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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Jan 16. 2023

의사 선생님 전 그럼 이제 어디 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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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가 되면 나는 건강검진을 받는다. 운동은 안 하지만 오래 살고 싶어서 병원은 자주 가는 편이다.

국가에서 해주는 공짜 검진이라서 가장 기본적인 검사만 받은 편인데 검사 항목에 있는 의사면담은 항상 5초 컷이었다. 매번 그렇게 숨 쉬는지 여부만 확인하다가 웬일인지 그날은 의사 선생님과 1분가량 길게 대화를 나눴다. 노크하고 들어가니 60대 중후한 의사 선생님이 갈색 안경을 매만지시며, 먼저 체크한 내 몸무게를 보셨는지 내가 의자에 앉음과 동시에 거참 맛집 좋~아하게 생겼네 폭탄 투척. 이것은 성희롱인가 무게희롱인가 정신이 혼미 해질 때쯤 상담이 시작됐다. 


운동 자주 하시나요? 아니여  

고강도 운동은 얼마 하시나요? 전혀여 

에 운동한 적은 있나요? 숨쉬기 정도만 


의사 선생님의 눈이 세모로 변함과 동시에 한숨 섞인 목소리로 본인 말을 이어가셨다.

환자분. 맛집 좋지요? (좋다고 말한 적 없음) 맛있는 거 좋지요?(먹는 거 좋아한다고 말한 적 없음) 근데 운동하셔야 합니다. 맛집 찾아다니지 말고 건강 위해 운동하세요.(다시 한번 말하지만 맛집 다닌다고 말한 적 없음) 의사 선생님은 무슨 앵무새 마냥 맛집맛집 노래를 부르셨다 난 또 맛집무새인 줄. 그렇게 1분가량 이유 없는 혼남을 당하고 뭔가 분한 마음에 다이어트를 결심했지만 하루도 안 가서 밀가루 못 끊어 설탕 못 끊어. 대신 그 병원을 끊어버렸다.


또 한 번은 내과에 가서 인생 첫 위내시경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이 엄마 지인이라 나를 오랜만에 본다며 본인 병원에 외국인도 가끔 오는데 와서 일하지 않겠냐면서 나를 굉장히 자랑스럽게 외국에서 살다 온 능력자로서 현재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영어슨생님 이라 간호사선생님한테도 소개해주셨다. 과도한 환영을 뒤로하고 나는 그때 처음 수면마취를 했는데 중간 기억은 전혀 나지 않지만, 집에 가는 차 안에서 엄마는 앞으로 저 병원은 못 다니는 건 둘째치고 의사 선생님도 부끄러워서 못 보겠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마취에서 깨어날 때쯤 헛소리 시전을 했다고 한다. 침대에 누워서 계속 이것은 A입니다 따라 하세요 에에에에에이, 에이, 에에이, 에이↗ 에이 ↘ 에에에에 에이만 한 5분 동안 고장 난 라디오처럼 무한 반복. 개망신의 촉을 느낀 엄마가 나를 흔들어 깨웠고 그 소리에 나는 또, 네 잘했어요 이제는 B입니다. 비 비이이이비→  브 브 브 브 비! 비이이이이 이러다가 알파벳 전체를 수면 강의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엄마는 나를 있는 힘껏 꼬집어서 겨우 깨웠다고 한다. 그리고 서툴러 회복실에서 나왔고 검사 결과를 들으러 원장실에 갔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따.. 따님이 영.. 영어를 잘... 잘하네요 이 한마디에 이 병원 하고는 이제 끝이구나 생각이 들어 작별 인사할 겨름도 없이 나를 등 처매고 빠져나왔다고 한다. 엄마는 이 일로 20년 지기 지인과 단골 병원을 잃었다고 했다.


3년 전에는 갑자기 몸 상태도 안 좋아지고 소화불량이 계속 지속되어서 고오급 건강검진을 받았다. 위염을 달고 살아서 위내시경은 자주 했는데 대장내시경은 처음이라 긴장을 많이 했다. 내시경 받기 전 의사 선생님 면담을 하러 들어갔는데 잘생긴 젊은 의사 선생님이 계셨고 대장내시경 약복용법과 어쩌고 저쩌고 설명을 해주셨는데 그냥 나는 아무것도 안 들리고 저분께 나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을 오픈한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고개를 저절로 땅에 처박게 했다. 어쨌거나 약을 주면서 검사 3일 전부터 금지해야 할 음식을 말해주셨다. 곡식류 과일류 고춧가루 뭐 그런 작은 알갱이류를 섭취하지 말라 해서 3일 전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매운참치김치찌개와 후식으로 참외를 야무지게 먹었다.


정해준 대로 약 챙겨 먹고 속과 마음을 비운 후 병원으로 갔고 엉덩이 뚫린 굴욕의 초록바지를 입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거리다 검사실에 들어갔는데 엄마말로는 의사 선생님이 처음에 말해준 검사시간보다 40분 정도 더 걸려서 밖에서 꽤나 걱정했다고 했다. 내시경을 다 받고 결과를 들으러 갔는데 선생님이 검사하면서 찍은 나의 대장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이 하얀 것들 보이시죠 여기도 있고 또 여기도 있고. 엄마는 내가 무슨 큰 병에 걸린 것처럼 새파랗게 질려서 네네 보입니더 선생님 이게 뭔가요 심각한 건가요 라 물었더니. 선생님은 약간 화가 난 어조로. 이게 다 씨입니다. 참외 드셨죠. 꽤 많이 좝셨나 봐요. 오 여기도 씨입니다. 네에 이것도 씨구요. 맞아요 이것 또한 씨입니다. 씨 씨 씨. 대장 이곳저곳에 참외씨가 붙어있어 제거하고 검사한다고 시간이 오래 걸렸다며 고개 절레절레 와 한숨 콤보를 투척하시던 모습이 마취가 덜 깬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게 기억난다. 엄마는 또 죄인처럼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했다. 위염과 장염 증세가 있으니 커피나 과일, 우유는 당분간 끊어라고 하셔서 알겠다고 대답하고 그것들과 함께 그 병원도 끊어버렸다 쪽팔려서.



이로써 나는 세 개의 검진병원과의 인연을 끊어버렸다. 

올해는 어디로 가서 

개망신을 한번 당해볼까나 룰루








 다들 잊지말고 건강검진 챙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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