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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Sep 25. 2023

정과 오지랖은 한 끗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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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인연이었다. 우리는.

유럽여행이라는 작은 공동 목표 하나로 짧은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정작 정말 함께하지 않지 않은 아리송한 인연들이었다. 서른 명의 어른들이 단시간에 친해져 아우형님 우리 평생 안부 묻고 늙어가는 사이가 됩니다 하는 사이까지 발전하기엔 시간이 너무 짦았다 아니 사실 서로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H와 유럽여행을 떠나기 전 말도 안 되는 헛 상상을 했었다. 우리가 속한 패키지에 건장하고 휜칠한 30대 남자 두 명이 우리를 보며 '야 너두? 야 나두' 를 외치며 급속도로 친해졌고 H와 나 각자 한 명씩 눈이 맞아 동시에 더블 결혼식을 올리는 그런 KTX급 빠른 전개. 패키지여행으로 시작했지만 끝은 허니문 여행으로 돌아오리라 마음먹고 예쁜 옷만 챙겨갔는데 실상 전부 50-60대 어머님들이었고 그중 남자는 세분이었다. 고추 바사삭 이 아닌 희망 바사삭.


일행들과 친해지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친해질 시간이 없었다. 몇 시간 쪼오금 관광하고 버스 타면 다들 잠들어 버렸고, 식당에서는 각자의 일행과 자리를 잡아 식사를 하니 이야기를 나눌 틈이 없었다. 물론 사진을 찍어주며 그나마 조금 친해진 이모님 무리도 있었고, 버스 자리 근방에 앉은 다른 이모남 무리와 사탕을 나누며 눈인사까지는 했지만 같이 삼삼오오 모여서 여행 후 가끔 만나 차 한잔 합시다까지의 사이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그중 가장 다가가기 어려운 한 분이 계셨다. 부모님보다는 조금 더 많고 할아버지 다는 어리실 것 같은 어르신으로 항상 표정이 무서웠다. 가족여행으로 오셨는데 억지로 끌려 나오신 건지 아님 원래 감정을 드러내시지 않으신 건지 얼굴에는 '나 지금 굉장히 못마땅하니 말 걸지 마쇼'의 표정이셨다 심지어 인솔자도 그분을 어려워했다. 먼저 아침에 인사를 해도 뾰로통, 어쩌다 같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어도 뽀로퉁, 사진을 찍어드려도 뽀로퉁. 나에게 표정으로 대신 말해주는 거 같았다.

말 걸지 마시오.

굉장히 언짢습니다. 건들면 물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르신의 사진 열정은 봉준호감독 못지않게 강했다. 어딜 가든 사진을 엄청 찍으셨다. 도대체 저건 왜 찍는 걸까 싶은 것들조차 그분은 진지하게 카메라에 담으셨다 예를 들어 식당 반찬 하나하나, 길거리 쓰레기통, 식당의 화장실, 흙바닥, 앞사람 뒤통수 등등. 전문 블로거이신가 싶은 의문도 들었지만 왠지 타자는 못 치실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어르신의 영혼이 담긴 사진들을 보고 싶었지만 친하지도 않고 물어볼 용기도 없어 포기했다 하지만 어느 날이었다.


앞서 걷던 어르신이 아내분과 대화를 나누시는 걸 엿들었다. 사진이 많이 흔들려서 짜증 난다는 말이었다. 나는 끓어오르는 오지랖정신으로 불쑥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스마트폰 손떨림방지 기능 및 단순한 사진을 멋있게 바꿀 수 있는 몇 가지 기능을 알려드렸다. 어르신은 금세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같은 표정으로 '아이고 이런 이런' '이 좋은 기능이 있다니 아이고'를 연발하시며 며칠을 낭비했다며 세상 좋아졌다고 기뻐하셨다. 그리고는 아가씨 멋져 멋져 굳 베리굳 를 외치시며 처음으로 방긋 웃어주셨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어르신은 나를 볼 때마다 그 어떤 말 한마디 없이 그저,    

아가씨를 향해 하-이. 충슁.


도대체 어디서 온 군대 경례인가. 왜 경례를 하시는 것인가. 해병대신가.

나를 볼 때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경례를 하셨다.


파워 불편. 불편해 불편해.

차라리 예전처럼 그냥 퉁명스럽게 있어줘요.

사진 설명 한 번에 나 대대장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날까지 어르신의 눈을 피해 숨어 다녔다.




마지막날, 아침 관광까지 야무지게 마치고 공항 가기 전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제껏 배탈이 걱정되어 제대로 먹지 못한 나는 유럽에서 먹는 마지막 점심이니까 꼭 챙겨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뭘까. 어떤 맛있는 음식을 줄까.


옆에 있던 아저씨는 독일은 소시지라면서, 유럽여행의 마무리는 역시 독일산 소시지를 먹어야 한다며 버스 안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아저씨의 말을 들은 다른 이모는 인터넷에서 봤는데 독일에 한국과 비슷한 족발 스타일의 슈바인 학센이라는 음식을 꼭 먹어야 된다면서 다른 패키지 일행은 그걸 먹었다는 후기를 읽었다 했다. 나도 괜히 나대고 싶어 알고 있는 지식을 동반해 독일에는 슈니첼(돈가스)이 유명하다고 그걸 먹지 않을까 싶다 거들었다.



독일 소시지든 족발이든 슈니첼이든 마지막으로 먹는 유럽 식사니  뭐든 좋다. 컴온.

공항에 화장실도 많으니 배탈은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싶어 얼른 먹고 싶었다. 버스는 우리는 도로 한편에 내려줬고 인솔자를 따라 걸어가니 여러 가지 레스토랑이 줄지어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어딜까.


수제버거 파는 곳이 나왔다. 두근. 이곳일까. 그래 역시 외국은 햄버거지. 아이 라이크 햄버거. 싶었는데 지나쳤다.

피자를 팔 것 같은 레스토랑이 보였다. 두근. 역시 피자야. 피자 맛있지. 아이 라이크 피자. 좋지요. 싶었는데 지나쳤다.

그리고 골목골목으로 들어가 과연 여기에 손님이 찾아올까 싶은 식당문을 열고 들어가니,

독일에 거주하는 박씨가 끓인 김치찌개.

설마 했는데 역시 했다.


소시지를 기대하던 아저씨도,

족발맛이 난다는 슈바인 어쩌고를 기대한 이모도,

돈가스를 기대한 나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우리의 오지랖을 듣고 독일 전통 유명 음식을 기대한 다른 일행들도 묵묵히 드셨다.

우리는 그 어떤 말조차 하지 않고 조용히 묵념한 채 사찰보다 더 조용한 식사를 했다.

쩝쩝 후루룩 거리는 소리만 나즈막히 들리는 고요한 점심이었다.  



러시아 며느리가 시부모님을 위해 처음 끓인 김치찌개 맛.

조미료가 그리운 독일의 마지막 날 식사였다.




공항은 관광객으로 바글바글했다. 인솔자가 독일은 한국만큼 일처리가 빠르지 않으니 여유시간을 가지고 움직이라 했다. 티켓팅을 하고 출국심사를 하러 가는데 눈앞에 300명가량의 사람들이 줄 서있었다. 저 많은 사람 한 명 한 명 심사받는다 생각하니 아찔했다. 아직 시간이 3시간이나 남았는데 괜히 초조했다. H와 나는 가장 뒷줄에 서있었고 우리 뒤에 오던 한국인 가족이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직원에 의해 우리와 다른 자동출국심사 쪽으로 안내받는 것을 보았다. 그 가족은 텅텅 빈 자동심사대 쪽에 서더니 번개처럼 사라졌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다가 그 직원과 눈이 마주쳤고, 직원이 어느 나라 사람이냐 묻길래 여권을 보여줬더니 나와 H도 자동출국심사 쪽으로 보내줬다. 그제야 보이는 안내판. 미국, 호주, 일본 등등 사이에 뙇하니 보이는 'KOR'. 아 맞다 한국도 이제 자동출국심사 가능하다.


나는 재빨리 줄 하나 서 있지 않는 쪽으로 후다닥 걸어갔고, 그 옆쪽에는 한국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독일직원에게 심사를 받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고 서있는 게 보였다. 왜 인솔자는 자동으로 심사받는 게 가능하다고 말해주지 않았을까. 아마 사람들이 줄 서있는 걸 보고 아무 의심 없이 따라 줄 서있는 듯했다.


나는 그 순간 고민했다. 한국인들이 기다리거나 말거나 그대로 둘까 아님 이 정보를 알려줄까. 친구는 우리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다른 직원이 말해줄 테니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먼저 가자고 했는데 내 안에 꿈틀대던 동학농민운동 DNA가 외쳤다. 우린 하나다. 아이 러브 코리아. 위 러브 BTS 엔드 임영웅.


나는 크게 외쳤다.

한국 사람들 이리로 오세여ㅕㅕㅕㅕㅕ.


내가 상상한 나의 모습은 마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들라크루아 작품

나를 따르시오.

관광객을 이끄는 자동출국심사의 여신.


나는 여권을 대한민국 국기처럼 번쩍 들어 몇백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찬 오른편을 향해 크게 외쳤다.

한국 사람들은 자동심사 가능하니 이쪽으로 다 오시오.

대한독립만쉐.


그러자 텔레비전에서만 봤던 장면이 연출됐다.

오른편에 줄 서있던 모든 한국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더니 오른쪽/왼쪽 나눠놓은 줄을 번쩍 들어 그 밑으로 일제히 다 넘어왔다. 역시 속도의 민족이야. 하지만 소름 돋게도 이 정보를 알려준 내 앞으로 한국 사람들이 줄을 서더니,

나는

가장

뒤로

밀려났다.


이런 ㅆ.


이것이 한국을 위해 목 터져라 외친 대가인가. 나의 의지와는 달리 밀려버린 나의 순서. 가만히 서있었지만 서 있는게 서 있는게 아닌. 밀리다 밀리다 가장 마지막에 서 버린 슬픈 운명.

먼저 앞서 통과한 H가 저 멀리서 나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H는 나에게 조용히 입술로 말을 전했다


병신.



힝.



난 정이 많은 사람인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인지

가끔 나 자신도 궁금하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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