 확 지려버려?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간신히 정신줄을 부여잡았다. 앤디워홀의 유명한 명언인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네가 똥을 싸도 박수를 쳐 줄 것이다' 아닌 '일단 똥을 싸라 그러면 유명해질 것이다' 의 장본인으로 SNS 대스타가 될 것 같았다.
급한 마음에 네이버검색을 했다. '급똥'이라 검색만 해도 쏟아지는 생명의 은인 같은 정보들.
다리 꼬아주기, 배를 힘껏 내밀기, 발꿈치로 똥꼬 압박하기, 순간 뺨을 후려쳐서 잠시 기절하기 등.
....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카더라 방법들이 많았지만 그중 간단하지만 효과가 있다는 혈자리 누르기가 눈에 띄었다.
이거다.
지식인이 알려주는 대로 팔에 있는 장문혈 혈자리를 눌렀다. 조금 가라앉은 것 같은 긴가민가한 기분.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갑자기 꾸르륵- 큰 대지진이 느껴졌고 나도 모르게 혈자리를 세게, 아주 세게, 손톱으로 혈관을 뚫어버릴 것 같은 강한 압력으로 눌렀다. 쏟아라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