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나는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블로그 맛집 대신, 태국인들이 찾는 찐 로컬 가게를 탐방하기로 했다. 물론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또한 타국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콕 골목길을 거닐다가 우연히 발견한 한 카페에 들어섰다. 카페 안에는 어린 나이가 돋보이는 두 명의 소녀들이 있었다. 낯선 한국인 손님의 방문에 놀란 그녀들은 처음에는 다소 당황하는 모습이었지만, 곧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다.
K와 나는 프런트에 서서 메뉴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음료 사진이 없어서 글자만 보고 랜덤으로 선택해야 했다. 메뉴판 A를 한참 연구한 끝에 각자 한 잔씩 주문하려는 순간, 소녀가 메뉴판 B를 꺼내 보여주었다. K와 나는 미니언처럼 '오!'라고 외치며 새롭게 등장한 메뉴들을 다시 열심히 살펴보았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커피, 밀크, 캐러멜... 뭐 그런 것 같았다. 처음 보여준 메뉴판 A보다는 확실히 메뉴판 B가 더 다양해 보였다. 우리를 재밌고 신기하다는 듯이 곁눈질하는 그녀들의 관심이 조금은 부담스러워서 우리 둘은 얼른 주문하려고 했다. 하지만 또 그제야 다른 메뉴판 C를 보여줬다.
..........?
뭐지.
이러다가 메뉴판 Z까지 나오는 거 아녀.
그냥 처음부터 메뉴판 3개를 동시에 보여주면 안 되는 건가.
우리는 소녀들의 친절에 땡큐베리마치하며 메뉴판 C를 살펴보았다. 다른 메뉴판과 달리 이번 메뉴판은 신제품 목록인지 음료 사진이 함께 있었는데 코코넛 관련 메뉴인 것 같았다. 얼마 전 마신 코코넛 스무디가 너무 맛있었던 기억에, 우리는 다시 한번 그 맛을 느껴보기로 결심하고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직원은 우리의 마음을 눈치채고 조금은 알아듣기 어려운 영어로 메뉴를 설명해 주었다. 코코넛 밀크를 사용하여 만들고 위에 젤리가 토핑 되어 있다는 것 외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설명에 따르면 이 메뉴판의 대부분의 메뉴는 커피와 코코넛을 믹스한 맛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를 위해 영어와 태국어를 섞어 열심히 설명해 주는 그녀의 친절함에 감동하여 나와 K는 코코넛 커피 스무디 2개를 주문했다. 그랬더니 그 작고 귀여운 태국 소녀는 해맑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쏘리
노 코코넛 투데이.
.... 응?
코코넛 음료 판매한다고 했지 오늘 된다고는 말 안 했다.
아,
그냥 코코넛 판다고 자랑만 한 거구나
결국 아이스커피 마셨다.
K와 나는 동남아 음식을 좋아하지만, 둘 다 공통적으로 고수를 먹지 못한다. 고수 특유의 강한 향이 조금 버겁다. 한국인들이 자주 가는 식당에서는 대부분 고수를 따로 주거나 주문 전에 고수 빼달라고 요청하지만 현지 식당에서는 따로 말하지 않으면 원래 레시피대로 고수가 들어간다. 한국에서 미리 고수를 빼달라는 태국어를 외워갔지만, 계속 까먹고 발음도 매번 달라지는 것 같아서, 결국 현재에서 배운 가장 간단한 태국어 문장인 'No 팍치(ผักชี)'를 달달 외웠다. '노팍치 플리즈'라고 대충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부분 고수를 빼주셨다.
태국의 마지막 날,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찐 로컬 식당에 들어갔다. 다른 식당들과 달리 메뉴판에 적힌 메뉴의 종류도 훨씬 적었다.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가장 기본 메뉴를 시키면 실수할 가능성이 적을 것 같아 게살 볶음밥과 팟타이, 수박 주스를 주문했다.
주문을 받으시는 태국 어르신께 주문을 끝으로 '노팍치' 외쳤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셨는지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여러 번 '노팍치! 노팍치!'라고 외치며 손으로 크게 엑스표를 만들어 보였다. 이제야 무슨 말인지 깨달으셨는 듯 '오.. 케이!'라 대답하시며 주문을 받아가셨다. 그리고 10분 뒤, 어르신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니고 게살 볶음밥을 우리 앞에 뙇 놓아주셨다. 마치 심사위원단 앞에서 자신의 요리를 평가받는 것처럼 설레는 표정을 보이시며, 외지인의 반응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다.
그의 태국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마치
'자! 코리안것들아, 이게 너네가 먹고 싶어 하는 게살볶음밥이니라, 너희의 주문대로 특별히!
고수도 한가득 담았노라.
..... 팍치?
고수를 몇 배로 더 넉넉하게 넣어주셨네
코리안 놈들 '팍치 팍치' 거리는 거 보니 팍치 겁나 좋아하나 보네 옛다 많이 먹어라.라고 생각하신 건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어르신의 마음을 짓밟을 수 없어 입안 가득 한입 크게 떠먹고는 굳굳 해줬다
고수를 을매나 넣었던지
양치를 안 해도 입이 개운했다.
방콕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간단한 요기 후 쇼핑몰에 들러 땀을 식히고 구경하기로 했다.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생수를 사야겠다고 K가 제안해서 마트를 찾아갔지만, 쇼핑몰이 너무 방대해서 한 번에 찾기가 어려웠다. 인포메이션센터 위치도 알 수 없어 에스컬레이터 옆에서 물건을 판매하던 아르바이트생에게 마트 위치를 물어봤다.
나: 싸와디카, 마트의 위치를 알려주실 수 있나요?
나의 일방적인 영어 질문에 당황한 그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매너 없이 너무 갑자기 물어봤나 싶은 마음에 다시 천천히 그에게 양해를 구하며 물었다.
나: 미안합니다. 질문 하나만 하겠습니다. 나는 마트를 찾고 있습니다.
그제야 경계를 푸는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는 다시 한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혹시 못 알아들으셨나 싶은 마음에 또 물어보았다.
나: 슈퍼마켓이 어디에 있나요? 물을 사고 싶습니다. 워터워터.
그: LG
그가 뜬금없이 간단하게 'LG'라고 답하는 게 아닌가.
아니 아니. 엘지 핸드폰 말고. 마트 위치를 알려달란 말이야.
나: 아이 원투 바이 워터, 드링크, 워터 rrr
그: 오케이, LG, LG
자꾸 LG 브랜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내 핸드폰을 보여주며 대답했다.
나: 노, LG, 아이엠 삼성
나: 아이 헤브 쌤성 폰, 갤럭시 S23 울트롸롸롸롸
뜬금없이 처음보는 태국인에게 삼성 핸드폰 자랑하기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고 나를 쳐다보지도, 더 이상 대꾸를 하지도 않았다.
나의 물음에 그는 오직 LG만을 답하고는 긴 침묵만이 쇼핑몰 공기를 감쌀 뿐이었다.
흠. LG 핸드폰을 파는 사람인가. LG이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도록 노동계약을 맺은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뜬금없는 LG발언이었다.
나의 슈퍼마켓 영어발음의 문제인가. 아님 그의 지독한 LG 찬양인가.
별 소득 없는 시간이라 생각하고 K와 나는 그의 옆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보통 마트는 지하에 있는 법이니까. 친구와 나는 참 이상한 사람이라며, 내려가는 내내 그의 이야기를 했다. 그의 LG발언에 센스있게 삼성폰이라고 대답한거 잘했다는 친구의 칭찬에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여윽시 핸드폰은 삼성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