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답정너이다.
여기서 '답정너'란 네이버 국어사전에 나오는 의미로는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라는 뜻으로 주로 자신이 듣고 싶은 대답을 미리 정하여 놓고, 상대방에게 질문을 하여 자신이 원하는 답을 하게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답정너의 본질은 단순히 선택을 도와 달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미 본인의 마음속에 '원하는 답'을 가지고 있으며, 상대방의 입을 통해 그 답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 마치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는 증거'를 찾는 것과 같다. 내 마음에도 들어야 하고 그와 동시에 남들도 내가 고른 게 더 낫다고 생각해야 한다. 상대방이 내가 고른 게 아닌 다른 게 더 낫다고 하면 화나는 이상꼬리한 마음이다.
원래 그렇지 않았는데 카카오톡이 개발되고 친구들과의 실시간 소통이 가능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답정너가 되어버렸다. 점점 남의 시선을 신경 써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고른 선택이 남들 눈에도 틀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별거 아닌 일상적인 선택에도 친구들의 의견을 물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처음에는 단순한 정보 공유나 의견 교환이었지만, 점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몇백만 원짜리 명품가방이면 몰라도 천 원짜리 스티커를 고를 때도 친구들의 의견을 물어보는 지경이 되었다. 나의 친구들은 나의 쓸데없는 질문에 무시하지 않고 답을 해준다. 사실 그들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대충 쓱 예뻐 보이는 물건을 선택해 준다. 결국은 내가 이쁘다고 말한 물건을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난 친구들에게 물어보고 대답을 듣고 싶다 힝.
한 해 전, 생일 선물로 받은 스타벅스 상품권을 잊고 살다가 유효기간이 2주도 남지 않았다는 문자를 받고 부랴부랴 스타벅스 매장으로 달려갔다. 매장에 전시되어 있는 여러 개의 텀블러를 보니 선택장애가 있는 내가, 예쁜걸 딱 하나 고르기에 상당히 고민스러웠다. 가장 마음에 드는 텀블러 후보 사진 4개를 찍어 단체채팅방에 보냈다.
"이 중에 뭐가 제일 예뻐?"
앞뒤 이야기는 필요 없다. 그냥 사진 보내놓고 예쁜 걸 골라달라고 하자, 익숙한 듯 자기 취향에 따라 의견을 내놓았다. 사실 나는 1번과 4번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지만, 채팅방에 있는 4명의 친구들은 각자 다른 번호를 말해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다. 선택지가 많아 의견을 종합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결정을 내리기 위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던 1번과 4번 디자인만 남기고, 2번과 3번 디자인은 삭제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사진을 보내 1번과 4번 중 하나를 선택해 달라 말했다. 의외로 1번 디자인보다 4번 디자인을 선호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아
어쩌지
난 1번이 마음에 드는데.
친구들이 1번이 예쁘다고 했으면 당장 샀을 텐데 4번이 예쁘다는 의견이 많아서 망설여졌다. 스타벅스 매장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며 친구들이 한 목소리로 1번을 사라고 해줬으면 했다. 어서 1번이 예쁘다고 말하라고.
안다. 나는 줏대 없는 년이라는 거.
애초부터 친구들의 의견을 묻지 말고 내가 마음에 드는 걸 사면되지 않냐고 생각하겠지만,
난 그냥 이런 인간이다. 어쩔 수 없다.
모두의 눈에 예쁜 걸 사고 싶다.
4번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친구들에게 1번의 장점을 구구절절 어필했다. 나의 의견에 따라달라는 식으로.
하지만 내 친구년들도 고집이 세다. 1번의 단점을 나열하면서 같은 금액이라면 4번을 사라고 했다. 내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내가 '굳이' 원하면 1번을 사는 것도 좋지만 자기들 같으면 4번을 산다는 찝찝한 동의를 해줬다.
결국 나는 4번을 사지 못하고 매장을 나왔다. 그리고는 3일 동안 나는 1번과 4번의 선택 기로에 서서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했다. 고작 텀블러 하나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 싶겠지만 나는 하나에 꽂히면 쓸데없는 고민과 시간을 보내는 인간이다. 3일 동안 친구들을 괴롭혔다. 물을 많이 자주 마시는 나에게 용량이 큰 1번이 더 좋지 않겠냐고 친구들을 계속 설득시켰다. 친구들도 나의 1번 선택에 동의해 주길 바랐다.
나의 질척거리는 1번 텀블러를 향한 일방동행 사랑에, 만만치 않은 나의 친구들은 나에게 질렸는지 그냥 아무거나 처 사라고 했다. ( 절대 1번이 이쁘다고 안 함.... ) 그러고는 텀블러가 다 거기서 거기라며 물을 마시는 게 목적이라면 스타벅스 상품권을 당근마켓에 팔고 가성비 좋은 다른 걸 구입하라고 했다.
친구들에게 물을 많이 담을 수 있고, 남들이 보기에 멋져 보이는 텀블러를 추천을 해달라고 했더니.
절친 H가 사진을 보냈다
재활용이 가능한 자연친화적 조롱박으로 물이나 처 마시라 했다.
.....
곧이어
K도 사진을 보냈다.
아예 생수통을 어깨에 메고 다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
기다렸다는 듯이 O가 사진을 보냈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중 한석규 님 가성비 좋은 큰 텀블러를 갖고 싶으면, 등에 물통을 매고 다니면서 마시라고 했다.
....
곧이어
채팅방에서 가장 조용한, 또 다른 K가 사진 한 장만 달랑 보내놓고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
예 알겠습니다.
친구들이 나에게 선택하라고 했다.
내가 원하는, 용량이 크면서 들고 다니기 편하고 남들 눈에도 멋져 보이는 텀블러 4개 중 하나를 고르라 했다.
1번 조롱박
2번 생수통
3번 똥통
4번 물지게
아하!
친구년들이 나에게 돌려 말하는구나. 그만 괴롭히고 아무꺼나 처 사라고.
이 날 이후로 난 친구들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기로 했다.
난 참 좋은 친구들을 둔 것 같다.
인생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끗
+
결국 1번 구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