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부모님 댁에 다녀왔다. 마흔이 된 자식을 보며 엄마는 언제 이렇게 늙었냐며 징그럽다고 했다. 좋던 시절은 다 갔고, 이제 늙다리 노처녀가 되었다며 상당히 아쉬워하셨다. 오랜만에 본 딸에게 해주는 새해 첫 덕담치고는 정확했고, 불쾌했으며,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냥 내 존재 자체로 조의를 받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엄마와 나란히 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엄마의 오랜 지인, 정자이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청력이 예전 같지 않은 엄마는 거의 스피커폰 급 볼륨으로 통화를 시작했고 내가 왔다는 핑계로 전화를 빨리 끊으려 했다. 정자이모는 내가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아직도 (.... 예예) 사귀는 남자친구는 없느냐며 나의 안부를 묻고는, 책도 출간했는데 그 책을 읽고 많은 남자들이 러브콜을 하지 않았느냐며 살다 살다 처음 들어본 말을 아무렇지 않게 이어갔다.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하고 급하게 통화를 끊고는 엄마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 여편네, 니 책 처 안 읽어봤나 보네.
니 책을 읽고 어느 미친놈이 니한테 연락을 하겠노.”
.....아,
서평단보다 더 칼 같은 김여사의 독후감.
세상 그 누구보다 정확한 도서 리뷰랄까.
잔인하지만, 엄마가 내 책을 읽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고마워요. 드디어 읽으셨네요.
힝
점심식사로 추운 날 먹으면 딱이라는 수제비를 먹었다. 우리 세 식구는 오순도순 식탁에 둘러앉아, 갓 버무린 새빨간 생김치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수제비를 앞에 두고 2026년 한 해도 무탈하자는 덕담과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어무니가 나를 위해 정성스럽게 반죽하고, 일일이 정성으로 뜯어 만든 ‘김여사표 수제비’를 크게 한 입— 앙 때려 넣는 순간...!
잉?
이게 뭔 맛이여.
수제비 맛이 오묘했다. 맛없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맛있다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끝맛은 살짝 달콤하면서도 묘하게 느끼한, 뭔가 마음에 걸리는 맛이었다. 나는 곧바로 엄마에게 수제비에서 기분 나쁜 단맛이 난다며 음식 평가를 했다. 엄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본인은 전혀 못 느낀다며 내 혀가 이상하다며 나를 몰아붙였다. 나는 곧 아빠에게 동의를 구하기 위해, 단맛이 나지 않냐고 여러 차례 물었으나 아빠는 엄마가 분명 쏘아댈걸 알기 때문에 본인은 그저 그냥 식사할 수 있음에 감사하듯 입을 닫으셨다. 엄마의 이상한 수제비와 아빠의 침묵 앞에서는, 내 미각이 패배한 기분이다.
수제비를 반죽할 때 혹시 설탕을 소금으로 착각해 실수로 넣은 건 아닌지 마치 미슐랭 스타 심사위원처럼 엄마를 쪼았다. 엄마는 시종일관 ‘... 이 애가 뭔 소리를 하는 거야’라는 표정만 지으셨다. 한 치의 동요도 없이.
결국 나는 다섯 숟가락 만에 식사를 포기했다. 그나마 국물은 먹을 만해서, 막걸리 마시듯 수제비 국물에 생김치를 걸쳐 먹었다. 그리고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엄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고해성사를 하셨다. 아침에 반죽할 때 수제비 3인분을 만들기엔 밀가루가 모자랐다고 한다. 막상 밖에 나가긴 귀찮고 해서 집에 있는 미숫가루를 살짝 섞었는데 어차피 미숫가루도 몸에 좋은 가루라 단순하게 생각하셨다. 그런데 막상 만들고 보니, 시판 미숫가루라 설탕이 첨가되어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다시 만들기는 귀찮고 해서 본인만 입 다물면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셨다한다. 그리고는, 그 말 뒤에 나를 향해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저년은 생긴 건 망나니인데, 혓바닥은 대장금이네.
속일 수가 없네 칫. 몸뚱아리보다 날쌘 쌧바닥이여"
소녀는 설탕맛이 나서 설탕맛이 난다고 했는데.
힝
난 참 우리 엄마가 좋다.
허기가 그대로 남아버린 점심 식사를 마치고, 엄마와 나는 소파에 앉아 지난 방송들을 보고 있었다. 이때다 싶어 아빠는 냉장고에서 두유를 꺼내와서는 나에게 마시라고 친히 빨대를 꽂아 주셨다. 점심으로 허접하게 수제비 국물로만 배를 채운 나로서는 두유 같은 음료를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미 물배로 배가 꽉 찼다며 엄마에게 두유를 건네었더니, 엄마는 굉장히 냉소적인 말투로,
“나는 이런 거 안 마신다.”
단칼에 거절하셨다. 아빠가 직접 사 왔다는 두유는 XX대학 검은콩 두유로 동네 마트에서 가끔 할인할 때 사면 한 박스에 만 원이 안 되는, 아빠가 즐겨마시는 최애 두유이다. 엄마는 그 두유를 힐끗 보더니 냉장고에서 본인이 직접 사 왔다며 이왕 마시는 김에 고급 두유를 마셔야 된다며 금두꺼비처럼 소중하게 나에 건네주셨다. 엄마손에 들린 고오급 두유는 바로 황성주 박사의 무가당 두유였다. 그리곤 엄마는 아빠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보소보소, 이게 진짜 두유지. 대학이 뭘 아노. 박사는 다르다.”
아,
대학보다 박사가 더 좋다고 믿는 엄마의 밑도 끝도 없는 학벌사랑이 두유까지 적용되나 보다.
대단해 정말.
난 참 우리 엄마가 좋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