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에 소름이 돋고, 머릿속이 새하애 졌지만, 이미 술이 잔뜩 취해 눈이 돌아버린 사람을 상대로 내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기에 조심히 조용히 상황에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인기척 때문에 깼어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아니야, 그냥 들어와봤어. 어서 자."
나는 최대한 차분히 호들갑 떨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 남자의 말에 소름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돋는 기분이었다. 그는 전혀 방에서 나갈 마음이 없어 보였고 사람을 빤히 쳐다보며 아무렇지 않게 다시 잠들라는 말을 하는 걸 보고는. 이 새끼 정상아냐. 눈이 돌았어.
상대방은 언제든 나를 제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 일단은 방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 하나뿐이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 남자는 살집이 있어 덩치가 컸기에 섣불리 행동하면 모든 게 끝나겠구나 싶어 잔머리를 굴렸다.
"오빠, 저 소변이 마려워서 화장실 좀 갔다올께요."
최대한 침착하게. 하지만 속으로는 눈물콧물찡.
나는 방에서 빠져나와 남자방으로 뛰어갔고, 자고 있던 세 명의 오빠들을 다급히 깨웠다. 여자방에 그 남자가 들어와서 나갈 생각을 안 하니 너무 무섭다고 도와달라고. 다행히 오빠들은 술기운에 비틀대긴 했지만 상황을 파악하고는 여자방에 들어가지 말고 남자방에 그들과 같이 있자고 했다. 사실 그들도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 그렇게라도 나를 도와줬다. 나는 6대의 침대 중 가운데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까지 덮고선 숨을 죽였다. 절대 잠들면 안된다 굳게 다짐했고 어서 빨리 해가 떠, 아침이 밝아오길 기도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10분이 지났을까, 오빠들 중 한 명의 코 고는 소리만 나지막이 들릴 때쯤, 굳게 닫아놓았던 남자방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는 그 남자가 조용히 들어와서 침대 하나하나를 살피는 것처럼 보였다. 침대 정렬이 디귿자 모양으로 되어있었는데 문에서 가까운 침대를 1번으로 순번을 매기자면 오빠 2명이 2,3번, 나는 4번, 나머지 한 명의 오빠가 5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남자는 2번 침대로 가더니 위에서 한참 오빠를 내려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는 옆 침대로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또 한참을 내려다봤고 잠시 뒤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 조용한 발자국 소리가 내 귀에는 천둥처럼 들렸으리라.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내 몸의 진동을 알아차리면 어떡하지 걱정이 되면서도 새어 나오는 공포심에 몸의 떨림을 제어를 할 수 없었다.
저벅저벅저벅. 그리고 내 앞에서 딱 멈춘 발소리. 나는 이불속에서 두 눈을 꼭 감고 혹여나 숨소리라도 내어나갈까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1시간 같던 1초의 침묵.갑자기 머리까지 덮었던 이불이 슬며시 들추어졌고, 그 찰나에 차가운 바람과 나그막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 여기 있었네."
전설의 고향 아닙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아닙니다.
그 남자는 나를 찾아다녔고 마침내 나를 찾아냈다. 한 손으로 내가 덮었던 이불을 꼭 쥐고 있고 위에서 나를 한참 내려다보더니 내 얼굴 옆으로 허리를 숙여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 저 방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설의 고향 아닙니다.
내가 봤던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공포스러운 현실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큰소리로
" 아이고오오오옹 놀래라. 깜짝 놀랐어요. 오빠, 안 주무셨어요?."
내 구조요청 같던 고함소리에 잠자고 있던 나머지 오빠들도 깨버렸고 단숨에 상황을 판단한 넉살 좋던 A군이 그 남자를 꼬득여 거실로 나갔다. 다른 오빠들도 이렇게 그 남자를 두면 안될것 같다고 느꼈는지 그냥 일어나 차라리 다 같이 거실에서 이야기나 하며 놀자고 분위기를 그쪽으로 전환했다. 그때 시간은 대략 새벽 4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그렇게 우리 5명은 다시 식탁에 둘러앉았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오빠들은 반쯤 감긴 눈과 퉁퉁부은 얼굴로 피곤해 보였지만 그 남자는 표정없는 시체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밝은 조명 아래에서 쳐다볼 용기가 나질 않았고 더군다나 이미 공포심에 온몸이 떨리고 있던 터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내 상황을 눈치챈 A군이 나보고 내일 아침비행기니 (실제로는 오후비행기) 어서 들어가서 짐을 챙기라고 방으로 보내줬다.
내가 들어가려고 하자 바로 뒷따라 그 남자가 따라오려고 했고 오빠들은 한사코 그 남자를 말리며 유럽 여자이야기나 하자고 그 남자를 꼬셔댔다. 그렇게 다시 그 남자의 환심 사기에 성공한 오빠들 덕분에 나는 방에 혼자 들어갈 수 있었다. C군이 잠시 따라 들어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자기가 문밖 앞에 앉아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어린 나를 달래주었다. 그렇게 나는 방에서 외출옷을 다 껴입고 해가 뜨자마자 뛰쳐나갈 작정으로 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문틈사이로 들리는 그 남자와 오빠들의 소리가 조금씩 작아지고, 서서히 조용해질 때쯤 창밖을 보니 어둑했던 바깥이 점차 밝아졌다. 문에 귀를 대보니 거실이 고요했다. 살짝 문을 열어 거실을 살피니 몇 개의 빈 소주병만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고 사람들은 없었다. 혹시나 싶어 방에서 20분을 더 초조하게 기다렸고 다들 깊게 잠들었을 것이라 확신한 뒤 그렇게 나는 도망치듯 캐리어를 끌고 그 숙소를 빠져나왔다.
딱히 그 남자가 나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한게 아니라 경찰에 신고할 수도 (독일이라 신고할 방법도 몰랐다), 그 한 밤에 밖에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밖이 더 위험할수도 있으니). 그냥 몇 시간만 견디자 싶은 마음으로 버텨던것 같다. 캐리어를 끌고 밖에 나오니 아직은 추운 새벽이라 길거리가 휑했다. 딱히 갈 곳도 없어 빨리 공항으로 가버리자 싶은 마음에 속도를 내서 걸어가고 있는데 술 취한 독일 커플이 나에게 시비를 걸었다. 평상시 같으면 쭈구리처럼 깨갱 했을 텐데 이미 난 지옥에서 걸어 나온 몸이라 그들의 칭챙총 드립이 귀엽게 느껴졌다. 눼에눼에 와따시와 칭챙총총총총.
그렇게 정신없이 한국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리고 일주일 뒤쯤인가 네이트온(메신저)아이디를 주고받았던 C군이 나에게 쪽지를 보냈고 그렇게 우리는 한참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C가 전해준 내용이 꽤나 충격스러웠다. 대부분이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이게 진짜일까 싶은 의문이들 정도로 너무 소설같았기 때문이다.