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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Oct 02. 2023

탕후루 먹고 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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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바꿨다. 원래 얼굴사진을 프로필로 해놓는 편이 아닌데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누가 봐도 포토샵이 퐉퐉 들어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게 이쁘게 나온) 사진을 올렸다. 다른 사람들의 카카오톡 목록에 '업데이트한 프로필'로 내가 나타나서 그런지 오랜만에 전 직장동료가 연락이 왔다. 잘 지내냐는 뻔한 레퍼토리로 시작해 언제 밥 한번 먹자는 진부한 이야기로 흘러가다가 뜬금포로 나에게 소개팅 제안을 했다.


다른 지역에 살긴 하지만 1시간 조금 넘는 곳에 살고 있으니 한번 재미 삼아 만나보지 않겠냐 물었다. 보통 같으면 무조건 거절하고 보지만 유럽여행으로 인해 강제 다이어트가 시작되었고 그 덕에 지금까지 식단조절을 잘해오고 있어 살이 많이 빠졌다. 살 빠진 걸 남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에 덜컥 소개팅 승낙을 했다.


남자는 나보다 1살 연상으로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한 성격이긴 하지만 사람이 다소 진지한 편이라 활발한 여자친구를 만나길 바란다는 말에 내가 제일 먼저 생각이 났다나 뭐라나. 카톡으로 미리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보다 만나서 이야기하는 걸 선호해 간단하게 약속장소만 서로 의논한 뒤 주말에 만나기로 했다.   




나는 약속시간보다 일찍 카페로 가서 그분을 기다렸다. 주차장이 넓은 대형 카페로 장소를 정했고, 주말이라 그런지 카페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자리 맞출 겸 미리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해 앉아있었다. 곧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고 멍하니 바깥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서 시선을 돌리니 하늘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짧은 인사를 나누고 우리 둘은 나란히 마주 앉았다.

아직은 여름 날씨라 그런지 그분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몽글몽글 맺혀있었다. 그분의 첫인상으로 말하자면 그냥 딱 봐도 되게 착할 것 같은 느낌인데 이상하게 얼굴빛이 어두워 보였다. 햇빛이 드는 창문을 등지고 있어서 그런가 얼굴이 그늘져 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자세히 보니 민낯이 어두운 게 아니라 수염자국이 남들보다 조금 아주 더 조금 도드라져 보였다.


아침식사로 석탄가루를 잡수셨나. 내가 수염이 없어서 이렇다 표현할 방법이 없는데 뭔가 코를 중심으로 두고 봤을 때 코밑에 있는 피부가 코 윗 피부에 비해 어두운 느낌이었다. 뭐랄까. 수염이 '나는 강한 남자야'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샘 스미스를 따라하는 개그맨 황제성님

나는 남-좌. 강한 남-좌.

아이엠 어 보이.

유 아 어 걸.

 

수염을 쳐다보는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분이 자백쇼를 하셨다. 남들보다 수염이 빨리 많이 자라는 편이라 아침에 면도를 해도 오후만 되면 거뭇해 된다고 지저분해 보여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라 머쓱해했다. 뜬금없는 고해성사에 당황한 나머지 나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 저도 그래요. 라 대답했다. 들켜버린 속마음에 나도 모르게 졸지에 털밍아웃을 해버렸다.


이대로 대화를 종료해 버리면 서로 민망해질 것 같아 나도 다리털을 아침에 밀어도 밤만 되면 검은 잔디밭이 된다고, 지뢰밭인 줄 알고 모기는 안 물린다고. 당황함에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제발 나를 누가 마취총으로 기절시켜주세요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의지와는 다르게 자꾸 나의 혀는 털털털거리고 있었다. 난 참 털털한 여자야.


대화를 하고 있지만 이상하게 나만 말하는 기분이었다. 주선자가 내가 재밌는 사람이라 엄청 떠들어댔는지 그분은 나에게 질문 몇 개만 던지고는 나의 적절한 리액션과 욕쟁이 할머니 못지않는 입담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이럴거면 그냥 개그콘서트나 보러 가세요 싶었지만 나를 보러 이까지나 와줬다는 생각에 실컷 웃고나 가라고 정성껏 끼를 떨어줬다 호롤롤롤.


2시간 동안 혼자 스탠드쇼를 했다. 분명 남자를 소개받는 사랑스러운 소개팅 순간인데 나도 모르게 '아 이번 개그가 못 웃기면 어쩌나' 싶은 개그맨 오디션 보는 정도의 긴장감과 눈치도 보였다. 분위기도 분위기였지만 나를 빤히 바라보던 심사위원 같던 그분의 표정도 한몫했다. 기 빨리고 지친 건 나인데 가만히 나의 원맨쇼를 지켜보던 그분의 수염은 2시간 전과는 달리,

태조왕건_최수종

수북.

20년 같은 2시간.


시간은 상대적 이랬는데.

미인과 함께 있으면 1시간이 1분처럼 느껴지지만 뜨거운 난로 위에서는 1분이 1시간보다 길게 느껴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빗대어 보자면 이 남자가 보는 나는 얼마나 못생긴 건가. ㅆㅣ이바알.



기분 탓이겠지.

그렇게 시청만 할 것 같으면 집에 가서 넷플릭스나 보세요.




카페에서 대충 마무리하고 헤어지려 했으나 커피값을 내가 부담해서 신경 쓰였는지 그분은 이른 저녁을 같이 먹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왠지 저녁을 먹고 나면 또 후식으로 커피를 먹어야 할 것 같은 밥-커피의 무한 수례바퀴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래서 밥을 먹기에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그냥 집에 홀랑 가버리기에는 그분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 같아 근처에 있는 탕후루가게에서 디저트를 사 먹자 했다. 탕후루를 사서 카페 근처 강변을 가볍게 걷고 헤어지면 딱 괜찮을 것 같아서 탕후루 하나 사달라고 했다.


요즘 탕후루가 유행인데 아직 먹어본 적이 없어 이번 기회에 먹고 보고 싶다 하니 본인도 맛이 궁금했다고 흔쾌히 제안을 받아줬다. 제일 잘 나가는 걸로 추천받아 그분은 딸기탕후루를, 나는 샤인머스킷탕후루를 선택했다. 종이컵을 받힌 탕후루를 각자 한 손에 들고 강변으로 향했다. 달거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더 달았다.


딱딱한 건 아닌데 설탕으로 겉을 코팅한 것이다 보니 이에 쩍쩍 달라붙었다. 탕후루를 쩝쩝거리며 걷고 있는데 순간 내 입안에서 쩌-억 하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입안 어딘가가 허전하고 시원하고 쎄한 느낌이 들었다.

짧은 외마디말로 '어-'라 말하니 그분이 나를 쳐다봤고


'어? 어??? 엇?????????????ㅇ_ㅇ???????????'


하더니 당황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렇다.

10번 이빨 가출. 안녕히 계세요.


뻥친 그분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떨어진 이빨처럼 정 떨어진 그와 나의 사이.

순간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뒤늦은 사회적 거리두기 실시.


오늘 이후로 연락하지 말아야지 싶은 나의 속마음 대신 크라운이빨에 꽁꽁 숨겨진 왜소한 이빨을 들켜버렸다.

끈끈이에 붙어버린 파리처럼 샤인머스킷에 나의 작고 소중한 가짜이빨이 떡-하니 붙어있었다.

밥알보다 새하얀 나의 소중한 윗니.


탕후루 먹으면 충치가 생긴 다기에 충치 생기기 전에 이빨을 날려버렸어요.


모르고 삼킨 게 아닌 게 어디야 순간 안심했지만 너무 창피해서 아가미를 닫아버렸다. 그분은 나에게 앞니가 부서진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며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을 했다.


닥-쳐.


아 이런 기분이구나.

진지한 수염 고민 이야기에 나의 밑도 끝도 없는 다리털 드립을 들은 이 남자도 이런 기분이었겠지.

뜻밖의 거울치료에 또 나의 못난 행동을 반성하고 갑니다.


나의 상황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자꾸 또 말을 걸었다. 아님 이빨 빠진 내 모습이 웃겼나.

나는 입을 꾹 다문채로 눈빛과 소심한 손짓으로 할 말을 대신했다

당신의 옥수수가 털리기전에

그 입 다무세요.



이대로는 더 이상 대화가 불가할 것 같아 이가 보이면 죽는 병이 걸린 사람처럼 고개만 푹 숙인 채 먼저 집에 들어가겠다 하고 고개를 연신 굽신굽신거렸다. 입술을 최대한 오므린 채로


죄...죄ㅅ성엉 합모..니다.

먼즈어.. 가..ㄱ볼게여엉.


이 남자는 이 순간마저 웃길라고 내가 설정한 콘셉트인 거 마냥 나를 너무 재밌는 사람이라며 즐거워했다.

한 손에 빠진 가짜이빨을 꼬옥 쥐고선 택시를 타고 집으로 쌔-앵 와버렸다.


집에 와 정신을 차리고서는 죄송하다고 앞으로 니 놈과는 볼일 없다는 식으로 문자를 보냈지만, 가끔 만나 탕후루 하나 때려 넣는 친한 오빠동생 사이라도 되고 싶다고 너무 즐거웠다는 그분의 말에 일단은 알겠다고 이빨 붙이고 연락하겠다는 짧은 답을 했다. 이성적인 감정은 없지만 아는 오빠로 알고 지내기에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5초 정도 하긴 했다.



이렇게 나는 이빨을 잃고 새오빠를 얻었다.






끗.






+

탕후루가 또 먹고싶어 집에서 만들었다

이번에는 엄마 강냉이가 나갈뻔했다.



치과의사가 좋아할만한 간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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