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가 되면 나는 건강검진을 받는다. 운동은 안 하지만 오래 살고 싶어서 병원은 자주 가는 편이다.
국가에서 해주는 공짜 검진이라서 가장 기본적인 검사만 받은 편인데 검사 항목에 있는 의사면담은 항상 5초 컷이었다. 매번 그렇게 숨 쉬는지 여부만 확인하다가 웬일인지 그날은 의사 선생님과 1분가량 길게 대화를 나눴다. 노크하고 들어가니 60대 중후한 의사 선생님이 갈색 안경을 매만지시며, 먼저 체크한 내 몸무게를 보셨는지 내가 의자에 앉음과 동시에 거참 맛집 좋~아하게 생겼네 폭탄 투척. 이것은 성희롱인가 무게희롱인가 정신이 혼미 해질 때쯤 상담이 시작됐다.
운동 자주 하시나요? 아니여
고강도 운동은 얼마 하시나요? 전혀여
최근에 운동한 적은 있나요? 숨쉬기 정도만
의사 선생님의 눈이 세모로 변함과 동시에 한숨 섞인 목소리로 본인 말을 이어가셨다.
환자분. 맛집 좋지요? (좋다고 말한 적 없음) 맛있는 거 좋지요?(먹는 거 좋아한다고 말한 적 없음) 근데 운동하셔야 합니다. 맛집 찾아다니지 말고 건강 위해 운동하세요.(다시 한번 말하지만 맛집 다닌다고 말한 적 없음) 의사 선생님은 무슨 앵무새 마냥 맛집맛집 노래를 부르셨다 난 또 맛집무새인 줄. 그렇게 1분가량 이유 없는 혼남을 당하고 뭔가 분한 마음에 다이어트를 결심했지만 하루도 안 가서 밀가루 못 끊어 설탕 못 끊어. 대신 그 병원을 끊어버렸다.
또 한 번은 내과에 가서 인생 첫 위내시경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이 엄마 지인이라 나를 오랜만에 본다며 본인 병원에 외국인도 가끔 오는데 와서 일하지 않겠냐면서 나를 굉장히 자랑스럽게 외국에서 살다 온 능력자로서 현재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영어슨생님 이라 간호사선생님한테도 소개해주셨다. 과도한 환영을 뒤로하고 나는 그때 처음 수면마취를 했는데 중간 기억은 전혀 나지 않지만, 집에 가는 차 안에서 엄마는 앞으로 저 병원은 못 다니는 건 둘째치고 의사 선생님도 부끄러워서 못 보겠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마취에서 깨어날 때쯤 헛소리 시전을 했다고 한다. 침대에 누워서 계속 이것은 A입니다 따라 하세요 에에에에에이, 에이, 에에이, 에이↗ 에이 ↘ 에에에에 에이만 한 5분 동안 고장 난 라디오처럼 무한 반복. 개망신의 촉을 느낀 엄마가 나를 흔들어 깨웠고 그 소리에 나는 또, 네 잘했어요 이제는 B입니다. 비 비이이이비→ 브 브 브 브 비! 비이이이이 이러다가 알파벳 전체를 수면 강의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엄마는 나를 있는 힘껏 꼬집어서 겨우 깨웠다고 한다. 그리고 서툴러 회복실에서 나왔고 검사 결과를 들으러 원장실에 갔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따.. 따님이 영.. 영어를 잘... 잘하네요 이 한마디에 이 병원 하고는 이제 끝이구나 생각이 들어 작별 인사할 겨름도 없이 나를 등 처매고 빠져나왔다고 한다. 엄마는 이 일로 20년 지기 지인과 단골 병원을 잃었다고 했다.
3년 전에는 갑자기 몸 상태도 안 좋아지고 소화불량이 계속 지속되어서 고오급 건강검진을 받았다. 위염을 달고 살아서 위내시경은 자주 했는데 대장내시경은 처음이라 긴장을 많이 했다. 내시경 받기 전 의사 선생님 면담을 하러 들어갔는데 잘생긴 젊은 의사 선생님이 계셨고 대장내시경 약복용법과 어쩌고 저쩌고 설명을 해주셨는데 그냥 나는 아무것도 안 들리고 저분께 나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을 오픈한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고개를 저절로 땅에 처박게 했다. 어쨌거나 약을 주면서 검사 3일 전부터 금지해야 할 음식을 말해주셨다. 곡식류 과일류 고춧가루 뭐 그런 작은 알갱이류를 섭취하지 말라 해서 3일 전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매운참치김치찌개와 후식으로 참외를 야무지게 먹었다.
정해준 대로 약 챙겨 먹고 속과 마음을 비운 후 병원으로 갔고 엉덩이 뚫린 굴욕의 초록바지를 입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거리다 검사실에 들어갔는데 엄마말로는 의사 선생님이 처음에 말해준 검사시간보다 40분 정도 더 걸려서 밖에서 꽤나 걱정했다고 했다. 내시경을 다 받고 결과를 들으러 갔는데 선생님이 검사하면서 찍은 나의 대장 사진들을 보여주면서이 하얀 것들 보이시죠 여기도 있고 또 여기도 있고. 엄마는 내가 무슨 큰 병에 걸린 것처럼 새파랗게 질려서 네네 보입니더 선생님 이게 뭔가요 심각한 건가요 라 물었더니. 선생님은 약간 화가 난 어조로. 이게 다 씨입니다. 참외 드셨죠. 꽤 많이 좝셨나 봐요. 오 여기도 씨입니다. 네에 이것도 씨구요. 맞아요 이것 또한 씨입니다. 씨 씨 씨. 대장 이곳저곳에 참외씨가 붙어있어 제거하고 검사한다고 시간이 오래 걸렸다며 고개 절레절레 와 한숨 콤보를 투척하시던 모습이 마취가 덜 깬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게 기억난다. 엄마는 또 죄인처럼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했다. 위염과 장염 증세가 있으니 커피나 과일, 우유는 당분간 끊어라고 하셔서 알겠다고 대답하고 그것들과 함께 그 병원도 끊어버렸다 쪽팔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