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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Jan 15. 2023

제발 누가 날 좀 말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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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웬만한 일에는 잘 흥분하지 않는다.

누가 내 뒷담화를 해도 그려려니, 그토록 꿈꿔온 연예인과의 만남에도 그려려니 평점심을 유지했고, 월급이 생각보다 적게 들어와도 그려려니, 음식에서 머리카락이 나와도 그려려니 한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하는 경우가 딱 한 가지 있다. 그건 바로 마트에 갔을 때다.


전에도 밝혔다시피 난 식탐이 있지는 않지만 저장강박증처럼 뭐든 닥치는 대로 사 모아야 하는 스트레스의 노예이기 때문에,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개비스콘 CF처럼 가슴 답답한 통증이 시원하게 쏵 사라진다. 오죽하면 엄마가 내가 아파서 골골거리고 있으면 마트에 데리고 갈 정도로 나는 병적인 마트매니아다.

딱히 뭔가 필요해서 마트를 간다기보다는 가보면 뭐든 필요한 게 있을 것 같아서 동네 5군데 마트를 도장 깨듯 돌아다니면서 여기 찔끔 저기 찔금 권법으로 티끌 모아 태산을 만든다. 돈 쓰는 건 언제나 즐겁고 양손 가득은 날 항상 흥분시킨다.


새로운 마트가 개업하는 날은 눈이 뒤집어진다. 개업전단지를 고이 모시고와 경건하게 앉아서 한번 스캔하고는 평소에 잘 끼지도 않은 안경까지 쓰고 앞으로 필요해 보이는 물건에다가 동그라미를 친다음 사람이 적을 것 같은 어중간한 시간에 마트에 간다 그리고 입장하자마자 정신줄을 놓아버린다. 개업하는 마트는 인심이 후하다. 파격세일 표시를 보면 심장이 빠르게 뛰고 거기에 1+1 빨간딱지를 보면 이미 난 심장마비 삐이이이이.


예전에 동네 마트가 장사가 되지 않아 폐업한다고 토요일 딱 하루만 물건을 헐값에 판다고 카톡이 왔다. 토요일은 주말 시작이라 조금만 방심해서 늦으면 이 동네 아줌마들한테 물건 다 털릴 것 같아 똥 마려운 개처럼 끙끙 거리며 칠흑같이 긴 2일을 기다렸다. 분명 정신 못 차리고 무작정 쓸어 담을 내 성격을 알기에 옆 동에 사는 친구에게 마트에서 내가 정신줄을 놓을 것 같으면 뺨을 후려쳐달라고 부탁하고 같이 가달라고 했다. 마트 오픈시간이 9시인데도 굳이 8시 50분에 가서 기다렸는데 (손님 아무도 없음)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가격이 저렴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지막이라는 노란 딱지가 날 조급하게 만들었다. 체대출신인 내 친구의 오른손이 여러 번 내 뺨 주위를 왔다 갔다 했지만 움찔움찔하면서도 눈치껏 물건을 양껏 담았다. 처 맞을걸 알면서도 자제를 못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지만 마트 성애자인 나에게는 약도 없다.


내가 무작정 사 모으기만 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사모으는 것만큼 나눠 먹는 것도 좋아한다. 나눠먹기위해 물건을 사는것 같기도 하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걸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터라 맛있는 게 있으면 내가 먹는 것보다 남이 먹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더 행복하다. 이건 부모님의 영향이 크다. 먼저 아빠 이야기를 하자면, 아빠는 낚시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잡아온 물고기를 동네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준다 그것도 손질까지 싹 다 하고 친절하게 곱게 썰어서 까지. 옆에서 엄마는 그런 아빠를 보고 한심하다고 혀를 차는 동시에 회만 주면 정 없다고 야채와 초장까지 대령해주곤 아빠랑 같이 집집마다 배달해준다. 이뿐 아니라 한 여름에 몇 시간 동안 쎄빠지게 잡은 다슬기를 삶아, 또 몇 시간 동안 눈 빠지게 깐 뒤 그걸 죽으로 끓여 동네사람들한테 나눠주고 우리는 정작 껍질만 남았지만 아빠는 그게 즐겁다고 했다.


우리 엄마는 아빠보다 더한 사람이다. 김밥을 한번 싸면 기본 50줄이다. 이왕 야채 볶고 밥하고 준비하는 김에 손만 몇 번 더 움직거리면 한 줄 정도 뚝딱이라며 조물조물해서 50줄 완성이요. 그리고는 또 동네사람들에게 나눠준다. 나는 처음에는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는데, 예전에 엄마가 호박죽을 끓인다고 늙은 호박 3개를 드럼통만 한 냄비 2개에 넣고 땀에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양손으로 큰 원을 저어가면 주걱을 휙휙 젓는 걸 보면서 저 엄마는 진심이구나 느낀 뒤로 그만 내버려 두기로 했다. 대접받은 아줌마들이 고맙다고 다시 야채나 곡식으로 되돌려주면 엄마가 또 그걸로 월남쌈, 샐러드, 만두, 죽으로 돌려준다. 이런 돌고 도는 루틴이 엄마는 사람 사는 정 아니겠냐고 수고롭지만 재밌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는 본인 음식에 대해 칭찬받는 걸 좋아하는데 맛있다 맛있다 해주면 아빠를 팔아서라도 뭔가를 만들어 줄 사람임은 틀림없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주변사람들과 나누는 걸 좋아한다. 내가 사서 쌓아두는 만큼 또 나눠먹기 때문에 매번 사도 사도 채워놓을 빈공간이 생긴다. 대가를 바라고 하는 건 절대 아니고 내가 정성껏 준비한 걸 맛있게 먹어주고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상부상조 아니겠는가. 직장 다닐 때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매운 땡초 김밥을 울면서 (매워서..) 몇 십 줄 만 적도 있고, 쿠키와 빵은 기본이고 볶음밥에 인절미에 달고나에 집에 있는 거 다 털어 간식을 준비해서 동료들과 나눠먹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왜 그랬나 싶을 정도로 호구산타짓 했지만 아깝거나 후회스럽진 않다. 가아아아끔은 얄미운 동료가 처묵처묵 하는 걸 보면 목젖을 치고 싶은 적은 있었지만. 흐음.


오늘도 어김없이 카톡으로 세일전단지가 왔다. 이사 준비 중이라 집에 있는걸 먼저 다 먹어야 하기 때문에 사지말자 다짐하지만 호떡믹스 1+1 은 못 참아.




빨리 계산해 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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